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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14무기에 대해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3,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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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무기에 대해선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무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무기(無記)는 간단하게 말해서 수행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행이나 말이나 토론 등을 말합니다.
대체로 있다 없다.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또는 윤회가 있는가? 없는가? 우주는 영원한가 아니한가 등이나, 정치적인 상황을 두고 누가 옳은가 그른가 하는 법과는 상관없는 상대적인 두 가지를 묻고 어느 것이 옳은가? 하고 토론하는 것을 두고 무기라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불이법(不二法)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것을 떠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논의는 아무런 쓸데가 없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대답을 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중아함경 제60권 전유경(箭喻經) 제10에서 말씀하시기를
"우주 시간은 영원하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도 남이 있고 늙음이 있으며 병이 있고 죽음이 있으며, 슬픔 · 울음 · 근심 · 괴로움 · 번민이 있으니, 이리하여 이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생긴다. 이와 같이 "우주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우주 공간은 유한하다. 우주 공간은 무한하다. 자아와 육체는 같다. 자아와 육체는 다르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도 있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여기 없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없는 것도 아니고 없지 않는 것도 아니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도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으며, 슬픔 · 울음 · 근심 · 괴로움 · 번민이 있으니, 이리하여 이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생긴다.
세상 시간은 영원하다"는 말을 나는 언제나 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로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이치(義)에 맞지 않고 법(法)에 맞지 않으며 또한 범행(梵行) 근본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혜(智)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깨달음(覺)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우주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우주 공간은 유한하다. 우주 공간은 무한하다. 자아와 육체는 같다. 자아와 육체는 다르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도 있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없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느 따위 말을 나는 언제나 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으로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치(義)에 맞지 않고 법(法)에 맞지 않으며 범행(梵行) 근본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혜(智)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깨달음(覺)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오직 사성제는 언제나 말한다고 하면서 역시 앞의 글에 이어서
"그러면 나는 어떤 법을 언제나 말하는가? 나는 다음과 같은 이치(義)를 언제나 말하는데, 그 이치란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苦習)과 괴로움의 소멸(苦滅)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苦滅道跡)이다(사성제). 나는 언제나 이것들(사성제)을 말한다. 무슨 이유로 나는 언제나 이것들(사성제)을 말하는가? 이것들(사성제)을 말하는 것은, 이것들(사성제)은 이치(義)에 합당하고 법(法)에 합당하며 범행(梵行)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지혜(智)로 나아가게 하고 깨달음(覺)으로 나아가게 하며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이것들(사성제)만을 말한다. 이와 같은 것이 바로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은 말하지 않고 말하여야 할 것은 말한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이러한 태도를 가짐으로써, 이와 같이 진정 가져야 할 것을 가지고 진정 배워야 할 것을 배워야 한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법은 오직 한 법일 뿐,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을 따지고 분별하고 선택하는 것은 오히려 시비심을 일으켜 번뇌만 증장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 저도 이런 물음을 물으러 가끔 찾아오시는 분들이 있지만 저 역시 이런 것에 대해선 대답을 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물음은 법을 깨닫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에 놓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대체로 불만을 품고 떠나가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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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무명님의 댓글
먼저 질문에 답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불교에서 無記를 다른뜻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행이나 말이나 토론 등을 말함" 이 아니라, '말하지 않음' 이 아닌가요? 보여주신 전유경에도 부처님은 "말하지 않는다"고 나오는데요??
제 질문에 대한 답은 "이치(義)에 맞지 않고 법(法)에 맞지 않으며 범행(梵行) 근본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혜(智)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깨달음(覺)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 될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답만으로는 왜 그러한지에 대해서는 더욱 의문을 갖게합니다. 이런 부분들을 법사님께서 해명하여 풀어주실걸로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질문이 법을 깨닫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말씀이신지요?
윤기붕님의 댓글
왜 행이나 말이나 토론이라고 하느냐 하면,
지금 님께서 저의 답에 속이 시원하시지 않고 다시 물음을 일으키시니 다시 대답을 하게 되지요. 여기서 이것이 맞느냐 저것이 맞느냐 하면 토론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래서 토론이라 했고,
행은 무기공(無記空)이라 하여 생각 자체를 없애려고 아무 생각도 앉아 있는 것 역시 무기에 속하기 때문에 행이라 한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계실 적에 외도가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죽어서 어디로 갑니까?"
부처님께서는
"여기에 나무가 있다. 어떠냐?"
하고 되물었고, 그 외도는
"네. 나무가 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나무에 불이 붙었다. 어떠냐?"
"네. 나무에 불이 붙었습니다."
"불이 꺼졌다. 어떠냐?"
"네. 불이 꺼졌습니다."
하고 외도가 대답을 하자. 부처님께서는
"그럼 불은 어디로 갔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외도는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했고, 부처님께서는
"알수 없는 것에 대한 관심은 수행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을 무기(無記)라 한다."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만약 서로의 생각으로 지은 의견을 내어 대화를 나눈다면 결국 토론이 되고, 결국 갈릴레이 갈리레오 시절에 인간들이 지구가 돌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모두가 지구는 돌지 않는다고 정의한 것과 같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미래에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밝힐 수 있는 수퍼컴퓨터가 나온다면, 인간의 소소한 물음을 다 대답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토론하고 의견을 나누어 봐야 아무 소득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을 안다고 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고, 또 깨달음을 얻으려는 목적이 충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법을 깨달으시려고 하신 이유는 고(苦)의 소멸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연기중도(緣起中道)를 깨달으셨고, 일체 만법이 모두 평등하고 실답고, 다만 연기법에 의해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변해간다는 사실을 아시고는 인간이 생각으로 있다 없다 하고 짓는 모든 것이 허망함을 아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을 깨닫는 것은 일체가 공하고 만법이 모두 연기에 의해 생기고 변하지만, 그 모든 것이 다 이 한 법의 일일 뿐, 다른 일이 없는 중도를 깨달으시고는 모든 고에서 벗어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우주는 불이법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오직 한 법만이 진실하고.세상에 드러난 만법은 이 한 법의 연기작용에 의해 이 한 법을 그대로 드러낸 것입니다.
공한 법에서 만물이 드러나고, 또 연기법에 의해 끊임없이 변하니 이것이다 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있다 하면 다 망상입니다.
하지만, 매 순간은 일체 만법이 이렇게 이 한 법의 연기작용에 의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없다고 해도 망상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모든 것이 없다는 단견(斷見)과 일체가 늘 있다는 상견(常見)을 여의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우주는 이 한 법의 성품을 모두 가지고 있어 이 한 법의 성품을 따라 만법은 자체 성품이 없습니다.
그래서 연기작용에서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이 한법의 성품과 작용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일러 결정성(決定性)이라고 하고,
다른 말로 여(如)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는 응당, 반드시 라는 뜻과, ~와 같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응당, 반드시는 법이 그렇다는 뜻이고, ~와 같다는 것은 법과 같다는 말입니다.
'응당' '반드시' '~와 같이'라는 것은,
이 진리가 텅 비어 있는 것이 '응당', '반드시'이며 결정성이고,
이 한 법으로 세상에 드러난 만법은 모두 연기의 작용을 따르기 때문에 스스로의 성품이 없고, 또 잠시도 머물지 않습니다.
잠시도 머물지 않으니 역시 空입니다.
그래서 만법이 그러한 것이 ~'와 같이' 즉 '법과 같이'이고, 법과 같으니 '응당' '반드시'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여여, 여실, 여법, 여래, 진여 등등으로 부사나, 어조사인 여를 마치 명사처럼 씁니다.
여(如)... 이것이 이 법계(우주)의 진실입니다.
그리고 깨달은 사람들은 모두가 이 사실을 알고 모든 인간의 생각의 알음알이와 욕심과 집착을 놓음으로써 깨달음을 얻었고 고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다르게 깨달은 수도 있지, 깨달은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말한다고, 그것이 진실이냐고 묻는다면, 끝이 없겠지요. 진리를 알 지 못하는 사람들이 천년만년 토론한다고 진리가
'너희들이 뜻이 그러니 내가 그렇게 하마.'
할 것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왜 그러한 깨달음이 옳으냐고 물은 것에 대한 대답이 있어 실제로 있는 예를 들겠습니다.
최근에 어떤 스님(실명은 그분의 동의가 필요하고,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네요.^^)이 깨닫고 난 뒤에 다른 스님이 찾아와서 물었답니다.
"스님께서 아신 것이 어떻게 깨달음이라고 자신하십니까?"
그러자 이 스님께서 말했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을 부처님 말씀이나, 조사님들의 말씀과 비교해보십시오.
하지만, 그것은 책을 읽고 그렇다고 할 수 있으니,
지금 우리나라도 그렇고 외국에서도 많은 분들이 깨달음을 얻고 책을 많이 내고 있으니
그분들이 말하는 것과 비교해보십시오.
그리고 설사 제가 앵무새처럼 남의 글을 읽고 말한다 해도, 그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증거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특히 외국에 있는 사람들과 국내의 사람들은 서로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인데도 그들이 말하는 것은 서로 똑같은 말을 합니다.
그런데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한 솥밥을 먹고 한 스승 밑에서 공부를 하고 한 이불을 덮고 자도, 서로의 의견이 설왕설래할 뿐,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합니다.
이것이 어떤 이치인 것 같습니까?"
라고 대답하니 찾아온 스님이 아무 말 없이 떠났다고 합니다.
물론 여기서 또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소수인데 하고 또 따지면 끝이 없겠지요.
무기란 이런 것입니다.
진리는 인간의 의문을 충족한다고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런 의문이 풀린다고 해서 인간의 근본 번뇌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만 말하겠습니다.
일체가 본래 그러하여 이치라는 것이 따로 없습니다.
그것이 이치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이 이치다.' 하고 이치를 들면 다 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면 모두 틀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깨달은 사람도 '이것이다.'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것이다.' 하는 것은,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면 다 틀린다.'고 하는 '이것이다.'를 말할 뿐입니다.
주역(周易)의 정의가
"이 우주는 변한다."
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정의가 있습니다.
"이 우주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 우주는 반드시 변한다는 것이다."
입니다.
아무리 변하고 아무리 머물지 않아도 변하지 않고 머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법이요, 진리입니다. 이것을 일러 불교에서 결정성, 즉 여(如)라고 합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스스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은 선지식이나 조사들의 말처럼 자신의 알음알이를 놓고 인연 따라 사는 것입니다.
왜?
일체가 법이기 때문입니다.
일체가 법인데 의문을 일으키면 그것이 무기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문이 풀린다고 번뇌가 사라지는 것도 역시 아닙니다.
그래서 육조스님께서도 육조단경에서
"무릇 사람들을 교화할 땐 방편이 있어야 하니,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의문을 깨뜨리지 않게 하면 보리(菩提)가 드러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말의 뜻은 의문을 내려 놓을 때 알 수 있고, 내려 놓는 것 역시 스스로 하셔야 할 것입니다.
무명님의 댓글
제가 외도들의 14가지 질문에 부처님께서 말하지 않은 이유 즉, 무기한 이유를 물었지, 무기의 뜻을 물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한글만 알면 누구라도 이때 무기는 '말하지 않는 침묵'임을 다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기( 침묵)한 이유는 그만두고, 무기라는 말의 뜻조차 '토론이나 말하는 것' 이라고 하여 정반대로 주장하시니 한마디로 황당합니다. 다른것은 더 볼 필요도 없겠습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14무기에서 말하는 무기는 부처님께서 외도의 물음에 침묵으로 대한 것을 말하니, 님의 말씀처럼 '말하지 않는 침묵'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후대로 내려오면서 무기의 뜻이 부처님께서 답하지 않은 뜻까지 내포하여 씁니다.
제가 말하면 제 말이라고 하실 것이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이와 같은 글이 있으니 그대로 옮겨 왔습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식이 외부로 표출되는 것을 선과 악과 무기의 3성(性)으로 구분하는데, 이 중 무기는 선악의 분별이 없는 상태이다. 일반적으로 선과 악, 흑백 등의 상태가 분명한 것을 유기(有記)라고 하는데, 선·악이라고 분명히 규정지을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무기라고 한다. 따라서 유기의 선과 악에는 좋은 과보와 나쁜 과보가 따르지만, 무기에 대해서는 어떤 과보도 따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 까닭은 무기의 업(業)에 대해서는 자성(自性)에 기록할 것이 없기 때문에 미래의 과보를 받지 않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무기는 덮어 가릴 수 있는 유부무기(有覆無記)와 덮어 가릴 수 없는 무부무기(無覆無記)로 크게 나뉜다. 유부무기는 번뇌에 오염되어 능히 수행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이고, 무부무기는 수행 자체에는 방해를 주지 않는 무기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유부무기를 제거해야 함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가종(瑜伽宗)·자은종(慈恩宗) 계통에서 무기에 대하여 많이 취급하였으나, 독창적인 학설 등은 전하지 않는다. 오히려 승려들의 선수행(禪修行)에서 이 무기를 타파하는 문제가 크게 대두됨에 따라 선종(禪宗)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고려 중기의 지눌(知訥)은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을 세워서 선을 닦는 지침으로 삼았다. 그는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에서 마음이 밝게 깨어 있는 성성(惺惺)의 상태로서 아무런 생각 없이 흐리멍덩한 무기를 다스리고, 고요한 적적(寂寂)으로서 분별하는 가지가지 생각을 다스리라고 하였다. 또, 『수심결(修心訣)』에서는 정(定)으로써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 혜(慧)로써 무기를 다스릴 것을 강조하였으며, 마음이 고요하기만 하고 밝은 혜가 없으면 혼침하여 무기의 상태에 떨어진다고 하였다.
또한, 고려 말의 나옹(懶翁)은 “고요한 가운데 화두(話頭)가 없는 것을 무기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 중기 이후 선종에서는 참선수행에서 무기의 상태에 떨어지는 것을 크게 금기로 삼았고, 오히려 산란한 마음의 상태보다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지는 것을 더욱 경계하게 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의 선수행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뜻은 다른 사전에도 부처님의 십사무기의 뜻이외의 뜻으로 싣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부처님 14무기 이후로 후대로 내려오면서 무기를 단순히 침묵으로 대하는 것만의 뜻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침묵하신 이유인 수행에 방해되거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행위까지 포함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무기를 경계하는 이유는 선도 악도 아닌 무부무기는 사람들에게 해는 없지만, 그 역시 수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유부무기는 번뇌에 오염된 것으로 수행에 방해되는 것이라 하고, 나아가 이렇게 번뇌로 오염된 생각만 무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토론까지도 수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법과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무기의 영역에 집어 넣어서 경계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람의 생각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무리 자신의 다른 경험을 떠올려 생각하여 그림을 그리더라도 절대로 그려낼 수가 없습니다. 설사 그려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말로 어쩌다가 그린 것이지 자신이 진정으로 알고 그린 것이 아닙니다. 그렇듯, 깨닫지 못한 사람이 아무리 깨달음에 대해 서로 옳다고 토론한들, 그것은 깨달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오히려 자신이 옳다는 아상만 키우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이 또한 수행을 방해하고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무기의 영역에 집어 넣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선에서 화두도 잊어버리고 고요한 곳에만 머무는 것은 무기공이라 하여 차라리 산란한 마음 상태보다 더 나쁘다고 경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기의 행입니다. 우리나라가 선 불교를 하는 나라인데, 이 집단에서 무기를 몰라서 화두를 잊어버리고 고요한 곳에 머무는 것을 무기의 영역에 포함시켜 무기공이라 하겠습니까?
그리고, 부처님께서 무기하신 이유에 대해선 글 속에 이미 말해놓았습니다. 부처님께 물은 질문들이 수행과 법과 이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에 무기하신 것이고, 그 때문에 후대에는 수행과 관계없거나 방해되는 것이라는 의미로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저와 님께서 이렇게 주고 받는 것에도 단순히 서로가 자신의 생각에, 또는 마음에 든다 안든다 하며 옳다 그르다 하고 토론으로만 끝난다면 이 또한 무기일 뿐입니다.
무명님의 댓글
불교에서 '無記'라는 단어는 두가지 뜻으로 각기 다르게 사용합니다.
하나는 14무기에서 처럼 침묵이란 뜻으로 사용하며, 다른 하나는 사전에서 소개한것 처럼 혼침의 뜻으로 사용합니다.
불자라면 이거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뿐아니라, 제 질문 내용에서 이미 설명되었는데도 선생님은 두번에 걸친 답변에서 14무기의 무기를 혼침의 뜻을 가진 무기로 설명하면서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이어 갔습니다. 또 이상한것은 소개한 전유경의 내용이 14무기에 대한 내용인데도, "14무기에 대해선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무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라고 한것은 자신이 설명한 내용이 무엇에 대한 설명인지도 모르는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는 점입니다.
또 위의 3번째 답변에서 "하지만, 후대로 내려오면서 무기의 뜻이 부처님께서 답하지 않은 뜻까지 내포하여 씁니다." 라고 하며 사전의 내용을 옮겨 왔는데, 혼침의 뜻인 무기가 부처님께서 답하지 않는 뜻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말씀인지 그 뜻이 명확치 않습니다만, 무기의 뜻은 이미 제가 설명했듯이 두가지 뜻으로 달리 사용하고 있음에 의심이 없을뿐 아니라, 무기의 뜻은 처음부터 묻지도 않았으니 무기의 뜻을 가지고 더 이상 견강부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그런데 이런 논의가 님께 무슨 도움이 되십니까?
전 이런 물음을 가진 적도 없고, 또 이 법을 깨닫고 보니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무기가 이런 뜻이라 하고 알고 있어도 아무런 일이 없는데 말입니다.
참으로 문자로 이 법을 공부하시는 분들의 폐단이 이런 것입니다.
말은 말일 뿐입니다.
님께서는 그것이 깨달음에 도움이 되신다면 무기를 그렇게 아시면 됩니다.
더이상의 논의는 제 생각에는 쓸데 없는 일로 무기이니 여기서 그만 두는 것이 좋을듯합니다.
없음님의 댓글
선생님 법문을 들어보세요.
이보다 세세하게 설명? 하는분이
아마 없으리라 보는데 깨닫지는 못하더라도 의문은 풀릴거라 생각합니다.
삐카님의 댓글
우리는 스승을 찾거나 혹은 찾지 않을 수 있지만, 그 결정은 항상 본인의 몫이지요.
스승이 제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스승을 찾으며,
스승의 권위는 제자가 부여한 것이어서 어떤 스승도 제자가 부여한 이상의 권위를 가질 수 없지요.
그래서 스승과 제자는 하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