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적천단상

판치생모(板齒生毛) : 선문염송(禪門拈頌) 475칙(則)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4,207

20-05-04 10:00

본문

판치생모(板齒生毛 : 널빤지 같은 이빨에 털이 나다.)

 

어떤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말했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曰 板齒生毛)

 

- 선문염송(禪門拈頌) 475칙(則) -

 

분별심을 없애고 자신이 법 그 자체임을 분명하게 아는 방법은 이 말의 뜻을 알면 된다.

 

판치생모란 불교의 선가(禪家)에서 가장 난해한 화두 중에 하나라고 한다.

이빨에 털이 나다니 도대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한 법, 우리의 본성을 깨달으면 이보다 절묘한 비유와 법문이 없음을 안다.

 

선가에서 화두(話頭)나 공안(公案)을 풀지 말라고 한다.

생각으로 헤아리는 알음알이를 경계한 말이다.

 

육조혜능조사(六祖慧能祖師)께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의 수행(修行)편의 게송(偈頌), 무상송(無相頌)에서 말하기를

 

“만약 어리석은 사람을 교화하려면 반드시 방편이 있어야 하니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의심을 깨뜨리게 하지 않으면 즉시 보리(菩提)가 드러날 것이다.”(若欲化愚人 是須有方便 勿令破彼疑 卽是菩提見)

 

라고 하셨으니,

이 또한 같은 의미의 말이고, 내가 가끔 생각을 어떻게 하려고 시비하지 말라고 한 뜻도 이런 의미이다.

 

본성을 보지 못한 자의 생각은 모두 분별심(分別心)을 따르기 때문에 시비하는 순간 알음알이에 끌려가 생각과 한통속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육조께서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세상에 회자(膾炙)되는 수많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말도 본성(本姓)을 보지 못하고 생각으로 헤아리면 모두 거짓이다.

분별심이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판치생모(板齒生毛)는 이 한 법의 진공묘유(眞空妙有)를 말하고, 공적영지(空寂靈知)를 말하는 것이다.

 

텅 빈 본성에서 모든 것이 나왔다는 말이다.

텅 빈 곳에서 어떻게 모든 것이 나올 수가 있는가? 하지만 그것이 이 한 법이요 법칙이요 작용이며 나와 이 우주의 생성 비밀이다.

 

판치생모(板齒生毛)와 비슷한 말이 다비문(茶毘文)에 있는 ‘눈 있는 돌장승이 눈물을 흘린다. (유안석인제하루 : 有眼石人齊下淚)’는 말이다.

 

그리고 선가(禪家)에 ‘돌계집이 아이를 낳는다.’는 말도 있다.

 

만공스님의 어릴 때 이름은 ‘바우’였다.

14세 때 계룡산 동학사로 출가하여 진암(眞巖)이라는 스님 밑에서 행자 생활을 하다가 마침 그곳을 방문한 경허선사를 만난다.

진암스님은 바우의 근기를 알아보고 경허선사를 따라가라고 했는데, 소년 행자인 바우는 어린 마음에 낯선 스님을 따라가는 것이 싫어서 거부했는데, 경허선사의 법문을 듣고는 마음이 바뀌어 선사를 따라 천장사에 가서 경허선사의 형님인 태허스님을 은사(恩師)로 경허선사를 계사(戒師)로 모시고 월면(月面)이라는 법명(法名)을 받았다.

 

이때가 그 유명한 ‘경허의 세달’이라고 불리는 ‘북쪽의 상현(上弦)달’인 당시 30세의 수월(水月)스님과 ‘남쪽의 하현(下弦)달’인 23세의 혜월(慧月)스님, 그리고 후일 만공(滿空)이라는 법호를 받아 ‘보름달’이 된 14세 소년스님인 월면(月面)이 함께 스승 경허를 모시고 있던 때라고 한다.

 

만공이 스물다섯 되던 해에 어떤 소년이 천장사를 찾아와 하룻밤 동숙(同宿)하면서 만공에게 물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것만 깨달으면 만사에 통하지 않음이 없다 하는데 무슨 뜻입니까?”

 

만공은 대답을 못 하고 그 말은 화두(話頭)가 되어 가슴에 콱 박혔다.

며칠을 잠도 제대로 못 이루다가 어른(태허스님과 경허선사)들을 모시면서 공부하기란 힘들겠다고 생각하고는 몰래 길을 떠나 온양(溫陽) 봉곡사(鳳谷寺)에서 공부하였다.

 

그런데 만법귀일 일귀하처를 들고 있자니 글이 길어 마음이 한 곳으로 모으기가 힘이 들었다.

그래서 일귀하처(一歸何處)를 버리고 만법귀일(萬法歸一)만 들고 참구하다가 그것도 길다고 여겨져 결국 한일(一)자만 들고 앉았다.

 

그러던 어느 날 좌선(坐禪)을 하던 중 자신이 마주한 벽에 홀연히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났다.

하지만 아직도 화두가 풀리지 않아 일원상을 보아도 화두인 일(一)에 대한 의심을 조금도 흩트리지 않고 앉아 밤새 화엄경(華嚴經) 사구게(四句偈)

 

“만약 사람이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알고자 한다면

응당 법계성을 관할지니, 일체가 마음이 짓느니라.”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戒性 一切唯心造)

 

를 외웠다.

새벽종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문득 일(一)자가 풀리면서 일체 만법이 이 법계성(法界性), 즉 이 하나의 성품(法性)으로부터 나왔음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그토록 답답한 화두가 뚫린 것이다.

 

그리고는 주위의 스님들에게 이 경지를 말하고 함께 공부하기를 권했으나, 만공의 경계를 알지 못한 대중들은 멀쩡한 사람이 갑자기 정신이 어떻게 되었다면서 비웃었다.

만공은 대중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그곳에서는 더는 얻을 것이 없음을 느끼고, 그곳을 떠나 공주(公州) 마곡사(麻谷寺) 근처에 있는 작은 토굴에 머물렀다.

 

본사(本寺)를 도망치듯 떠난 다음 해 7월 보름, 마침 스승인 경허선사가 마곡사를 방문하니 만공은 스승을 뵙고 자신의 경계를 내보였다.

 

경허선사는 스승인 자신과 떨어져 홀로 깨달은 만공의 말을 듣고는 속으로

‘화중생련(火中生蓮 : 불꽃 위에 피어난 연꽃, 보통의 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대단한 일)이로다.’

라며 감탄을 했다.

 

그리고는 그 이후의 일을 물어보기 위해 자신이 들고 있던 부채와 입고 있던 등(藤) 토시를 가리키며 만공에게 물었다.

“등 토시를 부채라 하고 부채를 등 토시라 해도 되느냐?”

라고 물었다.

 

그러자 만공은 머뭇거리다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본 선사는 만공의 공부가 아직 설익었음을 알고 선사는 다비문(茶毘文)외게 하고는 물었다.

 

“다비문에 ‘눈 있는 돌사람이 눈물을 흘린다. (有眼石人齊下淚)’는 말이 있는데 무슨 뜻이냐?”

 

만공이 대답을 못 하자.

“눈 있는 돌사람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모르면서 어찌 토시를 부채라 하고 부채를 토시라 하는 도리를 아느냐?”

하고는

“이제 만법귀일 일귀하처의 화두는 더 진보가 없으니 조주(趙州)스님의 무자 화두(無字話頭)를 들어라.”

라고 하며

 

“원돈문(圓頓門)을 짓지 말고 경절문(徑截門)을 지으라.”

 

하고는 만공을 뒤로하고 떠났다.

 

그 후 만공은 스승과의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며 무(無)자 화두를 참구하다가 통도사 백운암에서 장마로 인해 보름 동안 갇혔는데, 그곳에 머물면서 좌선을 하던 중 어느 새벽, 종소리에 문득 무자 화두(無字話頭)가 타파되었다.

 

만법귀일(萬法歸一)의 일(一)에서 이 하나를 꿰뚫고 무자 화두(無字話頭)에서 그 하나마저 던져버린 것이다.

 

그 후 만공은 배고프면 먹고 추우면 옷 입고, 일 있으면 일하고 잠이 오면 잠자는 무위도인(無爲道人)이 되었고, 나중에 함경도(咸境道) 갑산(甲山)으로 떠나는 스승 경허를 만나 전법게(傳法偈)를 받고 만공(滿空)이라는 법호(法號)를 받았다.

 

원돈문(圓頓門)은 보조국사가 화엄경의 교리를 익혀 단박에 깨달음을 얻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후대에 와서는 수행과 교리에 의지하는 티끌이 남았다고 하고

경절문(徑截門)은 수행의 단계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본래면목을 터득하여 바로 부처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라 하여 원돈문 위에 두었다.

 

하지만 이것을 두고 서로 누가 옳으니 하고 논란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오히려 달을 보지 못하고 가리키는 손가락을 시비하는 것밖에 안 되고, 옛말에 ‘꿩 잡는 것이 매’라고 하듯이 깨달으면 어느 길로 왔던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리고 깨달음도 사람마다 인연이 다 다르기 때문에 원돈문이니 경절문이니 하고 다툴 필요도 없다.

 

다만 일체가 한 법이어서 판치생모(板齒生毛)든 돌사람이 눈물을 흘리든 다 이 한 법에서 나옴을 깨달으면 다른 일이 없다.

 

조주선사의 ‘판치생모(板齒生毛 : 널빤지 같은 이빨에 털이 난다.)’는 다비문의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 : 눈이 있는 돌사람이 눈물을 흘린다.)와 같이, 모양 있는 이 세상 만법이 한 모양도 없는 텅 빈 이 한 법에서 나왔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텅 빈 한 법은 마냥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거울처럼 일체만법을 비추어 인연이 되면 무엇이든 일어나게 하는 법칙과 작용이 있어 이 세상의 모든 법이 그것에서 나게 한다.

우리의 마음도 이 한 법처럼 늘 텅 비어 있으면서도 모든 인연을 다 비추어 인연 따라 온갖 생각을 내게 하고 온갖 행을 하게 한다.

 

그게 바로 판치생모(板齒生毛)의 뜻이요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다.

 

즉 우리의 본성이 인연을 비출 뿐 그 인연을 따라가지 않고 인연에 매이지 않으니 널빤지 같은 이빨이요 눈 있는 돌장승이고, 그러면서도 이 한 몸을 가지고 인연 따라 온갖 모양의 생각과 행위를 일으키니 곧 털이 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만공이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에서 얻은 것은, 만법이 이 하나에서 나왔으므로 어떤 일과 모양(事)이든 이 한 법의 본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이 한 법의 이치(理)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고 걸림 없는(無碍) 이사무애(理事無碍)의 법(法)이었고,

무자화두(無字話頭)에서는 일체만법이 어떤 모양, 어떤 일이든 모두 이 한 법을 여의지 않아 높고 낮음,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이 없어, 드러난 모든 만법, 즉 드러난 모양(事)과 일(事)들이 어떤 인연으로 얽히든 서로(事事)가 걸림이 없는(無碍)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법(法)을 깨친 것이다.

 

그래서 만공은 모든 것이 다 이 한 법의 일이지만 드러난 것들은 다 각각의 인연으로 흘러가고, 그 인연으로 흘러가는 그 낱낱이 모두 이 법이요, 어떤 일이든 차별이 없고 걸림이 없음을 깨닫고는 배고프면 먹고, 추우면 옷 입고, 일 있으면 일하고, 잠이 오면 잠 자며, 때에 따라 인연에 따라 사는 무위도인(無爲道人)이 된 것이다.

 

우리와 이 세상이 이 한 법의 본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비록 널빤지 같아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는 이빨이고, 감정 없는 돌장승이지만, 거기에서 털과 같이 무수한 인연이 나와 우리는 각각의 인연으로 울고 웃으며 함께 살아간다.

 

이처럼 세상만법과 일들이 모두 하나요 하나의 일이니 어떤 모양이든 일이든 겉모양에 끌려다니거나 옳다 그르다 시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법이 이러하고 일체만법이 이러하고 우리 역시 이러하여 일어나는 인연을 따라 울고 웃되, 그냥 그때의 인연에서만 슬프고, 기쁘고, 즐겁고, 고통스러울 뿐 티끌을 남기지 않으니,

모든 것이 매 순간의 인연의 일일 뿐임을 알고 그것에 함몰되어 ‘아이고 내 꼴이야.’ 또는 ‘내 팔자야.’ 하지만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이 한 법의 본성을 가진 법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판치생모(板齒生毛)와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는,

생각은 그냥 생각일 뿐 나를 어떻게 하지 못하니, 인연에 따라 털이 나고 눈물을 흘리는 그 인연에만 응하고 실제로는 판치(板齒)와 유안석인(有眼石人)처럼 마음은 텅 비고 시비분별 없는 본성을 지켜 그런 모양에 끌려다니지 마라는 말이다.

 

그러한 모양이 실제로 있다고 여기는 것은 생각이 지은 허깨비일 뿐, 모든 것이 다 이 한 법의 일이다.

 

경허선사는 그것을 만공에게 물었고, 만공은 무자(無字)화두를 통해 마지막 티끌을 털었다.

 

이 말들은 유마경(維摩經)에서

 

“밖으로 모든 것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제일의 뜻에서 움직이지 않는다.”(外能善分別諸相 內於第一義而不動)

 

라고 한 말이나 같은 경 제자품(弟子品)에서 유마(維摩)가 탁발(托鉢)하러 온 수보리(須菩提)에게

 

“음란한 마음과 화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을 없애지 않고 또한 그 마음과 함께하지도 않으며, 이 몸을 이대로 두고 하나의 실상을 따르며, 어리석음과 애착을 없애지 않고서 삼명과 팔해탈(明脫)을 일으키며, 오역상(逆相)으로서 해탈을 얻되 또한 풀어버린 것도 얽어맨 것도 아니며, 사제(四諦 : 사성제)의 이치를 본 것도 아니요, 보지 못한 것도 아니며..( 중략) 비록 온갖 법을 성취하였으나 모든 법을 여의어서야 밥을 받을만한 것이외다.”

(若須菩提 不斷淫․怒․痴 亦不與俱 不壞於身 而隨一相 不滅痴愛 起於明脫 以五逆相 而得解脫 亦不解不縛 不見四諦 非不見諦..(중략) 雖成就一切法 而離諸法相 乃可取食)

 

라고 한 말과도 궤(軌)를 함께한다.

 

우리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본체요 드러난 모양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이 모양을 지어 털을 내고 눈물을 흘리든 우리의 본성은 판치와 유안석인처럼 그것에 조금이라도 끌려다니거나 물들지 않는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생각은 인연의 산물이어서 실체가 없고 인연에 모양이 바뀌는 허망한 데다, 늘 내가 있다는 아상으로 제 맘대로 시비분별을 일으키는 놈이니, 그 생각에 휘말려 생각을 어떻게 하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생각의 장난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지 그것을 어떻게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흘려보내라.

 

그러면 생각에서 벗어나 한가로운 본래 마음을 회복하여 여여(如如)하게 살아갈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