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허공에 몸을 던져라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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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몸을 던져라
예로부터 선가(禪家)에서는 백천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백 척의 높은 작대기 위에서 한발 더 내딛어 허공에 몸을 던지라는 말이다.
육체를 소중히 여기는 이 생각이 들을 때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백척간두에 올라서는 일도 예삿일이 아닌데 거기에서 아무 것도 기댈 곳도 없는 허공으로 몸을 던지라니....
우리는 늘 어떤 것을 할 때는 암중(暗中)에 이미 그것에 대한 보상이나 안정보장이나 대가(代價)를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사랑을 하라고 하면 내가 그렇게 사랑하면 그도 나를 사랑해야한다거나, 내가 자선을 베풀면 내게 복이 와야 한다거나,
내가 열심히 하면 내개 보상이 와야 한다거나,
이렇게 열심히 수행을 하면 반드시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거나,
등등..
또는 그러한 일을 할 때에는 미처 보상을 생각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대상이 내게 섭섭하게 할 때에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보상을 받으려 한다.
‘내가 저한테 어떻게 했는데....’
라고 마음 깊숙한 곳에 우리가 눈치를 채든 못 채든 보상이라는 대가가 자리 잡고 있어서 그 대가를 충족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언제든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런 대가가 없는 일을 하는 것을 참으로 하기 어렵게 한다.
그러니 백척간두진일보라는 일은 생각이 감히 생각하지 못할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백척간두진일보라는 말은,
사실 말은 대단해 보이지만 큰 의미가 있는 말도 사실 아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백척간두진일보는 그저 앞에서 말한 그러한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지 말라는 뜻이다.
즉 말의 뜻으로만 보면 너무나 어렵고 두려운 일이지만, 실제의 의미는 그렇게 거룩하거나, 대단하거나, 고담준론(高談峻論)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마 지금 이런 논조를 보면 내가 하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자신을 되돌아보라.
자신이 얼마나 주위의 관심을 끌려고 하거나, 끌지는 않아도 남의 눈을 의식하거나 평판을 조심스러워하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해되면 그런 눈으로 다른 사람과 세상을 보라.
세상과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얼마나 그러고 있는지 말이다.
그것이 보이면 눈을 돌려 자신을 보라.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제약을 받고 있는지,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의 자유가 얼마나 억압되고 있는지를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
만약 마음 구석구석, 그리고 몸 구석구석까지 살펴도 앞에서 말한 그러한 점이 자기에게 한 티끌도 없다면 그는 반드시 깨달은 사람이다.
즉 내가 없어진 사람, 아상(我相)이 사라진 사람인 것이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는 말은 바로 그러한 말이다.
그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는 마음, 허공과 같은 마음, 누가 자기를 어떻게 평하고 말하고 욕하고 칭찬하고 하더라도 조금의 미동도 없는 마음, 지금 당장 죽음이 와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는 마음, 그 마음이 바로 백척간두 진일보의 마음이다.
마음이라고 하니까 마음이지, 이런 사람은 마음이랄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냥 나라는 것도 없이 매 순간 인연대로 살아갈 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진일보(進一步)라는 말이 너무나 멋진 말이어서 자신도 하고 싶은데 못한다.
그래서 늘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라고 생각한다.
거의 대부분이 이렇게 묻는다.
그리고 사실 우리가 살아온 여정을 보면 이렇게 묻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왜냐하면 만약 이렇게 묻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백척간두에서 진일보 한 사람이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묻고, 그것은 우리가 평생을 생각이 만들어낸 ‘어떻게?’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그것을 묻지 않는 사람은 이미 의지처를 버린 사람으로 이미 뛰어내린 사람이다.
우리가 허공에 몸을 던지지 못하고 또 어떻게 던져야 하는가? 하고 묻는 것은, 그렇게 던졌을 때에 자신이 ‘살 수 있을까?’하는 의심 때문이다.
의심은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생긴다.
왜냐하면 사람이 살아가는 의지 처 중에서도 믿음은 가장 강력한 의지 처이기 때문에 그 의지처의 튼튼함에 대한 의심을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번지점프를 하려는 사람들 중에는 생멸 줄이 몸을 감고 있어도 무서워서 점프를 못하듯,
그 의심을 풀어주는 말을 해줘도 살 수 있는 보장을 해줘도 무서워서 허공에 몸을 던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보장을 해 준다는 답을 해줘도 곧장 던지지 않고 또 다른 보장을 원한다.
‘몸을 던지면 정말로 내가 원하는 모습을 얻을 수 있는가?’
라고....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바램을 완전히 버리기 전에는 결코 허공에 몸을 던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깨달음을 말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다.
보장을 담보하는 방편을 찾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법과 깨달음의 방법이 너무나 다르니,
즉 허공에 몸을 던지라는 말이 자신이 아는 삶과 너무 다르니, 가고는 싶은데 ‘정말...일까?’ 라는 의심이 자꾸 눈을 가린다.
그래서 보장이라는 방편이 필요한 것이다.
부처님과 선지식들이 자신도 깨닫지 못했을 때에 그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하기 때문에 방편을 주지만, 역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편에 의지하는 이유는 곧 자신을 버리는 것이 너무 무섭기 때문이다.
알고 나면 무서워하는 그 ‘나’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웃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기가 너무 어려우니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줄 방편을 찾는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깨달음이라는 것을 너무 높은 곳에 달아놓았기 때문이지만, 실제는 아직 목이 마르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늘 핑계를 댄다.
그 핑계가 바로 방편을 찾는 마음이다.
그런 사람은 결국 목이 마를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것도 죽을 만큼 말이다.
정말로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은 사람은 시궁창의 물을 떠서 갖다 줘도 그는 감로수처럼 마신다.
왜 그럴까?
정말로 이것조차 마시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자신도 모르게 알기 때문이다.
즉 생각이 이것을 마시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렇게 뽐을 내던 그 생각이란 놈이 죽어가는 내 몸을 바라보며 더 이상 기댈 것이 없다고 도망간 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생각은 늘 괜찮은 것만 찾는 놈이어서 시궁창의 물에는 절대로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진정으로 목이 마른 상태는 생각이 죽을 만큼 답답한 인연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생각에 기대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생각이 죽어 허공이라도 기대어야 한다는 다급한 마음이 되어야 비로소 백척간두에서 뛰어내릴 수가 있다.
그래서 또한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하기를 ‘허공에 몸을 던지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다’라고 한다.
그런데 허공에 몸을 던지면 무엇을 얻을까?
재미있게도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허공에 몸을 던져 얻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허공에 몸을 던지는 그 마음’을 얻는다.
그리고는 모든 것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이 일어나 그때부터
아무 것에도 기대지 않는 그 마음을 얻는다.
그리고
어떤 외로움에도 굴하지 않는 마음을 얻고
어떤 칭찬이나 비난에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얻는다.
그 외 그 동안 바깥으로 향했던 모든 눈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마음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음을 얻으면, 스스로 이미 있는 마음이어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눈을 돌리는 순간 이미 자신은 조금도 부족한 상태에 있지 않았음을 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어떤 형태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있다고 할 수도 없음도 알게 된다. 생각에 속았음을 철저하게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마음이 자신을 어떤 곳에든 던질 수 있는 것일 뿐 소중한 것이 아님을 안다.
그렇게
자신을 백척간두에서 던지는 순간, 우리는 보호할 필요가 없는 무소불위의 존재임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생각도 사라지고 그냥 살아가게 된다.
그동안 그렇게 자신을 조심스럽게 여겼던 생각이 사라지고, 비로소 우리는 태어난 적도 없고 그래서 사라지지도 않는 존재임을 아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구한다.
하지만 깨닫고 나면 한결같이 우리는 이미 깨달아 있음을 안다.
즉 백척간두에 몸을 던지는 순간 우리는 그렇게 두려웠던 죽음이 애초부터 없음을 안다는 것이다.
몸을 던지지 못하는 그 생각이 몸을 던지지 못하게 한다.
반대로 몸을 던지는 그 생각이 바로 몸을 던지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몸들 던질 때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아니 이미 자유로운 우리임을 알게 한다.
우리가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하여 허공에 몸을 던지는 그것이 던지는 그 마음이지 던지는 어떤 또 다른 마음을 얻어서 몸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상 절대로 몸을 던질 수가 없다.
답답한 놈이 답답해한다.
이 말은 답답한 일이 생겨서 답답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답답하게 생각하는 그 마음이 스스로 답답해 한다는 말이다.
고통이 있어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지 않으면 고통스럽다고 여기는 그놈이 스스로 고통스러워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모든 것이 마음이 짓는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말씀하신 것이다.
미워하는 그 마음이 스스로 미워하는 것이요.
좋다고 여기는 그 마음이 스스로 좋아하는 것이요.
행복하다고 여기는 그 놈이 행복해하는 것이요.
불행하다고 여기는 그 놈이 스스로 불행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또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러한 마음을 없앨 수 있겠느냐고?
그러면, 참으로 끝도 없이 돌고 돌 뿐이다.
답은 하나다.
묻지 말고 그냥 없애라.
즉 ‘허공에 그냥 몸을 던져라.’는 말이다.
이 말은 받아들이면 모든 것이 당연해지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 우주는, 그리고 이 한 법은
우리의 생각이 어떻게 전개되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만약 사람의 생각을 존중한다면 이 우주는 재물로 넘쳐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법을 구하여 행복을 얻으려는 사람보다 재물(돈, 명예, 벼슬, 심지어 사랑까지도..)을 구하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태어난 이래로 그렇게 갈구하는 그런 것들을 지금까지도 구하고 있다는 것은 세상은 그런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라니 이제 그런 쓸데없는 힘을 빼고
그냥 사랑하라. (대상이 사랑을 주든 아니 주든, 맘에 들든 아니 들든..)
그냥 주라. (그가 사랑스럽든 아니든, 맘에 들든 아니든, 필요하면 그냥 주라.)
그냥 들으라. (상대가 칭찬을 하든 비난을 하든, 억울하든 당연하든...)
그냥 가라. (가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말고, 가서 생각하라.)
그냥 일하라. (대가가 자신이 원하거나 목적한 바만큼 되든 안 되든...)
그냥 받아들여라. (내게 어떻게 이런 일이..? 라고 하지 말라.)
그렇게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않고 그냥 모든 것을 행하라.
이 우주는 우리가 어떻게 하든 인연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인연이라는 것에 몸을 맞기고 그냥 살아가면, 그럴 때에 우리는 이미 허공중에 자유롭게 노닐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이미 이 법과 함께 하므로 그 어떤 것으로도 부술 수 없는 금강(金剛)이 되어 있을 것이다.
허공에 몸을 던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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