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같은 점과 다른 점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2,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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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점과 다른 점
어떤 손님이 대주혜해(大珠慧海)스님께 물었다.
“유교(儒敎), 도교(道敎), 불교(佛敎)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대주스님이 말했다.
“도량이 큰 사람이 활용하면 같고, 기틀이 작은 이가 집착하면 다르니, 모두가 한 성품 위에서 일어난 작용이지만 근기의 견해에 따른 차별로 셋이 된다.
그래서 미혹함과 깨달음은 사람에게 달렸지 교법(敎法)에는 같고 다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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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고 다름이 어찌 손님이 물은 유(儒), 불(佛), 선(仙-도교)만 있겠는가?
도량이 크다고 하는 것은 분별이 없어서 모든 것이 한 성품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요.
기틀이 작다고 하는 것은 사물의 모양과 행위에 집착하여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말한다.
깨달음을 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깨달음이 구하는 이는 자신이 부처라고 하면서도 말로만 부처라고 할 뿐,
깨달음을 구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이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대변하는 것이니 그는 자신이 부처임을 알지 못하는 자다.
부처가 되려면 부처의 생각을 가져라.
부처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세상에 부처 아님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부처와 중생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에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쁘고, 같고 다른 것이 있다는 시비와 분별을 하지 않는다.
생각에 시비와 분별이 없으면 따로 구할 부처가 없다.
그러니 그 생각에는 구할 부처가 없다.
마음에 시비가 사라져 생각에 구할 부처가 없는 자를 무엇이라 불러야 하겠는가?
바로 부처의 생각을 하는 부처다.
부처를 구하는 자는 결코 부처의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는 중생의 생각으로 부처는 이러할 것이라고 분별하고 궁리만 한다.
그래서 그는 부처가 될 수 없다.
부처가 이럴 것이라고 분별하고 궁리한다는 것은 부처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니, 자신이 부처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을 뿐 부처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중생심이 곧 부처의 마음이라고 했다.
우리가 늘 쓰고 행하는 모든 마음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다.
그러면 이 말은 중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따로 부처의 마음을 찾으니 중생으로 살뿐이라는 말이다.
기틀이 작은 자는 부처와 중생의 뿌리가 하나임을 알지 못하고 드러난 모습만 보고 중생이니 부처니 따지고 있을 뿐이다.
뿌리가 같으면 다만 나타난 형상만 다를 뿐 줄기도 가지도 잎도 같은 하나다. 그러니 드러난 형상이 다르다고 종자가 다르다며 맞다 틀리다 시비할 것이 없다.
세상에는 맞고 틀리는 것이 없다.
맞고 틀리는 것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사람은 다시는 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맞고 틀림이 없으니, 설사 틀린다고 하더라도 그건 틀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디에 다시 틀릴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맞다. 틀린다.’ 하며 둘로 갈라서 시비하고 맞는 쪽이 있을 것이라며 찾아다니는 사람은, 항상 틀린 생각만 할 뿐 한 번도 맞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어찌 그런가?
일체가 한 법이어서, 우주 삼라만상이 온통 하나여서 맞고 틀리는 법이 없는데, 그것을 맞고 틀리다 하고 나누고는 있지도 않은 맞는 한쪽을 찾아다니기 때문이다.
맞는 것을 찾지 않는 사람은 항상 맞지만, 맞는 것을 찾는 사람은 언제나 틀린다.
이건 일체가 법 아님이 없어 무엇을 하든, 이 법을 벗어남이 없는 이 법계에서는 어디든 언제든 조금도 틀림이 없는 진실이다.
불교에서 만행(萬行)이라는 것이 있다.
혹자는, 깨달은 자가 기행(奇行)을 하는 것을 만행이라고 생각을 하고는 만행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고 믿는 자들이 있다.
만행(萬行)의 본 이 무엇인가?
만행(滿行)을 말한다.
만(滿)자 ‘가득 차다. 넉넉하다. 이지러짐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만행은 ‘어떤 행위를 하든 모두가 다 이 한 법에 넉넉하고, 조금도 이지러짐이 없이 가득 찬 법의 행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일체가 한 법임을 깨달은 보살이 어떤 일이든 인연이 되고 해야 할 일이면 무슨 일이든 행하는 것을 일러 만행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모든 행’이라고 하는데도 사람들은 보살이라는 말에 걸려서, 보살이 하는 모든 행은, 중생을 위한 일, 착한 일, 좋은 일 등으로 여기고는 또 세상을 좋고 나쁨으로 나눈다.
일체가 한 법인데, 무슨 보살이 따로 있고, 부처가 있고, 중생이 있는가?
그리고 일체가 한 법이니 모든 행은 곧 어떤 일을 하든 이 한 법의 행일 뿐이라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인연에 즉하여 시비 분별없이 하는 모든 행을 말하는 것이다.
즉, 배고프면 밥 먹고, 일 있으면 일하고, 남 도울 일이 있으면 돕고, 또 형편이 안 되면 할 수 없고, 피곤하면 쉬고, 잠 오면 잠자는, 그 행이야말로 진실한 만행이다.
마조스님이 말한 ‘평상심이 도’라고 하였듯이 일체 우리가 평상시에 하는 모든 일이 다 만행인 것이다.
그러니 그곳에 무슨 깨달은 이의 행이 있고 중생의 행이 있겠는가?
어찌 유불선(儒彿仙)의 차이만 차이이랴?
우리의 삶은 유불선의 차이보다 더 많은,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삶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손을 쥐면 주먹이 되고 펴면 다섯 손가락이 되는 것과 같이 모두 하나의 성품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차이로 한 뿌리에 수많은 가지와 잎과 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을 도량이 큰 사람은 주먹과 다섯 손가락이 둘이 아님을 알고,
기틀이 작은 사람은 주먹과 다섯 손가락이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틀이 작은 사람은 그렇게 단순히 다르다고 할 뿐만 아니라, 그 모양을 그냥 두지 않고 집착하고 분별하고 시비하며 따라간다.
부처가 되고 중생이 되는 것은 모습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모습을 하더라도 중생의 생각을 하면 중생이요, 부처의 생각을 하면 부처다.
깨달은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말한다.
“모두가 다 부처다”
라고,
그럼 이 법을 구하고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가?
부처의 생각을 해야 하는가? 부처를 찾는 생각을 해야 하겠는가?
그리고
부처는 부처의 생각을 하겠는가? 아니면 부처를 찾는 생각을 하겠는가?
그리고
여기서 다시 부처의 생각과 부처를 찾는 생각으로 나누고는 부처의 생각이 따로 있다고 생각을 내지 마라.
부처의 생각은 부처를 찾는 생각을 하지 않고 분별과 시비만 하지 않으면 모든 생각이 부처의 생각이다.
그래서 대주혜해스님은
“그래서 미혹함과 깨달음은 사람에게 달렸지 교법(敎法)에는 같고 다름이 없다.”
라고 한 것이다.
교법(敎法)이 무엇인가?
유불선의 교법만 교법이 아니다.
세상에 드러난 만물과 그 만물이 살아가면서 행하는 모든 모양과 행위이다. 왜냐하면 이 우주 삼라만상은 이 한 법의 법계여서 티끌 하나를 움직여도 모두 법(法)이요 법의 일이기 때문이다.
교(敎)는 이렇게 모든 것이 법이라고 말하고 가르치는 것을 말하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행은 교법 아닌 것이 없다.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이 글을 보고 있는 그대들이다.
이 글을 보고 있다는 것은 이미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 역시 그대로 교법(敎法)이다.
다만 모두가 다 법이고 생각으로 그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실생활에서 자신이 법임을 믿지 못하고 시비와 분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것은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업식(業識)에 또 앎이란 하나의 짐을 더하고, 게다가 아는 데 왜 안 되냐고 탓하는 놈을 하나 더 만들뿐이다.
부처가 되려면 부처의 생각을 하라.
부처의 생각은 모양을 따르지 않고 법을 보는 것이다.
부처와 중생이 같은 점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부처가 따로 있고 중생이 따로 있어서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같고 중생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이 되는 것이다.
즉 부처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같은 점도 다른 점도 없는데,
오직 중생의 마음은 이 사실을 모르니 부처와 중생이 같으니 다르니 하고 나누고 있으니, 이것이 부처와 중생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이다.
그래서 역시 대주혜해스님이
“그래서 미혹함과 깨달음은 사람에게 달렸지 교법(敎法)에는 같고 다름이 없다.”
라고 한 것으로, 깨달은 부처는 교법을 알기 때문에 같고 다름이 없지만, 미혹한 중생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부처와 중생, 깨달음과 미혹에 같고 다름이 있는 것이다.
머리로만 알고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냥 믿고 생각을 바꾸어 진정으로 같고 다름이 없다는 부처의 생각을 하라.
그리고 그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라.
그러면 이미 자신이 부처여서 다시는 부처를 찾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부처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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