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물아일체(物我一體)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3,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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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아일체(物我一體)
일체 한 법이어서 대상경계와 내가 하나이다. 그래서 물아일체라고 한다.
하지만 물아일체라고 해서 대상경계를 보면서 무조건 나와 하나구나 하여, 대상과 나를 구별할 줄 모르는 물맹(物盲), 즉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색맹(色盲)처럼 사물을 구별 못하는 물맹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이 법을 모를 때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로 존재하고 변하지 않으며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 그래서 변하는 것이 오히려 악이요, 불편한 것이요, 나쁜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고는 그 변하지 않는 것을 강조하고 잡기 위해서 충성(忠誠)을 강조하고 연인 간에 변하지 않는 마음을 아름답게 포장을 한다. 그래서 어떤 드라마에선 “사랑이 변하니?” 하는 맨트로 로맨스를 꿈꾸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녹였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과 말은 정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녹인다. 잘못된 편견과 미혹의 용광로로 빠뜨려 진실과 실재를 모두 녹여 버린다. 세상은 이 한 법의 연기법으로 드러나고 변하고 사라지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단 한 번도 머무는 적이 없고, 머물지도 않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물론 마음의 변화를 노력으로 마음을 바꾸지 않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평생에 단 한 번도 변하지 않는 마음이란 것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고 믿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세상이 그렇지 않음을 느끼고 그 근원을 찾아 들어간 사람은, 어느 순간에 일체는 오직 한 법뿐이요, 모든 것은 이 한 법으로부터 나왔고, 그 나오고 변하고 사라짐이 모두 이 한 법의 연기법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세상 만법이 모두 스스로의 성품이 없고 오직 한 법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져, 잠시도 머물지 않아,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이것이다.’ 하고 잡을 수 있는 것이 없는 허망하고 공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 가 된다. 오직 법만이 진실함을 알게 된다.
여기서 물아일체(物我一體)라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그렇게 일체가 한 법인 이 사실을 알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자신이 생각하고 행하고 또 밥 먹고 잠자고 일하고 사람을 만나고, 동네 슈퍼에도 가야하고, 또 직장에도 나가기 위해 차를 운전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또 도로를 가기 위해 인도와 차도를 구별해야 하는 존재로, 온통 한 법이어서 드러난 세상은 비록 꿈과 같은 삶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살아있는 한 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매 순간 드러난 만법들끼리 서로 구별하고 살아야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다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가 된다.
그러나 지금의 산과 물은 미혹할 때의 산과 물과 다름이 없지만, 다만 그것을 보는 시각은 온통 법임을 아는 시각으로, 일체의 시비와 분별없이 오직 있는 그대로 보고 구별할 뿐 거기에 어떤 가치와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 평등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산과 물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세상 바라보는 것이 법과 사물이 모두 서로 간섭하지 않는 진정한 물아일체이다.
두 번째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 는 이제 제대로 진리와 본질을 보는 자가 되었지만, 아직은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아무 것도 구별하지 못하는 갓난아이와 같은 소견이기 때문에 세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물맹(物盲)이다. 정말로 우리가 사람으로서 이러한 나와 사물이 구별이 없는 물맹의 상태가 진실한 상태이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면, 태어나서 엄마 젖은 먹기는커녕 찾지도 못하고 굶어죽을 것이다. 그러면 물아일체라 무엇인지 알려는 마음도 갖추지 못한 채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고, 물아일체란 말은 참으로 요상하고 허망한 말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말은 인간이 사용하는 것이고, 그런 말을 하려면 이런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자라야 하는데, 두 번째 단계의 이런 물아일체가 진실한 물아일체라면 그러한 진리 안에서는 우리는 갖가지 다른 존재로 태어날 수도 없고 태어나도 참으로 이상하고 모순된 모양이 벌어지는 것이다. 또, 설사 요상하고 모순된 상태가 조금 지속이 되어, 자라서 말을 이해하여 이런 물아일체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알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산다면, 길을 나서는 순간 교통사고에 죽거나, 아니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지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 한 순간도 존재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세 번째의 단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가 되어야 제대로 된 물아일체가 되는 것이다. 즉, 일체가 모두 한 법이어서 일체를 다 잘 구별하면서도 그래도 연기법에 의해 각각의 인연으로 갖가지 모양으로 만법이 드러나 있으니, 그것을 인정하고 각각의 모양과 성격대로 잘 구별하면서도 일체의 시비와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사람이 지녀야할 물아일체의 소견이다. 이럴 때에 일체의 삶을 살면서도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조사들과 선지식들이 말하는 물아일체는 법의 모양(?)을 말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단순한 물아일체의 모양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참다운 자유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육조단경(六祖壇經) 수행편(修行編)의 무상송(無相頌)말미에 “법은 원래부터 세간 속에 있어서 세간에서 세간을 벗어나는 것이니 세간을 벗어나 밖에서 출세간을 구하지 마라. 삿된 견해는 세간이요 바른 견해가 출세간이나 삿됨과 바름을 모두 깨뜨리면 보리의 성품이 뚜렷해질(宛然)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세간 속에 살면서 세간을 벗어나는 것은, 세간과 출세간이 따로 존재하지 않음을 아는 것이요, 세간과 출세간이 따로 존재하지 않음을 알기에 여전히 세간의 삶을 살면서도 일체의 시비분별을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세간과 구별 없는 출세간이다.
물아일체도 그와 같은 것이다. 일체가 하나여서 대상경계와 내가 따로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일체의 시비와 분별을 내려놓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나와 세상만물을 잘 구별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물아일체의 삶이다.
물아일체를 단순히 법의 모양으로만 알고 그것을 고집하려 한다면, 두 번째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하고 고집하면서 일체가 똑같다 하고 아무런 구별도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그 삶은...? 물론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절대 그럴 수가 없지만 말이다.
그러니, 이런 상태를 물아일체라 하고 이렇게 된 시각을 가지려 하면, 모두 마구니굴로 들어가는 격이다. 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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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청정심님의 댓글
맞는 말씀입니다...분별하지 말라고 해서 진짜 분별 안하고 살수는 없죠.. 지혜롭게 분별할 줄 알아야 겠죠..^^
반야지7 님의 댓글
()()()
청정심님의 댓글
물아일체 다시 읽어보며 새롭게 알았네염..()
윤기붕님의 댓글
새롭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르는 사람은 새로움도 모르거든요.^^
청정심 님의 댓글
윤기붕 어쨌든 순간 순간 살아지는 것....법이란 참 묘하네요..^^
윤기붕님의 댓글
청정심 ㅎㅎㅎ 그렇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