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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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락인과(不落因果) 불매인과(不昧因果) (잘려진 뒷부분을 복원)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6,092

16-06-18 11:36

본문

 

불락인과(不落因果) 불매인과(不昧因果)의 이야기는 그 유명한 백장선사(百丈禪師)의 야호선(野狐禪)의 배경인데, 백장선사 어록에

 

선사께서 매일 상당하여 설법하는데 늘 한 노인이 법을 듣고는 대중들을 따라 돌아갔다.

하루는 가지 않고 있어 선사께서 물었다.

“거기 서 있는 자는 누구인가?”

“저는 과거 가섭불(迦葉佛) 때에 이산에 살았었는데

한 학인(學人)이 묻기를 ‘많이 수행한 사람도 인과(因果)에 떨어집니까? 떨어지지 않습니까?’하여

제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대답하여 여우의 몸에 들어가 있습니다.

오늘 화상께 청하오니 한마디로 깨닫게 해주십시오.”

선사가 말했다.

“그대가 물어보시오.”

노인이 곧 묻기를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떨어지지 않습니까?”

하니 선사께서 말했다.

“인과에 어둡지 않습니다.”

노인은 말끝에 크게 깨닫고 선사께 감사의 말을 하고는

“저는 이제 여우의 몸을 면하여 산 뒤에 있으니 죽은 중을 화장하여 보내주시기 빕니다.”

선사는 유나(維那 : 절의 사무를 맡은 자)의 우두머리에게 명하여 대중들에게 제사를 지낸 후 함께 죽은 스님의 장사를 지내겠다고 알리게 하였는데 대중들은 자세한 내막을 몰랐다.

선사는 대중들을 이끌고 산 뒤의 바위아래에 도착하여 지팡이를 휘저어 한 마리 죽은 여우를 꺼내고는 의전의 예(典禮)를 지켜(依法) 화장을 하였다.

 

師每日上堂 常有一老人聽法 隨衆散去 一日不去 師乃問 立者何人 老人云 某甲於過去迦葉佛時 曾住此山 有學人問 大修行底人 還落因果也無 對云 不落因果 墮在野狐身 今請和尙代一轉語 師云 汝但問 老人便問 大修行底人 還落因果也無 師云 不昧因果 老人於言下大悟 告辭師云 某甲巳免野狐身 住在山後 乞依亡僧燒送 師令維那白槌告衆 齋後普請送亡僧 大衆不能詳 師領衆至山後巖下 以杖桃出一死狐 乃依法火葬

라고 기록되어 있다.

 

불락인과(不落因果)는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고, 불매인과(不昧因果)는 인과에 어둡지 않다는 말이다.

 

백장선사는 불매인과라는 말 한마디로 그 노인의 여우 몸을 벗게 하였다.

사실 불매인과의 뜻을 분명하게 알면 누구나 여우의 몸을 벗는다. 왜냐하면 이 법을 깨닫지 못하면 누구나 여우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역사책인 전국책(戰國策)에 나오는 이야기 호가호위(狐假虎威)는 산중의 여우가 호랑이에게 자신의 위엄을 보여주겠다면서 자신의 뒤를 따라오게 하여 다른 동물이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호랑이를 보고 도망가는 것을 마치 자신을 보고 도망가는 것처럼 호랑이를 속이는, 호랑이의 모양을 빌려 마치 자신에게 위엄이 있는 것처럼 속이는, 약은 여우의 이야기다

 

일체가 모두 이 한 법이 하여, 우리의 삶과 말과 생각과 행동도 모두 이 한 법이 하는데 생각은 마치 자신이 생각을 하고 있다고 착각을 한다.

이것이 호가호위(狐假虎威)다.

즉,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어 자신의 위엄인 것처럼 하는 것처럼,

일체 만법이 모두 한 법이어서 생각도 이 한 법에 의해 인연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데, 생각은 마치 자신이 생각을 하고 있다고 위세를 떠는 것과 같다.

 

그래서 생각은 세상의 실상을 알지도 못하면서 약간의 들은 말들을 섞어 세상의 일어나는 일과 사람들의 물음에 상대적으로 해석하여 말을 하거나 대답을 한다.

그 노인이 법을 알지도 못하면서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 말도 역시 생각으로 헤아려서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인이 여우의 몸을 받았다는 말은 의미 있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전생이 있고 윤회가 있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본뜻은 저 멀리 던져버리고 삿된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여우는 비유이고, 이 이야기는 내가 볼 때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백장선사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펼친 한바탕 야단법석(惹壇法席)일 뿐이다.

 

불락인과(不落因果) 불매인과(不昧因果)의 선문답(禪問答)은 이 법을 공부할 때는 생각으로 헤아리지 말라는 말과 상통한다. 간화선(看話禪)에서 화두를 주는 이유도 역시 쓸데없는 생각이 끊어지게 하는 것이다.

아무 생각이나 다 끊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비하고 분별하는, 즉 이것저것을 헤아려서 비교하는 생각이 끊어지게 하는 것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은 일체가 한 법이기 때문에 비교할 것이 없다.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오직 그 존재의 인연으로 생겨서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비교할 대상이 없다.

비교는 똑같은 것을 가지고 같은 시간, 같은 환경에서 서로 다른 일을 시켜 비교해야 정확한 비교다.

 

내가 택시를 할 때, 내가 사는 대구는 길이 바둑판과도 같아서 어디서 어디로 가든 가는 경로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택시를 타면 거의 대부분,

“빠른 길로 가주세요.”

라고 한다. 이 말은 빠른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대의 교통상황에 따라 빨리 가달라는 말이다.

그러면 나는 그 뜻을 알아들으면서도 가끔 분위기에 따라 농담처럼 말한다.

“손님 어떤 길이 빠른가를 알려면요, 똑같은 차를 똑같은 운전자가 똑같은 교통상황을 가진 두 개 이상의 경로를 똑같은 마음으로 달려봐야 정확하게 어떤 길이 빠른 길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손님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아듣고 함께 웃는다.

 

비교란 그렇게 해야 비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우주에는 그렇게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 어떻게 비교해서 좋다 나쁘다 할 수 있는가?

 

그런데도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은 자신 기억의 잔상(殘像)을 일으켜 기억 속의 비슷한 것과 비교하여 미리 판단한다. 그리고 그 판단이라도 수학적으로 냉정하게 비교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좁은 소견으로 그때그때의 기분으로 판단한다. 그러니 그것이 어찌 올바른 비교며 판단이겠는가?

그처럼 생각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고, 생각이 만든 분류속의 대상으로 묶어 버린다.

그리고는 비슷하게 보이는 것을 같은 무리라고 착각하고는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등등으로 비교하고 시비한다.

 

그렇게 생각은 자신의 생각에 좋은 것이 오면 좋아하고 맘에 들지 않은 것이 오면 내치려 하지만 세상은 우리의 생각대로 인연이 오지 않기 때문에, 좋은 것이 오면 별 일이 없지만 맘에 들지 않는 것이 올 때 내치고 싶어도 내 맘대로 안 되니 괴로움과 번뇌 속에 빠진다.

그리고는 그 괴로움의 원인이 자신이 비교하고 시비하여 생긴 줄 모르고 대상에게 있다고 적반하장으로 대하며 원망한다.

 

하지만 실상은 이 모든 것이 다 이 한 법이 하고 있다.

생각이 번뇌를 일으키는 작용도 법이 하고 있고, 그렇게 대상이 인연되어 오는 것도 법이 하고 있다.

즉, 대상이 수많은 인연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 순간 우리에게 인연이 되는 것도 법이요, 우리의 생각이 그렇게 형성된 것도, 또 그 순간 우리 속에 있는 수많은 감정곡선에서 하필 그런 감정을 가지는 것도 다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이 모든 것이 법이 하고 있는데, 실상을 알지 못하는 생각은 마치 자신이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는 세상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다는 망상을 부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호가호위(狐假虎威)다. 물론 여우는 고의성이 있고 생각은 무지로 인해 여우 짓을 하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세상은 고의성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더 나쁘게 처벌하지만, 불법(佛法)에서는 고의성이 있는 것보다 모르고 짓는 죄를 더 나쁘게 생각하여, ‘모르고 짓는 죄가 가장 크다.’고 한다.

이유는 고의성이 있다는 것은 어쨌든 자신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은 정상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그러면 생각을 돌이킬 수 있고 실상을 말하면 부끄러워 물러서거나 벌을 받는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믿고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이 뭐라하면 도리어 욕하거나 원망하고 또 벌을 주면 당치 않다고 하며 반항을 한다.

이러한 생각은 자신의 행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더 나쁜 짓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세상에 가장 나쁜 생각이 극(極)이다. 즉 극좌(極左) 극우(極右)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극단적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자들은 자신이 행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올바르고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한다. 남들의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이 지은 자신만의 옳고 그름만 있고 그 속에는 사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공동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범죄를 저지르거나 세상과 자신을 망쳐놓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의 폐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모르고 짓는 죄가 가장 크다,’고 하는 것이다.

특히 이 법은 일체가 한 법이어서 나눌 수도 없고 나누어서는 절대로 법을 깨달을 수도 번뇌에서 벗어날 수도 없는데, 극으로 나누면서도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니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가?

 

죄의 경중을 떠나 불이법(不二法)을 깨닫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다 상대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가 옳은 사고라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비교하고 분별하고 시비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똑똑하다고 여겨지는 자들은 모두가 세상을 잘 분별하여 옳고 그름을 잘 따지는 자이다.

 

법에서 볼 때에는 똑똑할수록 극단적인 자이다. 이런 자들과 아는 것이 많은 사람들은 깨닫기가 참으로 힘들다.

 

오십보백보라는 말이 있다.

문 바로 앞에 있거나 문에서 백리를 떨어져 있거나 문밖에 있는 것은 다 똑같다는 말이다. 그래서 법에서는 비교를 하지 않는다. 세간 적으로 아무리 거룩하고 현묘하다 하더라도 상대적인 것은 모두 법이 아니라 망상이다.

상대적인 것은 바로 문밖에 있는 것이다. 즉, 법이 아닌 것이다. 

그것이 세간의 시각에서 고귀하고 거룩하고 옳은 일이든 비천하고 속되고 포악한 것이든 이 한 법에서는 한 가지다. 똑같이 망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조사들이 두 가지 성품을 여의라고 한다.

옳고 그르다고 나누는 성품, 좋다 나쁘다 나누는 성품, 사랑하고 미워하는 성품, 공하고 공하지 않다는 성품, 정(定)하고 정(定)하지 않다는 성품 등이 그것이다.

 

내가 아는 동생이 있는데 이 녀석이 어느 날 말하기를

“도박(賭博)이나 욕정(欲情)에 집착하는 사람이나, 학문(學問)이나 연구(硏究) 또는 종교(宗敎)에 집착하는 사람이나 똑같다.”

라고 했다.

 

참 옳은 말이다.

 

세상에는 가치의 경중(輕重)이 있어 도박이나 욕정은 세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 나쁘게 보고, 학문이나 연구에 몰두하거나 종교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법으로 볼 때에는 둘 다 똑같은 자들이다. 왜냐하면 한쪽을 취하고 한 쪽을 버리고 게다가 집착까지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생의 말이 그런 뜻이다.

 

이 동생의 말은 법을 공부하는 사람이 지침을 삼을만한 말이다. 그래서 법을 공부하는 사람은 이 말을 잘 살펴서 자신이 어디에 빠져 있는지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불매인과(不昧因果)다.

우리는 인연의 존재여서 인과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육체를 가지고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상 첫 번째 화살은 피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인과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 노인은 이 사실을 모르고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으니 호가호위(狐假虎威), 즉 법이 하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첫 번째 화살을 피할 수 없다고 하셨듯이 일체가 이 한 법이 하고 그 행함이 연기의 작용이어서 모두가 그러함을 알고 거기에 어떤 시비도 일으키지 않으면 비록 인과에 떨어지기는 하나 그곳에 빠져서 허우적거리지 않고 다음에 오는 인연의 삶을 산다.

그래서 깨달은 자의 자취는 마치 새가 날아간 하늘처럼 자취가 없다고 하였다. 그처럼 자유로운 것이다.

 

비록 몸을 가지고 생각을 가지고 있어 세간의 삶을 살고 세간의 시비 속에 살아가지만, 그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인연의 당연한 삶임을 알고 그것에 걸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불매인과(不昧因果)요,

그렇게 살 때에 마음에 집착이 떨어져 어떤 시비나 번뇌도 일어나지 않고 헐떡임이 없어 분주한 삶의 가운데서도 늘 여여(如如)한 삶을 산다. 

 

그것이 바로 불매인과(不昧因果)의 공덕(功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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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