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자책하지마라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4,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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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책은 교만에서 나온다.
생각은 그럴듯하게 스스로를 자책하게 해서
마치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 겸손한 자로 보이게 한다.
하지만, 그것은 교만과 망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 우주 삼라만상은 모두 연기법(緣起法)을 벗어날 수 없어서,
매 순간 찰나만 그 모습을 드러낼 뿐, 끊임없이 연기(緣起)의 인연(因緣)으로 변하므로 단 한 순간도 같은 모양을 유지할 수가 없다.
그래서 고정된 어떤 것이 없다.
그런데 생각은 기억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고, 그 기억으로 고정된 어떤 존재가 인연에 의해 변한 모양을 짓는다고 생각을 한다.
물론 고정된 존재가 인연에 의해 변한 모양을 짓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 고정된 존재는 우리나 드러난 삼라만상의 개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직 이 한 법인 자성(自性)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변함없는 법인 자성도 모양이 없이 텅 비어 있어서 고정되어 있는 모양이라고 할 것이 없다.
삼라만상과 우리 인간도 자성에서 나와서 자성의 성품과 꼭 같은 텅 빈 성품을 지녔기 때문에 정해진 모양을 가지지 않고, 인연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그래서 자책할만한 어떤 나라는 것이 없다. 설사 기억으로 더듬어 자책할 대상을 끄집어낸다고 해도 이미 지나가버려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들이라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기 때문에 관계에서 실수를 할 수 있거나 잘못 판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의도치 않는 피해를 줄 수 있고 실례를 할 수가 있다.
그래서 후회는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 몰랐던 것을 알아서 고치기 위한 것이지
“나는 완벽한 존재인데 왜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해?”
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쥐어뜯지 않는다.
그 교만함이 우리를 자책한다.
원래 완벽한 존재인데 바보 같은 짓을 한다고 탓하는 것은 고정된 내 모습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며 잘못 판단하여 실수한 것을 다음부터 고치는 것은 고정된 내가 없고 인연을 받아들이고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다.
잘못이나 실수가 후회로 끝나고 고치면 고정된 내가 없지만, 자책은 완벽하다는 고정된 내가 있다.
사람들은 후회와 자책이 한 가족인 줄 알지만,
후회는 그때 그때의 인연에 반응하며 변하면서 서로 충돌한 것을 서로에게 맞추어 바로 잡는 것이어서 고정된 나라는 아상이 없지만, 자책은 인연 따라 변하는 우리가 잘난 아상이 세운 고정된 잣대에 어긋난다고, 생각이 우리를 시비하고 있는 것이다.
고정된 내가 있고, 정체성을 가진 나를 두고 그 정체성을 벗어나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자신을 쥐어뜯는 것과
고정된 내가 없이 인연에 반응하여 그것에 맞춰서 변해가며 사는 것은 완전히 다른 삶이다.
이 우주가 원래 고정된 어떤 것도 없고 늘 인연에 의해 변해간다.
그래서 고정된 잣대를 들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자는 법을 거스르는 것이어서 늘 고통스럽고, 매순간 변해가는 나는 인연을 따르므로 거스름이 없어 늘 마음이 여여(如如)하다.
그래서 실상은 어떤 모양이 없는데 우리가 고정된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 그대로 생각이다.그래서 그것은 아상이요 불이법(不二法)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래서 자책은 고정된 내가 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만들어낸 교묘한 술책일 뿐이다.
그리고 이 자책의 이면에는 자신은 늘 옳은 존재인데, 바보같이 실수를 하여서 잘못을 저지른다고 생각이 있기 때문에 자신은 늘 잘하는 존재라는 교만심이 내재되어 있다.
교만한 마음은 늘 비교하고 시비하여 자신이 남보다 우월한 상태를 유지해야하기 때문에 생각이 제시하는 잣대에 어긋나는 자신을 견딜 수 없는 모욕이라 여기기 때문에 그냥 보고 지나칠 수가 없다.
그래서 자기를 쥐어뜯고는 그것도 교만심으로 교묘하게 뉘우침이라는 포장을 씌워서 진정으로 겸손한 척을 하는 것이다. 공주병의 한 증상이다.
이것이 바로 자책을 통하여 겸손을 가장하는 교만한 아상의 행태이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이 실상(實相)을 깨달아 이 우주에 나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도 고정된 무엇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 모든 것이 그냥 인연으로 일어나고 사라질 뿐 거기엔 선과 악, 옳음과 그름 등의 가치적 무게가 없음도 분명히 안다.
그러면 세상과 자신을 보는 눈이 절로 너그러워지고, 또 비교하고 시비하는 마음이 사라지니 더 좋은 것을 구하거나 얻으려 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또 얻으려 하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이 인연임을 알기 때문에 인연이 되지 않는 것에는 탐을 내지 않는다.
그러면 되지도 않는 것을 억지로 하려는 어리석음도 사라지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일도 없으니 탐진치(貪瞋痴)가 절로 사라진다.
그러면 조사들이
“선도 하지 말라는데 악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듯이 세상의 악도 행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자성과 자성의 나툼인 삼천대천세계에는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이 없다. 물론 우리 인간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래서 선지식과 부처님들은 모두가 선악(善惡)과 유무(有無) 시비(是非) 미추(美醜)를 떠나라고 하시는 것이다.
인연에 따른 매 순간 그 모습이 바로 그 때의 나의 진정한 모습이다. 그것이 마조스님이 즉심시블(卽心是佛 : 인연에 즉하여 내는 마음이 부처다.)이라고 한 즉심(卽心)이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평상시의 마음이 도다.)라고 한 평상심이다.
생각해보라. 매순 찰나의 그 모습이 내가 아니면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리고 모든 것이 인연의 산물일 뿐,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이 없음을 안다면 자책할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리고 실제로 현실로 드러난 일이 실재의 일이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버리고 멋지고 고상하고 좋고 탐나는 것을 바란다고 지금 벌어진 현실에서 그것은 어디에 있겠는가? 오직 망상을 부리는 생각 속에만 있을 뿐이다. 바로 고정된 무엇이 있다고 여기는 아상(我相)의 지은 집에 말이다.그것이 어찌 실재하는 것이어서 우리가 바란다고 그대로 되겠는가?
그런 것은 모두가 생각이 시비 분별하여서 지어낸 것일 뿐이다.
인간들의 대부분이 그 시비와 분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 세 사람이 같은 말을 하면 거짓도 진실이 된다는 것처럼 공업(共業)에 빠져서 시비와 분별이 거짓임을 알지 못하니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받은 정체성을 지키라는 교육에 길들여져 고정된 가치와 그것을 지키는 고정된 내가 있다고 믿고는 분별을 떨치지 못하고 자신을 자책하고 있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받은 그 교육이 우리도 모르게, 본래의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는 존재가 아니라 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 속에 차곡차곡 저장해놓고는,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면 그 순간에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질책하며, 나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올바른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생각은 우리를 교육시키고 세뇌시키며 쥐어뜯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순진한 우리는 그 생각의 놀음에 놀아나서 그것이 번뇌의 근원임을 꿈에도 알지 못하고, 착하게도 생각이 시키는 대로 자책도 하고 뉘우치면서 눈물도 흘리고 자신을 쥐어뜯는다. 그리고는 생각은 아주 보람찬 회개를 했다고 속으로 흐뭇해한다.
물론 인간세계라는 동질성을 가지고 있는 집단에 살려면 집단의 규칙을 따라야 삶이 편하다.
그래서 잘못했고 그것이 다른 이들을 힘들게 한다면 고쳐야 한다.
하지만, 원래 완전한 내가 있는데 그 완전함에 비해 잘못 한 것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정체성이 없는 존재여서 매순간 그저 인연에 따라 사는 삶에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살기 위해 그 인연에 맞춰 고치는 것이니, 거기엔 고정된 내가 없어 쥐어뜯고 자책할 존재도 없다.
그래서 자책은 고정된 내가 있다는 한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기 위한 술책일 뿐이다.
우리가 인연 따라 살아가야하는 이유는 우리가 바로 법 그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연은 연기법의 현상(現像)으로 이 한 법의 작용이니, 매 순간 변하지만 엄정하고 빈틈없는 과학적인 법칙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이 우주 삼라만상의 자연스럽고 올바른 행동규범이다. 그래서 모든 조사들이 인연 따라 살라고 하였고, 일체의 시비와 분별이 없이 인연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무위(無爲)요 무심(無心)이요 무념(無念)의 삶이며 그렇게 사는 사람을 무심도인(無心道人)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전심법요(傳心法要)에서는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드린다 하더라도 한 사람의 무심도인에게 공양함만 같지 못하다.무슨 까닭인가? 무심도인은 일체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供養十方諸佛이라도 不如供養一個無心道人이라 何故오 無心者無一切心也니라”
라고 하였다.
그냥 매순간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일체가 법이므로 매순간 나는 바로 인연이요 인연에 응하여 드러나는 그 때의 모습이다.
우리는 생각이 정해놓은 규칙에 만능인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아무리 수행을 해도 잣대를 세우는 이상 반드시 잘못을 저지르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연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연의 모양은 우리의 생각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매 순간 그 당시 최적의 조건이 모여 모양을 만든다.
그래서 생각의 잣대와는 어긋날 때가 많다. 하지만 생각이 잣대를 버리지 않는 이상 인연의 삶은 늘 생각을 속이는 것 같고 뜻대로 되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의 삶은 늘 번뇌로 가득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곳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만 사는 곳도 아니다. 그래서 인간이 아무리 잣대를 세워 그것에 맞는 세상을 원해도 인연이 되지 않으면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고 모든 문제가 인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잣대가 허상이라는 사실을 알면 그때부터 우리의 삶은 너무나 편하고 자유로워진다.
그때부터 우리는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냥 인연을 받아들이고, 인연 따라 일하고 쉬고 밥 먹고 사람을 만나면 수다도 떨고 잠이 오면 잠자면 될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삶과 삼라만상의 삶은 이 한 법이 이끄는 대로 아무런 문제도 일도 없이 잘 흘러간다.
있지도 않은 나라는 정체성(正體性)쥐고 쓸데없는 교만으로 자신을 쥐어뜯지 마라. 그 정체성이 바로 아상(我相)이요 에고(Ego)이며, 또 자책만큼 겸손을 가장한 가증스런 에고의 극치도 없다.
이 자책하는 생각이 자신을 넘어 바깥세상까지 시비로 물들여 서로 미워하고 원망하며 온갖 악을 만들어낸다.
그것을 경계한 것이 바로 달마조사(達磨祖師)께서 제자 혜가(慧可) 선사(禪師)에게
“밖으로 반연을 끊고 안으로 헐떡임을 멈추어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비로소 도에 들 수 있다.”
라고 한 말이다.
댓글목록
반야지7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
윤기붕님의 댓글
저녁 법회에서 뵈요.
삐카 님의 댓글
착한나, 너무 순진했네요. ^^
윤기붕님의 댓글
일부러 착한 사람 되려고 하지 마세요.
물론 그렇다고 나쁜 사람되려고 하면 똑같은 짓을 하는 겁니다.
그냥 인연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삐카님의 댓글
걱정마세요.
저 너무 착해서 일부러 착한 사람 되려 하지 않습니다. ^^
윤기붕 님의 댓글
착한 사람이 되려고도 안 되려고도 하지 마시고 인연 가는대로 하십시오.^^
idlesky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21c독립군님의 댓글
잘 알겠습니다.선생님!
감사 합니다~
무무님의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