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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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看話禪)에 대하여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3,852

16-10-31 17:28

본문

간화선(看話禪)이란 볼 간(看)자에 화두(話頭)의 말 화(話)자의 합성어로 ‘화두(話頭)를 본다.’는 뜻이다.

이 말은 화두란 궁리를 해서 뜻을 푸는 것이 아니라 화두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

화두란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말머리라는 뜻이지만, 말에 머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만법의  말이 일어나기 전의 모양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말이 일어나기 전의 모양이라 하면, 또 말이 일어나기 전의 무슨 모양과 뜻이 따로 있는 줄 아는데 그것이 아니라, 그냥 말이 지칭하는 그대로일 뿐 다른 뜻이 없다.

​

예를 들어 조주선사께서 누가 법을 물을 때 '뜰 앞의 잣나무'라 한 것이 바로 말이 일어나기 전을 가리킨 것이다.

즉, 그냥 뜰 앞에 있는 잣나무일 뿐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무슨 숨어 있는 뜻이 없다. 그냥 잣나무다. 그리고 그 잣나무가 바로 법이라는 말이다. ​

말 그대로이다. 일체가 한 법인 불이법(不二法)이어서 일체 만법이 법 아님이 없다. 그래서 뜰 앞의 잣나무가 그대로 법이다.

​

물론 조주선사가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한 것은 사람들은 사람의 인식에 들어온 만물에는 모두 자신들이 지은 이름을 그렇게 붙여 놓으니 가리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뜰 앞의 잣나무라고 호칭을 하지만, 조주선사가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한 것은 이름만 그런 것이지 그것은 원래 이름이 없고 그렇게 그런 인연이 되어 그 자리에 있는 무엇을 가리킨 것이다.

만법은 이름을 붙이면 그 순간부터 만법의 본래모양은 사라지고 이름에 딸린 모양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조주선사가 잣나무라고 한 것은 이름이 붙은 잣나무를 보라고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에 붙은 이름과 의미를 떼고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조주선사가 뜰 앞의 잣나무를 가리킨 이유요, 법이요 화두다.

 

그리고 화두라는 것도 조주선사가 화두를 준 것이 아니다. 그냥 법을 그대로 보여준 것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말을 못 알아듣고는 화두(話頭)로 만든 것이다.

즉, 조사들의 말은 법을 그대로 보여준 것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니, 그렇게 말하고 보여준 의미와 뜻(없는 뜻 : 그대로가 법이니까)을 알면 바로 법을 알 수 있으므로 조사들이 왜 그렇게 말한 것인지를 알라고 그런 것을 모아둔 것이 화두(話頭)다.

 

이처럼 조주선사가 법에 대한 물음에 뜰 앞의 잣나무란 말을 붙인 것은,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부르니 그렇게 부른 것일 뿐, 조주선사의 뜻은

‘뜰 앞의 잣나무는 어떤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법이다.’

라고 한 것이다.

​

실제로는 세상 만법은 이름을 붙이기전이나 붙인 후나, 다만 이름만 붙었을 뿐, 그것은 여전히 그것일 뿐이고, 만법이 다 이 하나의 법에서 나오고, 이 하나의 법의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매 순간 만나는 모든 것들은 다 진실하고 참되고 삿됨이 없는 법 자체다.

 

그런데 사람들은 만법에 이름을 붙이고는 그 만법마다의 특별한 뜻을 입혀 놓고는 그것의 쓰임새나 뜻, 모양을 정해버린다.

그리고 늘 그렇게 보다보니, 조주선사가 말한 ‘뜰 앞의 잣나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잣나무의 뜻에 갇혀버리고 사람들 역시 자기가 지은 뜻에 갇혀서 잣나무가 바로 법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주선사가 ‘뜰 앞의 잣나무’라 한 것은

“바로 지금 눈에 보이는 저 뜰 앞의 잣나무에 너희 들이 가진 뜻과 모양을 떼어버리면 그것이 바로 법이다.”

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도 오랫동안 자신들이 지은 모양과 뜻을 사물에 붙여 놓고는 그 의미와 뜻을 참된 것으로 알다보니,

선사들이 법의 인연으로 그렇게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면,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렇게 가리키는 그것에 무슨 숨은 깊은 뜻이 있는 줄로 안다. 즉, 스스로 그렇게 해왔으니 조사들도 그러는 줄로 스스로의 생각에 속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그 속에 다른 어떤 의미나 뜻도 없다.

 

​숨은 뜻이 있다면 오히려 사람들이 그냥 그렇게 거기에 있는 것에 뜰 앞의 잣나무라 이름을 붙이고 그것에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궁리를 하는 인간의 생각이 숨은 뜻이다. 사람들이 잣나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부터 그냥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모양이던 것이 사람들 마다,

‘내가 보고 의미를 지은 잣나무’

라는 모양과 잣대 아래 숨어버리기 때문이다.

​

​이처럼 사람마다 자신의 의미와 관념과 모양을 지어 그것을 보는 의미가 다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숨은 뜻은 사람이 이름을 붙이고 모양을 지음으로 생겼기 때문에, 말이 붙기 전, 즉, 있는 그대로라는 뜻으로 화두(話頭)라 하고, 그 화두대로 말과 이름이 그리고 모양의 의미가 붙기 전의 모양을 보라고 해서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하는 것이다.

​

그냥 그것을 그대로 보면 그것은 그냥 그것일 뿐이다. 거기엔 어떤 의미도 뜻도 이름도 고정된 모양도 없다.그리고 세상의 만법이 모두 그것과 같은 법칙으로 생기고 변하며 흘러간다. 그리고 그렇게 흘러가게 하는 법, 즉 불이법(不二法)은 만법이 어떻게 변하든 늘 함께 한다. 비유하면 마치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을 하든 늘 나를 떠날 수 없듯이, 만법이 인연으로 어떻게 변하든 늘 이 한 법을 떠날 수 없다.

그것을 일러 돈오입도요문론에서 대주 혜해스님이 이 법은 상주(常住 : 늘 머문다.)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법칙이 바로 이 한 법의 연기 작용(緣起作用)이요 연기법(緣起法)이요, 일체 만법이 모두 이 한 법의 연기 작용, 즉 연기법에 의해 드러나고 변하고 흘러가기 때문에 일체만법이 이 한 법인 불이법(不二法)과 티끌만큼도 떨어져 있지 않고 하나로 묶여 있어서 일체 만법 그대로가 바로 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조주선사가 법을 묻는 물음에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한 것은 그것 그대로 법이니 그렇게 보라는 뜻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올바른 간화선(看話禪)이다.

​

이는

금강경(金剛經) 첫 사구게(四句偈)에서

“범소유산개시허망(凡所有相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라고 한 것과 같은 의미다. 즉,

“무릇 모양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니 만약에 모든 모양이 모양이 아닌 것으로 본다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

는 뜻과 같은 것이다.

​

이 사구게(四句偈)에서

“무릇 모양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

에서 모양이 있다는 것은 일체 만법이 잠시도 머물지 않아 비록 모양을 띠기는 하나 고정된 모양이 없다. 그래서 만법 모양은 실재하지 않고 오직 사람의 생각이나 기억에만 존재하는 것이니

‘사람이 의미를 지어서 붙인 모양은 모두 실재하지 않은 허망한 것이다.’

라는 뜻이고, ‘모양이 모양이 아닌 것으로 본다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

라는 것은 ‘사람이 의미를 지어서 붙인 모양을 떠나 있는 그대로 본다면 그것이 바로 본래 모양 즉 여래, 법을 보는 것이다.’

는 뜻이다.

​

그래서 조주선사의 화두를 금강경 사구게식으로 보면 '뜰 앞의 잣나무라는 것은 사람이 붙인 이름과 모양을 가진 허망한 것이니 만약 사람의 생각으로 지은 모양과 이름 가진 뜰 앞의 잣나무로 보지 않고 그냥 저렇게 법의 인연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면 곧 그대로 여래(법)을 보는 것이다.' 는 뜻이다.

​

​일체 만법은 모양이 없는 모양이다.

왜냐하면 만법이 비록 모양을 띠고 있긴 하나, 찰나의 인연으로 순간적으로 변하고 그 변화가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일체의 모양이 없는 것이 바로 법이요 만법이기 때문이다.

​

이 말은 잣나무니 뜰이니 하는 등의 이름이 있는 모든 것은 모두 인간이 붙인 이름이요 모양이어서 실재 모양이 아니라 인간의 뜻과 감정이 들어간 허망한 것들이란 말이다.

​

그래서 삼라만상의 모든 것들, 즉 만법은 그냥 그렇게 법의 인연으로 거기에 있을 뿐이어서 모양이 모양이 아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바로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다.

​

​즉, 사람의 뜻으로 뜰 앞의 잣나무로 보지 않는 것이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이고 그냥 그러한 것이 저렇게 인연으로 있는 저 모든 것이 다 법이구나 하고 보는 것이 바로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인 것이다.

​

이렇게 일체 만법을 보고 일체가 한 법임을 보는 것이 바로 간화선(看話禪)이다.​

​

그런데 사람들은 오랜 습으로 세상 만물에 일일이 이름을 짓고, 그 이름마다 뜻을 붙여서 보니, 일체 만법의 매 순간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들의 눈에는 일체 만법이 바로 법임을 알지 못하고 개체적인 모양과 뜻을 가지고 있어 법과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들의 생각은 전도되어 있다.”

고 하시는 것이다.

​

​간화선(看話禪)이란 바로 이처럼 매순간 만법의 모양을 자신이 지은 모양으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불이법(不二法)의 법으로 보는 것이다.

즉, 뜰 앞의 잣나무는 우리가 붙인 이름과 모양이고, 그저 매 순간 법의 인연으로 변해가는 법 그자체로 보는 것이 바로 간화선(看話禪)이다.

​

​그런데 사람들은 화두를 뜻풀이 하듯이 궁리를 한다. 즉, 자신이 아는 모든 생각을 총 동원하여 헤아리고 있고,

법은 인간의 생각과 뜻과는 무관하게 존재하고 흘러가고 있으니사람들이 아무리 생각으로 헤아리고 궁리해도 법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

일체의 모든 화두가 궁리하고 풀 필요가 없이 그대로 법이다. 어떤 숨은 뜻도 없고, 거룩하거나 현묘한 뜻도 없다. 사람들이 자꾸 의미를 붙이고 뜻을 가지고 전도된 생각으로 찾으니 마치 무슨 뜻이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

​그래서 '이 뭣 고'하는 화두도 역시 '이 뭣 고' 하는 그놈이 바로 법이다. 그러니 간화선(看話禪)을 하고, 법을 궁구하고 있는 그 놈이 그대로 바로 법임을 아는 것이 바로 볼 간(看)에 화두를 말하는 화(話)를 붙여서 간화선(看話禪)이라 하는 것이다.

​

 다시 말하지만 화두는 말머리이다. 말머리란 말에 머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말과 의미가 일어나기 전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이 일어나기 전에 무슨 숨은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양을 붙이고 의미를 지어 왜곡시키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양을 말한다.

그 모양을 그대로 보는 것이 바로 간화선(看話禪)이다.

그리고 그 화두를 그대로 보고 믿는 것이 바로 간화선이다.

​

그래서 ‘뜰 앞의 잣나무’라 하면 그냥 ‘뜰 앞의 저 나무가 바로 법이구나.’ 하고 보는 것이 간화선인 것이다.

​

이 뜰 앞의 잣나무라는 화두를 금강경식으로 말하면, ‘잣나무는 잣나무가 아니라 이름이 잣나무인 것이다.’그래서 모양이 모양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 즉 법을 보는 것이라는 사구게(四句偈)의 말이 되는 것이다.

​

​모든 화두가 다 이렇게 사람의 말과 의미에 오염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를 말해주는 것이다.. 운문의 마른 똥 막대기도 운문이 볼일 보는 그 옆에 있는 그대로의 막대기이고, 동산의 삼 서근도 삼 서근 안에 법의 뜻이 들은 것이 아니라 동산이 여름날에 떨어진 베옷 서근을 바늘로 꿰매고 있는, 있는 그대로 삼베옷이다. 그리고 그 무게가 세근이었다.

 

일체가 다 법이요, 불이법(不二法)이어서, 조주선사의 눈에 들어오는 잣나무와, 운문이 볼일 볼 때 옆에 있는 똥 막대기와, 동산이 바늘로 깁고 있는 떨어진 삼베 납의(衲衣)가 바로 불이법이요 법 그 자체다.

선사들은 어떤 스무고개도 아니고 퀴즈놀이도 아닌 있는 그대로 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사람들은 자신들이 늘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붙이는 것에 속아서 선사들도 그러는 줄 알고 스스로에게 속아서 화두(話頭) 그대로가 법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

​그래서 만약 눈 밝은 이가 이렇게 간화선(看話禪)을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금강경(金剛經) 사구게(四句偈)에서 말하는

“범소유상개시허망(凡所有相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

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일체가 법(法)이요 선(禪)이어서 따로 간화선(看話禪)이라 할 것도 없고 세상만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이 법임을 알면, 그것을 아는 자신 역시 법임을 아는 것이니 따로 간화선을 하는 놈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金剛經) 3분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에서 말하는,

“수많은 중생들을 다 제도했지만, 한 중생도 제도 받은 바가 없다.”

고 한 것과 같은 뜻이다.

​

이렇게 알고 일체의 생각과 모양을 떠나 만법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이 법임을 보는 것이 진정한 간화선을 하는 것이지 만약 간화선이 수행이 되고 수행 방편이 된다면 이미 간화선(看話禪)은 죽어버린 것이다.

​

​이는,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면 그냥 있는 그대로 보면 되는데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다시 수행으로 얻으려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유위요 조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사들은

“참 사자는 보는 즉시 뛰느니라.”

하고, 또

“명마는 채찍 그림자만 봐도 달리느니라.”

고 하는 것이다.

법에는 차제가 없다. 보라고 하면 당장에 그냥 보면 되지 생각으로 헤아리면 바로 어긋나는 것이다.

​

이럴 때 간화선(看話禪)은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법임을 아는 것이니 다리를 꼬고 앉아서 하는 것이 선이 아니라, 일상에서 늘 선을 행하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일행삼매인 것이다.

 

 

 

댓글목록

윤기붕님의 댓글

이 글은 지난 목요일 대구 법회 동영상 전법게 1에 초당님의 댓글에 제가 댓글을 달고는 그것을 다시 정리한 글입니다.

반야지님의 댓글

기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날씨가 마니 쌀쌀합니다. 따뜻한 밤 되세여  ^^^

윤기붕님의 댓글

제 글이 좀 길죠?
긴 글 읽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갑작스레 쌀쌀한 날씨에 감기 조심해여~*^^*

조나단님의 댓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그냥 보이는 것이 도다.^^

청정심님의 댓글

간화선이 이런 것인데... 바로 법이 면전에 드러나 있는데...
한소식 하고도 거기서 또 찾아요.. 뭐 이러 이러한 완벽한 대각을 설정해 놓고..
예전에 어느 절에 갔다가 간화선을 알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안타깝네요.
거기엔 한 티끌만 붙어도 어긋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없음님의 댓글

도가 무엇입니까?
차나 한 잔 하시게!
물어봐서 아는대로 말해준거네요^^

윤기붕님의 댓글

그렇습니다.
거기엔 어떤 숨은 뜻이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이는 대로 말해준 것입니다.
일체가 다 법이니까요.^^

박제님의 댓글

제상비상이요,
일체가 법이라고 하면서도!!!!
이다, 아니다 하는 생각하나 떼지 못하는 이 역설......
선생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