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적천단상

달마불식(達磨不識)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3,602

18-10-11 13:44

본문

달마도 모르고(達磨不識) 약산(藥山)의 천성인(千聖人)도 모르는 것

 

 

달마조사(達磨祖師)가 중국에 건너가 처음 만난 사람이 양무제(梁武帝)였다.

선(禪)을 몰랐던 양무제는 자신의 불교 사랑의 공덕과 관념적인 불교의 뜻을 물었으나 번번이 자신의 뜻과는 다른, 아니 다름을 넘어서 도대체 모를 소리만 하는 달마의 정체가 너무나 의심스러웠다.

지공(至公)이라는 신임하는 스님이 공인하는 인도에서 온 큰 스님이라고 하니 무시는 할 수는 없고, 들을수록 모를 소리에 가슴만 답답해지는 양무제는 기어이 마지막 말을 내 뱉는다.

아마 속으론

‘지금까지 많은 노력과 재물을 들여서 불교를 위해서 힘을 쓰고, 중국에서 나름 내노라 하는 스님들을 만나 불교에 대해서 공부도 많이 했는데, 아무리 지공이 공인하는 대덕(大德)이라지만, 내가 볼 때에는 도대체가 땡중 같다. 도대체 네 놈의 정체는 뭐냐?’

하는 마음이 들었는지 모른다.

 

“내 앞에 있는 그대는 누구요?”

 

이쯤 되면 정말로 과거의 노무현대통령의 말씀처럼

“이쯤 되면 막가자는 것이지요?”

하는 상태와 맞먹는 수준이다.

 

그 말에 달마의 대답은 한 술 더 얹는다.

 

“나도 모르오(不識)!”

 

양무제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갈 데까지 간 것이다.

지공화상이 보증하는 대덕이라니 참고 있지만, 사람의 목숨 몇 개쯤은 파리채로 두드리듯, 아니 두드릴 것도 없다. 말만하면 되는 왕의 권세로선 대덕이라는 이름만 없으면 그저 어떻게 하고 싶은 마음이 이스트를 넣은 찐빵 속보다 몇 백배나 더 부글거렸을 것이다.

분을 삭이지 못하고 얼굴을 붉힌 채 끝내 말을 못 잇는 양무제를 보고 인연이 없음을 안 달마는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났다.

 

그러나 우리는 달마와 양무제의 드라마 같은 만남에 혹(惑)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자리를 보고 깨달음이라는 것을 얻으려는 사람이다.(물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달마와 양무제의 이야기가 사실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달마조사께서 양무제가 묻는 말에 대한 답인

“나도 모르오.(不識)”

라는 달마불식(達摩不識)이다.

 

달마조사가 왜 모른다고 했으며, 모르는 ‘그것’이 무엇일까?

 

어느 날 약산유엄(藥山惟儼)이 앉아 있는데 석두희천(石頭希遷)대사가 보고 물었다.

 

“너는 여기서 무엇을 하는가?” (汝在遮裏作麽)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一切不爲)

“그러면 한가롭게 앉아있구나.” (恁麽卽閑坐也)

“만약 한가롭게 앉아있다면 곧 하는 것입니다.” (若閑坐 卽爲也)

“너는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이냐?”(汝道不爲, 且不爲箇什麽)

“천명의 성인이라 해도 그래도 알지 못합니다.” (千聖亦不識)

 

유엄이 알지 못한다고 하는 ‘그것’이 무엇인가?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들이 가장 잘 빠지는 함정이 바로 이 ‘그것’, 즉 성품을 직접 알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내가 왜 나임을 알려고 하는가? 그것을 모른다고 내가 내가 아닌가? 내가 나로 살아가지 못하는가? 사람들이 뱃속에서 음식이 어떻게 소화 되는지를 알고 밥을 먹는가?

 

매트릭스 영화 1편에서 네오가 매트릭스에서 건져져서 모피어스와 무술대결을 할 때에, 네오는 이미 각종 무술 프로그램을 뇌에 다운 받아서 하지 못하는 무술이 없었지만 처음엔 모피어스를 이기지 못한다.

그러자 모피어스가 묻는다.

“내가 어떻게 이겼지?

그러자 네오가 답한다.

“너무 빨라서요.”

그러자 모피어스는

“내가 빠르거나 힘이 센 게 내 근육 탓일까? 여기서?”(둘은 가상현실의 프로그램 안에서 대결을 하고 있음)

그러자 네오가 뭔가 생각이 오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모피어스는 다시 말한다.

“네가 공기를 마신다고 생각해?”

네오는 뭔가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그리고 다시 대결을 하자 네오는 모피어스를 이겼다.

 

여기서는 가상현실이니 생각 안이어서 호흡을 하지 않으므로 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처럼, 대결도, 몸의 근육이나 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 네오는 마치 자신이 직접 움직인다고 생각을 하고는 생각으로 생각을 간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네오는 이기려는 생각을 접고 이미 뇌에 인식된 무술에 대한 것에 맡겼다. 그리고는 모피어스를 이겼다.

 

실제로 우리의 삶이 그렇다. 내가 생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법이 우리를 이미 인연에 즉하여 살아가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인연에 즉하여 잘도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인연에 즉하는 마음이 아니라, 생각으로 그것을 자꾸 간섭하는 시비분별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고 오히려 마음을 또 좋은 마음 나쁜 마음으로 분류하여 어떻게 하려고 한다. 그렇게 좋다 나쁘다, 잘한다 못한다고 마음이 몸을 시비하면서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이다.

 

앞의 말들이 좀 비유가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살아가는가?

그냥 나이기에 살아가지 않는가?

깨달음도 마찬가지이다.

깨달음이란 우리가 그것임을 아는 것이니, 깨달았다는 것은 우리가 바로 성품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성품인 이상, 이미 법임을 알고, 법이 모든 것을 다 주재하고 있으니, 우리가 그것, 즉 법, 성품이 무엇인지 알 때와 모를 때가 달라질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안다고 성품이 발현하고, 모른다고 해서 성품이 발현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억상실증이 걸려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해서 잠자거나, 무엇을 보거나, 말을 하거나, 배가 고파지거나 생각을 하는 기능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물론 내가 누구와 관계된 사람인가 하는 것은 모른다. 그래서 집이, 학교가, 가족이 등등에 대해선 모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나와 관계된 것이지 내가 아니다.

 

아무리 기억상실증이 걸려도 먹고 자고 움직이고 쉬고, 또 생각조차도 과거의 관계의 망각은 있어도, 현재 자신과 관련된 것과의 새로운 설정은 할 수가 있다. 그래서 생각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

치매? 치매는 생각하는 기능에도 이상이 있기 때문에 병이어서 치료를 해야 하는 것이고, 기억상실증은 기억만 사라졌을 뿐, 신체적, 정신적 기능이 아무 이상도 없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는가?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치매에 걸리라는 말도 아니고, 그러한 병에 걸렸을 때에 치료의 노력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몰라도 충분히 살아가고, 우리는 허툰 존재가 아니라 법 그 자체이니 알 수 없는 것을 애써 직접 보거나 알려고 하지 말고 그냥 살아가라는 말이다.

지금 앎 이외에 우리가 생활하며 자신을 쓰는데 무슨 불편이 있는가? 아무런 불편이 없다. 모른다고 배가 안 고픈 것이 아니고, 잠이 안 오는 것도 아니고, 또 일찍 죽지도 않는다. 모든 이가 다 죽을 때가 되어야 죽으니 죽을 때까지 살아간다.

그리고 실제로 치매나 기억상실증 같은 증상에 걸리지 않아 지금 우리와 관계된 것에 대한 것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살아가지만 자신에 대해선 무엇을 아는가?

달마조사와 약산유엄은 그것을 말한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해도 우리가 존재하도록 하는 그것.

깨달은 사람들은 그러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실제로 그것을 눈으로 감각기관으로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서산대사는

“부처도 몰랐거니 가섭이 어찌 전하랴?” (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

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 알지 못할 것을 알려고 공력을 허비한다.

그냥 여러분들이 손을 흔들고 발로 걷고 입으로 말하는 그것이 그대로 법이요, 여러분이요, 그것이다. 따로 찾을 것이 없다. 왜냐하면 법이 따로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다.

달마조사는 혈맥론(血脈論)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마음은 미묘하여 보기가 어려우니 이 마음이 색심과 같지 않기 때문이니라. 이 마음이 부처라서 사람들이 모두 보고자 하나 광명중에 손을 돌리고 발을 움직이는 자가 강가의 모래와 같이 많으나 물어보면 모두 답을 하지 못하는 것이 마치 나무로 만든 사람과 같다. 모두가 자기가 받아서 쓰는데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가?”

(此心微妙難見 此心不同色心 此心是佛 人皆欲得見 於此光明中 運手動足者 如恆河沙 及于問著總道不得 猶如木人相似 總是自己受用 因何不識)

 

한 마디면 충분하다.

“일체가 한 법이요 내가 부처다.”

그냥 믿어라. 그대가 법이요 부처가 아니면 어떻게 온통 법이 만든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