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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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음이란?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3,808

18-05-21 03:01

본문

고봉원묘선사가 설암화상의 회중에 있을 때,

어느 날 설암(雪巖)화상이 고봉을 불러 물었다.

“생시에 주재(主宰)가 되느냐?”

“됩니다.”

“잠을 잘 때 꿈속에서도 주재가 되느냐?”

“네, 됩니다.”

그러자 설암화상은

“그럼, 꿈도 없고 생각도 없고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없는 때에도 주재가 되느냐?”

하고 물었다. 이 말에 고봉이 콱 막히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으니 설암화상이

“너는 이제부터는 부처(佛)도 법(法)도 배울 것이 없으며 고금(古今)도 공부할 것이 없으니 그저 배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잠을 자되, 잠이 깨거든 정신을 가다듬고 오직 ‘나의 이 주인공이 필경 어느 곳에 안심입명(安心立命) 하는 것일까?’를 참구하라.”

하였다.

그때 고봉은 주재자라는 말이 화두가 되어 의단(疑團 :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의심이 머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내 차라리 평생을 버려 바보가 될지언정 맹세코 이 도리를 명백히 하고야 말리라.”

하고는 설암화상을 떠나 만행을 하며 5년 가까이 지나던 어느 날,

한 밤에 잠에서 깨어 여전히 이 일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옆에서 자던 도반(道伴)이 잠결에 목침을 침대 아래로 떨어뜨리는 소리에

홀연 저 의단(疑團)을 타파되고 마음이 확 밝아지면서 게송을 읊었다.

 

사주(泗州)의 대성인(大聖人)을 친견한 듯하고                   如泗州見大聖

떠난 객 고향에 돌아온 것 같네                                         遠客還故鄕

원래 다만 옛 사람일 뿐                                                    元來只是舊時人

옛 행리처를 바꾼 적이 없도다                                          不改舊時行履處

 

게송에서 말하듯,

​깨달음은 고향에 돌아온 것 같고 옛날의 행하던 것을 바꾼 적이 없는 것과 같이,

자신이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이 본래 깨달아 있고,

​설암화상이 물은 ‘주재하는 자’, 즉 깨어 있는 자 또한 개체적인 자신 아니라 ​

이 한 법 불성(佛性)이 주재하고 있어서,

자신과 일체만법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본래 깨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그 순간의 느낌을 이렇게 말했다.

“마치 그물에 걸렸다가 풀려 나온 듯 하고, 불조(佛祖)의 깊고 깊은 공안(公案)과 고금의 차별인연에 밝지 않음이 없게 되어, 이로부터 나라가 편안하고 천하가 태평하여 한 생각도 함이 없이 시방(十方)을 좌단(坐斷 : 앉아서 끊음)하였다.”

 

여기서

“한 생각도 함이 없이 시방을 좌단(坐斷 앉아서 끊음)하였다.”

라는 것도,

고봉선사가 설암화상의 주재(主宰)라는 말에 모든 것을 자신이 하려고 하다가,

​도반의 목침 소리에 주재는 고봉 자신의 개체적인 존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한 법이 늘 그렇게 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처럼, ​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앉아서 끊음(坐斷)’이라 하니

자리에 틀어 앉아 마음을 한 곳에 모아 모든 생각을 끊는 것이라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 한 법이 본래 그러함을 알아,

좌단으로 실제로 끊을 것이 있어서 자신이 노력하여 좌단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그래서 좌단을 ‘한 생각도 함이 없이’하였다고 하였다.

 

 

‘깨어 있음’이란 이런 것이다.

 

​깨어있음이란 마치 잠도 안 자고 꿈도 안 꾸고 또 허튼 생각도 하지 않으며,

초롱초롱하게 늘 깨어 있는 우리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과 아무런 상관없고,

우리의 삶의 형태와 생각의 형태와 아무런 상관없이 이 법이 늘 깨어 있으므로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생각을 하고, 심지어 허튼 망상까지 할 수 있음을 알고,

법이니, 깨달음이니, 깨어있음,이니 하는 생각조차 없이,

아무런 시비없이 그냥 인연 따라 살아가는 것이 참다운 ‘깨어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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