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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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6년 고행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4,025

18-04-06 10:45

본문

부처님께서는 깨닫기 위해 6년의 고행을 하시다가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을 들었다.

 

‘내 이 몸이 살아있는 동안 해탈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지나친 고행으로 내 몸이 죽은 뒤에 하늘에 태어난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리고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이러한 고행(苦行)으로는 절대로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는 일어나 나이란자라강에 목욕을 하고는 강둑의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쉬었다.

마침, 부근 마을의 수자타란 여자아이가 그 앞을 지나다가 당시 인도에 목신을 섬기는 것이 유행하던 터에 고행의 끝판으로 갈비뼈가 드러내고 나무 아래 앉아 있는 그를 보고는 목신으로 착각하고는, 우유죽을 가져와 바쳤고 부처님은 그 우유죽을 먹고 기운을 차려 앉아 있다가 어느 날 새벽의 샛별을 보고 깨달으셨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고행주의와 쾌락주의의 양변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노라!”

 

.

.

 

실제로 정말로, 또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 말한다 하더라도 수행은 절대로 깨달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부처님의 고행을 예를 들고는,

 

“부처님께서 그래도 6년 고행을 해봤기 때문에 고행으로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 않는가?”

 

라면서 고행이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아니 도를 구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다.

그리고는 수행을 해야 한다고 고집하며 그것이 옳다고 쥐고 그것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은 장면을 앞에서 말했다.

 

물론 부처님께서 6년 고행이 부질없음을 알고 그만두려하는 순간 깨달았다면 고행의 연속에서 깨달으셨으니, 수행이 부처님의 깨달음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 어느 정도는 정당화될 수 있고, 부처님 식의 수행과 고행을 따라 해볼 만하다.

하지만 부처님의 고행은 오직 실패의 절망과 좌절만 안겼을 뿐이고, 정작 깨달음은 그것을 그만두고 앉아 있다가 그냥 하늘에 떠 있는 샛별이라는 엉뚱한 인연으로 얻었을 뿐이다.

 

이를 보면, 결국 부처님께서는 고행으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을 했을 뿐, 그것으로는 깨달음은커녕 그 많은 세월을 쓸데없이 헛되게 고생만 했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고행을 그만두고 나이란자라강에 몸을 씻었다.

그래서 이때까지는 깨달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저 그러한 고행은 쓸데없는 짓이란 것만 알았다.

 

그리고 그 후

 

보리수 밑에 앉아 수자타가 목신(木神)인 줄 착각하고 공양을 올린 우유죽을 먹고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고 난후에 모든 노력을 그만두고 마음에 힘을 빼고 앉아 있을 때 새벽별이 그의 마음에 쑥 들어와 박힌 것이다.

즉, 수행과 아무런 인연이 없이 깨달으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음을 볼 때, 결국 고행은 깨달음과 아무 상관없는 쓸데없는 세월이었고 오히려 절망과 좌절을 안겨 준 실패인데,

부처님께서 버리신 고행을 들고, 아니 고행은 힘드니까 수행을 하여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

말이 되는가?

 

깨달으려는 자가 일부러 실패를 경험한다는 말이 정상적인 생각을 지닌 말이냐는 말이다.

그리고 수행하는 사람들이 부처님께서도 스스로 떠났다고 고백하신 부처님의 고행이, 쓸데없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실패를 했기 때문에 깨달음에 도움이 되었다고 하며 자신들의 수행을 정당화 시키면서 부처님께서 절망하신 수행을 흉내 내며 그것으로 깨달을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말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것은 깨달음에 대한 열망이었고, 그 열망 때문에 당시에 유행하던 수행방법으로 세월을 보냈을 뿐, 정작 열망과 수행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열망 = 수행이라는 이상한 등식을 가지고는 부처님께서 수행을 그만 둔 사실에는 눈을 감고,

부처님의 고행에서 얻은 드러난 갈비뼈에서 거룩함을 뽑아내어 수행이라는 틀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 앉아 있다.

그리고는 나중에는 깨달음은 어디가고 없고 수행방법을 가지고 옳으니 그르니 시비를 하고 심지어는 바른 수행이라는 이상한 것을 만들어 내고는 수행을 잘하면 마치 자신이 뭐가 되는 것을 가지고 있는 듯 으스대고, 그것이 잘 안되면 자신이 수행을 잘 못한다고 자신을 쥐어뜯고 끙끙대며 중생 짓을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그런다고 부처가 되는가?

고행이 좋으면 혼자 하라. 고행을 그만 둔 부처님을 팔아 다른 사람들까지 갈비뼈를 드러내게 하지 말고.

 

본래부터 미혹된 적이 없는 본래부처가 깨달음이라는 것을 만들고 거기다가 바른 수행이라는 틀까지 만들어 스스로 그 속에 들어 가서는 갇혀 있으면서도 자유라는 것을 얻으려 하니 이 얼마나 이상한 짓이 아니겠는가?

수행을 좋아하는 자도 만약 깨닫는다면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깨달으신 후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또는 일체중생실개성불(一切衆生悉皆成佛)이라 하여, ‘모든 중생들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 또는 ‘모든 중생은 다 깨달아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깨달음은 2500년동안 부처님의 단독 전유물이 아니라, 그 이후 수많은 깨달은 사람이 나오고, 지금도 깨달은 사람이 도처에 있고, 그들은 모두 한결 같이 부처님과 같은 말을 한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본래부터 청정하다.

깨달음에 대한 모양과 바람만 내려놓으면 말이다.

지금 아무리 봐도

못나고

부족하고

칠칠맞고

밴댕이 같고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일지라도 늘 그 순간의 인연에 딱 맞는 모습이다.

만약 그 모습이 딱 맞지 않다면, 그 모습이 아닌 생각이 바라는 모습이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의 못난 모습과 함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실제의 삶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그 모습만 있지 바라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의 생각과 아무런 상관없이 매 순간 드러난 나의 모습과 세상의 모습은, 내 생각이 바라는 모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딱 그 때의 법의 법칙과 작용으로 드러난 인연의 모습이고, 실상이요, 법이요, 부처의 모습이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아무리 애를 쓰고 바라더라도 지금에 없는 모습이니 어찌 딱 맞는 모습이겠는가? 그 모든 것은 자신이 너무 마음속에서 바라다가 꿈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생각의 허깨비일 뿐이다.

 

생각에 속지마라.

지금에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은 그대의 생각이 지어낸 망상속의 허깨비일 뿐이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중생인 적이 없었고, 또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생각의 망상이요 꼬임이다.

 

그 꼬임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부처를 볼 것이다.

남이나 자신이 바라는 생각이 아닌 매순간의 자신에게서 말이다.

댓글목록

천지님의 댓글

생각에 속지마라.
지금에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은 그대의 생각이 지어낸 망상속의 허깨비일 뿐이다
그 모든 것이 생각의 망상이요 꼬임이다.

늘푸를이님의 댓글

가르침 감사합니다 스승님.
건강하신지요?^^

저는  3주간 야근,밤샘을 하루가 멀다하고 하네요.
심한 감기도 떨어지지 않네요.

어떻게든 살아지는 것이겠지요.

윤기붕님의 댓글

그래 고맙다.
난 건강에 이상이 없다.

근데 감기에 들었다니 안그래도 꽃샘추위에 쌀쌀한데....

우리의 몸은 사대가 모인 것이어서 집착할 바는 못되지만,
그래도 깨달음을 얻을 정신을 싣고 다니는 수레이니 함부로 취급해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쨌든 몸을 잘 돌봐서 빨리 건강을 되찾기를 바란다.

늘푸를이님의 댓글

스승님 늘 건강하시니 좋아요^^
급한 일이 어제 마감되어서
오늘 내일은 몸을 챙기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