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모름과 이심전심(以心傳心)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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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내가 보는 것만 본다.
남이 보는 것은 절대로 볼 수가 없다.
남 역시 자기가 보는 것만 본다.
내가 보는 것을 절대로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겪은 것은 남이 절대로 알 수가 없고
남이 겪은 것 역시 내가 절대로 알 수가 없어서
우리는 절대로 서로를 알 수가 없다.
결국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경험이나 지식으로만 알 뿐,
남이 가지고 있는 경험이나 지식으로는 절대로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나의 우주가 따로 있고 다른 이의 우주가 따로 있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하는 불국토(佛國土)안에 있는 수많은 불국토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주의 중심이다.
각자 각자 그리고 사물 사물이 모두 우주의 중심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자신의 우주 안에서만 아는 자이지 한 치라도 그것을 벗어나면 아무 것도 모르는 자이다.
그것은 내가 바라보고 안다고 하는 대상들은 바깥에 있어 모두가 바라보는 우주가 아니라 바로 내 안에만 있는 우주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현실에서 바라보고 만나는 대상은 분명 바깥에 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 느끼고 감정이나 생각으로 정리하는 것은 온통 내 기억에 저장된 정보로 판단하고 느낀다.
그래서 실제로 내가 대상을 만난다는 것은 모두 내 생각이 그린 홀로그램을 만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아무리 바깥을 보는 시력이 좋다 해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바깥에 있는 실물을 내 안의 홀로그램으로 보고, 내가 상대하는 사람도 역시 나를 대할 때는 그의 생각인 그의 우주 안에서 그의 홀로그램으로 본다.
이처럼 우리는 절대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다.
(이것을 이해하기란 좀 어려울 수가 있겠지만 조금만 더 인내를 가지고 삶의 전반을 깊이 생각해보면 알 수가 있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그는 그에겐 그가 아니며 그 안에 있는 나 역시 나에겐 내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내가 그를 내 생각으로 보고 그려놓은 그림 속의 그이며 그가 본 나 역시 그의 생각으로 그려놓은 그림 속의 나일 뿐이다.
이처럼 우리가 이 우주를 인식하는 것은 모두 저 나름대로 보는 것일 뿐 서로가 소통하여 나눌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물론 우주는 여전히 그대로 있고, 나 역시 내 인연으로 그렇게 살고, 그 역시 그의 인연으로 그렇게 산다.
다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만 빼고는...
이처럼 우리가 바깥에 대해 모르는 것은 우리가 어리석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 생각이란 놈은, 우리의 육근(六根)을 통해 본 육경(六境)을 인식하여 과거의 경험으로 성형 수술하여 만든 것이고, 즉 우리의 감각기관이 세상을 보고 얻은 정보를 아뢰야식에 쌓인 기억과 인연하여 만든 것이 생각이기 때문인데,
우리의 생각이 이런 놈일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존재 특성상 한 개체의 육체만 가질 수밖에 없고, 그 육체를 기반으로 생성되는 생각 역시 육체를 벗어나서는 존재 자체가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어, 아무리 대상을 만나더라도 결국 육체의 느낌으로만 만날 뿐, 실제로 대상의 느낌으로는 절대로 만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노력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모름인 것으로 어리석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것을 가지고 안다거나 알 수 있다고 우기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다.
그래서 타심통(他心通)이니 앉아서 천리를 보는 천리안(千里眼)이니 하고 떠드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늘 현재의 사실이 아니라, 과거의 누가, 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신령한 사람 등의 이야기로, 미지의 상태에 빗댄 존재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알고 싶은 욕망이 너무 강한 우리 인간, 만물의 영장이라 뻐기고 우쭐대는 우리 인간의 이 한 생각은 그런 이야기를 지어낸 사람들의 말에 혹하여 우리도 애쓰고 노력하면 그렇게 될 것같이 착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착각이다.
부처님께서 이 법을 깨닫고 나서
“나는 일체의 승자(勝者)이며, 일체의 지자(智者)이다. 일체법에 물들지 않고 일체를 버렸으며. 갈애(渴愛)가 다하여 해탈하였노라.”
라고 하신 것도,
세상만물의 하나하나의 특성과 매순간의 움직임 등을 다 안다는 뜻이 아니라, 연기법(緣起法)을 아셨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의 근본원리를 깨달으셨다고 말씀하신 것이지, 그것이 어떤 인연으로 어떻게 변해가는 것까지 다 아신다고 하신 말씀은 절대로 아니다.
물론, 세상을 좀 세밀하게 살피는 눈을 가지거나, 또 그러한 것을 잘 분석하여 세상의 흐름을 잘 읽는 사람들이 있어 짧은 미래에 대해 예측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있다.
하지만 그것도, 사람들이 육체와 생각의 한계 때문에 자신이 잘 쓰는 방향으로 몸과 생각을 쓰고, 또 사람들이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육체와 생각을 쓰며 살아가기 때문에, 사람들의 말과 행동들이 대부분 대동소이(大同小異), 즉 작게는 다르지만 크게는 같은 형태를 보이기 때문에, 눈이 좀 세밀한 사람은 그것을 잘 살펴 알기 때문에 그런 능력을 가진 것일 뿐이다.
그런 능력은 사냥을 많이 한 사람이 동물의 행동을 예측하기 때문에 사냥을 잘하고, 또 사기를 잘 치는 사람이 사람의 욕심이 어떻게 흐르는지 잘 알기 때문에 남을 잘 속이고, 또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은 사람들이 어떤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몰두를 잘 하는지를 아는 것과 같은 것일 뿐,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잘못 알아듣고는 그런 능력을 얻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는데, 만약 그런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절대로 이 법을 깨닫지 못할 것이고, 부처님의 말씀의 뜻을 알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우리가 이러한 것은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우리가 우리의 육체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숙명적 한계이다.
숭산스님이
“오직 모를 뿐, 오직 할 뿐!”
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우리의 한계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즉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선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평상시의 일로 예측을 할 수 있고, 대부분의 사람은 평상시의 생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맞을 확률이 있는 것이지만, 인연이라는 것은 어떤 변수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아는 자는 절대로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동원하여 세상을 아는 척하는 우리의 시비분별 하는 생각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마치 세상을 다 예측하고 아는 것처럼 여기고는 자신의 예측대로 되지 않으면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기보다는 세상을 탓하고 우리는 그것에 속아서 번뇌와 고통에 내몰리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일체의 지자(知者)다.’라고 하신 것은 이러한 사실, 모든 것이 다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인 연기법에 의해 이 세상에 생기고 변하고 흘러가므로 이 세상은 본래 그러하고, 또 이 한 법에서는 한 점의 움직임도 없음을 아셨다는 말씀이다.
세상이 본래 그러함을 알고 이 한 법에서는 한 범의 움직임도 없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결국 이 법을 아신다는 것이고, 세상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몰라도 일어난 모든 일은 다 이 한 법이 하는 매 순간의 실상(實相)의 일이라는 사실을 아신 것이다.
그래서 ‘일체의 지자(知者)다.’라고 하셨고,
그리고 그렇게 모두가 다 이 한 법의 일임을 아셨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휘둘리거나 번뇌를 일으키거나 고통받지 않기 때문에 ‘일체의 승자(勝者)다.’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앎이 있다.
첫째는 일체가 한 법이요, 일체만법이 모두 이 한 법이라는 사실이고,
둘째는 모든 존재는 이 한 법의 연기법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인연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앎이 있는 것이다 .
그래서 숭산스님의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주어진 인연의 일이 왜 그렇게 생겼는지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고, 하지만 그 모든 일은 다 이 한 법이 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오직 할 뿐!’이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모두가 다 이 한 법의 일이고 우리 역시 이 한 법 자체이지만, 한 육체를 벗어날 수 없는 한계로 인해 이 한 법의 인연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우리는 절대로 알 수가 없다는 그 ‘모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에 참된 지혜가 우리에게 생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사물을 기억하는 능력으로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예측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 되면 그 상황과 비슷한 과거의 경험과 지식으로 유추하여 나름대로 답을 만든다.
그리고는 자신이 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자신이 살아온 삶의 테두리에서 오직 자신의 감각으로 얻은 것인 자신만의 세계에 있는 답일 뿐이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에서 유추한 답이, 매 순간 변하며 한 번도 같은 일이 벌어진 적이 없는 우주의 최첨단의 시점에도 맞길 바라는 것 자체가 참으로 생각의 어리석음이다.
다만, 우리는 비슷한 환경 속에 살기 때문에 사람들은 같은 경험을 하고 같이 느끼며, 나아가 서로 나눌 수 있는 같은 언어를 가지고 있고, 그 언어로 대상에 대한 개념들을 서로 암묵적으로 약속해놨기 때문에, 마치 남이 느끼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또 믿을 뿐, 실제로는 각자가 느끼는 모든 것은 결국 자신만의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언어는 모두 관념적인 것뿐이다. 사과라는 말 속에 사과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과라는 말을 여러 사람이 함께 들어도 사과를 떠올리는 감정과 느낌과 그림이 모두 다르다. 또 실제로 사과를 보고 만지고 함께 먹어도, 그 느낌은 절대로 혼자만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어에 속아서 이런 사실을 서로 모른다.
사과는 달고 새콤하다, 이 말에 토를 달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달다.’와 ‘새콤하다.’의 느낌은 무엇을 말하는가? 라고 하면, 이것은 도저히 말로 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은 오직 자신만이 알 수가 있고, 그 느낌은 아무리 노력해도 말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언어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벗어난 소통은 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소통이 된다고 생각하고 서로를 안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다툼이 생긴다.
서로가 다 안다고 생각하니 상대에게 자신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떼를 쓰고 화를 내고 섭섭해 한다.
얼마 전에 올린 글에 ‘굿 윌 헌팅’이라는 영화의 이야기에서 로빈 윌리암스가 모든 것을 실제로 경험하지 않고 좋은 머리로 읽은 책의 것을 외워 말하면서 마치 자신이 겪어 아는 것처럼 말하는 맷 데이먼에게 했던 말,
“내가 미술에 대해 물으면 넌 온갖 정보를 다 갖다 댈걸? 미켈란젤로를 예로 들어 볼까?
그에 대해 잘 알 거야 그의 걸작이나, 정치적 야심, 교황과의 관계 성적 본능까지도 알 거야, 그치?
하지만 성 시스티나 성당의 내음이 어떤지는 모를걸? 한 번도 그 성당의 아름다운 천정화를 본 적이 없을 테니까 난 봤어...
(중략)
전쟁에 관해 묻는다면 셰익스피어의 명언을 인용할 수도 있겠지 '다시 한 번 돌진하세 친구들이여'라고 하면서. 하지만 넌 상상도 못해 전우가 도움의 눈빛으로 널 바라보며 마지막 숨을 거두는 걸 지켜보는 게 어떤 건지!
(중략)
너 고아지? 네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고 네가 뭘 느끼고 어떤 앤지 올리버 트위스트만 읽어보면 다 알 수 있을까? 그게 널 다 설명할 수 있어?”
- 적천단상 171. ‘깨달음 그리고 그대가 바라는 것은?’에서 퍼옴 -
(자신의 글이라고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자기표절로 고발당함~^^)
이와 같은 대화처럼 우리의 생각은,
들은 이야기로, 또는 책으로 읽은 이야기로 마치 그것을 안다고 착각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 이미 사라지고 없는 과거의 기억에 기대어 마치 현재의 일을 아는 것처럼 착각하고는 세상이 자신이 아는 것처럼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것이다.
마치 자신의 앎이 세상의 중심에 있고 자신의 앎처럼 세상이 흘러가야 하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것처럼....
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서로를 알 수가 없다.
이 사실만 알아도 우리는 나란 존재의 바깥에 어떤 불만이나 섭섭함을 가질 수가 없다.
물론 서로가 너무 달라서 이별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관념(觀念)...
관념이란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관한 견해나 생각으로, 현실과 거리가 있는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생각이다.
견해와 생각이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이유는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언어라는 통로 외엔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앞에서 말했듯이, 언어란 생각에서 비롯되고, 생각은 오직 자기의 경험을 축적해놓은 기억에서 도출되기 때문에, 같은 단어들 쓰더라도 깊이 파고 들면 사람마다 모두가 조금씩은 다른 뜻으로 저장이 되어 있는 말들이다.
그래서 직접 만나는 순간에도 서로가 서로의 말과 행동을 보는 시각은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세상을 대하며 얻는 언어는 말로 나누는 것도 있지만, 눈빛도 있고, 스킨십을 통한 촉감도 있고, 분위기로 느끼는 것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역시 자신만의 느낌으로 받아들일 뿐, 어느 누구도 그 대상의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아무리 노력하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보려고 해도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절대로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종교적인 신에 대한 느낌도 예외일 수가 없다.
우리가 믿고 이해하고 의지한다고 하더라도,
태어날 때엔 텅 비었던 우리의 머릿속에
살아오면서 차곡차곡 쌓아왔던 경험적 지식이 믿고 이해할 뿐,
정말로 신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이가 이야기해주는 신의 형상을 도출해낼 뿐인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설사 신이 와서 내게 직접 말해준다 하더라도,
그 신의 말을 알아듣는 것은 결코 내 경험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신에게 의지하는 것 역시
내가 그려놓은 구원의 그림에 의지할 뿐이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며, 부처도 내가 만들고, 중생도 역시 내가 만드는 것이다.
물론 생활적인 삶의 방법이나, 어떤 일을 하기 위한 기술적인 방법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즉 가깝게는 밥을 먹을 때 숟가락을 쓰는 방법, 그리고 언어 역시 태어날 때는 없던 것이요 사람들과 소통하는 기술적인 방법이니 반드시 익혀야 한다.
그리고 크게는 집을 짓는다든지, 운전하는 것, 기계를 설계하는 등의 이론과 물리적 방법도 역시 반드시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매 순간 그것을 할 때마다 새롭게 배워야 하는 불편이 따르고, 또 실패를 할 때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아주 많은 손해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것조차도 사용하는 방법이 똑같은 사람이 없다.
이처럼 삶이라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려는 우리가 변하고 또 대하는 상대도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알 수가 없고, 다만 과거의 기억으로 예측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이 생각은 마치 안다고 착각하고 있으니, 정말 몰라도 한참이나 모르는 놈이 이 생각인 것이다.
앎은 모름과 서로 상대하고 있기 때문에 앎이 생기면 상대적으로 모름이 드러난다.
그래서 앎의 탑이 높아질수록 모름의 어둠은 깊어만 간다. 그래서 알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모름에 대한 두려움만 늘어갈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이 끝이 있다면 우리는 노력을 통해 한 번쯤은 정복해볼 용기를 낼 수가 있다 .
하지만 이 연기법의 변화는 어떤 뛰어난 사람이라 해도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서 우리의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끝나지 않는 고통과 번뇌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뼈저리게 알고 외친 사람이 바로 ‘오직 모를 뿐’이라고 외친 숭산스님이다.
우리는 이처럼 우리의 생각 밖으로 나가면 아무 것도 모르는 존재로 철저히 혼자다.
그리고 우리가 본래 그렇다는 사실을 모르고, 알 수 있다는 믿음 속에 살아온 우리로선, 아무리 노력해도 모른다는 사실에 너무나 많은 두려움을 느낀다.
이는 모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서로가 소통된다고 믿는 세상에서 우리는 ‘모름’을 소외시키고, 사회성을 지닌 인간으로선 그렇게 소외시킨 곳에 떨어진다는 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은 정말로 우리는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노력을 해도 이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뼈저리게 통감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지혜로운 자는 이러한 한계를 냉철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두려움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외로움에서 벗어난다.
이는 내가 늘 말해온 것처럼 삶이란 이해하여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기에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해란, 생각이 자신의 앎으로 분석하여 동조할 수 있는 것이 있을 때 쓰는 단어이다.
우리가 이해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개인차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차이가 크지 않아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이 있을 때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라고 착각을 한다.
하지만, 개인차가 커 서로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될 때는 그런 여유의 공간이 없다. 그래서 이해만으로 절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왜?
그것을 이해할 만큼 그 사실에 대해 서로가 열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열려있지 않는 이유는?
우리는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것투성이고 그것을 보는 눈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세상은 모르는 것투성이라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한 우리에게 무조건 이해하라 하니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다만 사람의 생각이 살아본 경험으로 서로 양보해야 타협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대부분 갈등을 겪어도 결국 소통이 되지만,
그것도 결국 이해가 되어서가 아니라, 이해는 안 되지만 그런 오해로 서로를 외면하기엔 상대와의 인연이 아깝기 때문일 뿐,
그런 인연까지도 버릴 만큼 오해가 크면 절대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양보해서 타협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끝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의 앙금은 마음 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언젠가는 다른 이해의 현장에서 폭발을 한다.
이는 서로의 우주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곧이곧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해의 한계이다.
하지만 깨달은 자들은 이해도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그래서 그냥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각자의 세세한 감정이나 느낌은 절대로 있는 그대로 소통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 모름을 철저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남과 세상을 자신의 앎만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러분이 만약 진정으로 평화를 바란다면 안다는 생각을 버려라.
우리는 철저하게 자신의 우주에 갇혀있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노력을 통하더라도 자신의 우주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리고 이 우주 삼라만상은 우주에 존재하는 것들끼리 서로가 알아 협조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즉, 우주 삼라만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안다고 생기고 모른다고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알고 모름과 아무런 상관없이 그저 인연이 되기만 하면 일이 생기고 인연이 끝나면 일이 떠나가는 곳이다.
숭산스님의 ‘오직 모를 뿐’이란 말은 그냥 농담으로 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모름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우리는,
삶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이며
남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이며
남의 이해에 기대어 위태롭게 서 있는 자가 아닌 스스로 세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홀로 우뚝 선 ‘의지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될 것이며,
자신의 앎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모른다는 것을 철저하게 받아들이고,
일체가 한 법인 세상에는 알고 모름이란 것이 없음을 알고,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인연이 본래 그렇다는 것도 알고,
그래서 본래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서로 만나,
한 쪽이 꽃을 들어 보일 때(염화 拈華),
다른 한쪽이 웃는(미소 微笑)
‘이심전심(以心傳心)’이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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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반야지님의 댓글
우리가
이 모름을 온전히 받아들일때 우리는,
삶을 이해하려 하지않고 받아들일것이며
남을 이해하려 하지않고 받아들일것이며
남의 이해에 기대어 위태롭게 서 있는자가 아닌
스스로 세상의 모든것을 받아들이며 홀로 우뚝 선
"의지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될것이며,
자신의 앎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게 될것이다. ()()()
스승님 , 감사합니다.꾸벅
윤기붕님의 댓글
공감한다는 것은 서로가 고마운 일이지요.
저도 감사합니다~^^
밤이 늦었네요.
편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