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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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마라(일부 수정및 첨가)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1,951

20-03-06 21:09

본문

선하려 하지 마라. 선하려 하면 악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나니. 

사랑하려 하지 마라. 사랑하려 하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나니.

잘 나려고 하지 마라. 잘 나려하면 못난 것을 미워하나니.

깨끗 하려고 하지 마라. 깨끗 하려 하면 더러운 것을 미워하나니.

완전 하려고 하지 마라. 완전 하려 하면 불완전한 것을 미워하나니.

 

선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지 마라, 자신의 열등감이 선한 사람을 시기의 마음이 일어나나니

사랑하지 않은 자신을 탓하지 마라. 그 열등감이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하나니.

못난 자신을 탓하지 마라. 잘난 사람을 시기질투하나니.

더러운 자신을 탓하지 마라. 깨끗한 것을 미워하나니.

불완전한 자신을 탓하지 마라. 완전한 것을 미워하나니.

 

미워하고 사랑하고, 깨끗하고 더럽고, 선하고 악하고, 잘나고 못나고, 완전하고 불완전한 것을 구별하는 것은 그대의 생각속의 일일 뿐

세상만법의 모든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세상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고 미워함도 없고 사랑함도 없고 더러운 것이나 깨끗한 것이나 완전한 것이나 불완전한 것도 없다.

뒤집어 말하면 세상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고 미워함도 있고 사랑함도 있고 더러운 것이나 깨끗한 것이나 완전한 것이나 불완전한 것, 이 모두를 구비하고 있다.

그래서 완전하다.

그리고 그대의 속에도 똑같이 있다.

 

그리하여 이름 하여 완전하다고 하는 것.

구별하여 버리려 하거나 취하려 하지 말라.

마치 길에 돌도 있고 물도 있고 썩은 것도 있고 아름다운 풀도 있듯이

그대의 속에도 그렇게 존재함을 인정하라.

제발 보기 좋고 마음에 드는 것을 향하는 반쪽 도를 구하지 마라.

 

일어나는 생각은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왔다 가는 것.

아무런 문제가 없이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것인데,

그대의 분별이 그것을 잡고 울부짖을 뿐이다.

 

그대가 분별이 아닌 것에 열중하라.

그리고 일어나는 모든 그대의 생각을 내 버려 두어라.

 

물론 처음에는 이제까지 가졌던 분별의 업식(무의식) 때문에

그냥 내버려두면 무의식의 어두운 면이 자신을 집어삼키며

마치 그대가 그대 자신이 원치 않는 자로 되지는 않는가 하는 불안감이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내버려 둬 보아라.

 

그러면 점차 분별이 쉬게 되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시비하는 자가 사라질 것이며

생각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오직 삶에 열중한 자신을 발견하고 자유하며 진정한 평화가 무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아무도 시비할 자가 없으니 무엇에 구속될 것인가......

 

어떤 눈먼 자가 길을 가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졌는데

어찌 어찌하다가 나무 덩굴하나를 잡아서 땅에 추락하는 것을 겨우 면했다.

그래서 그는 목청껏 소리쳤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그런데 지나가는 눈뜬 자가 보니 그 모양이 가관이라.

땅에서 1미터도 안 되는 곳에 매달려서 살려달라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눈뜬 자는 그 눈먼 자에게

 

“그 덩굴을 놓으시오. 그러면 되오.”

 

하지만 이 눈먼 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고 다만 자신의 생각 속에서 볼 때엔 가당키나 한 말인가?

 

‘이 덩굴을 놓으라니.... 나보고 죽으라는 말인가...?’

 

그래서 그는 계속 두려움에 떨면서

 

“제발 농담하지 말고 어떻게 좀 방법을 알려주시오.”

 

하지만 눈뜬 자는 그 덩굴을 놓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니.....

 

우리의 삶도 바로 이러하다.

천국이니 자유니 평화니 하는 것은 그대가 두려워 놓지 못하고 쥐고 있는 그것을 놓는 순간, 그대는 이미 그 속에 있음을 알 것이다.

 

제발 두려워하지 말고 그냥 놓아라.

 

부디 자신이 이것만이 있어야 자신이 행복하고 가치 있고 자유스러운 삶이 될 것이라고 믿는 그 덩굴을 놓아라.

그러면 새 하늘 새 땅이 그대를 맞이할 것이다.

 

그 덩굴과 두려움이 그대를 끝을 알 수 없는 정처 없는 길로 내몬다는 것을 알라.

 

그만큼 눈물겨운 나그네의 외로운 삶을 살았으면 되었지 않은가?

그대가 놓으면 죽을 것 같은 그 덩굴(자신이 바라는 바람직한 모습)은

그대의 분별하는 생각 속에만 존재하는 한낮 꿈이요 허상일 뿐이다.

그대가 분별하여 바라는 자신의 모습은

그대를 정처 없는 나그네의 길로 내몰아 끝도 없는 번뇌와 고통의 길을 줄뿐이다.

 

지금의 매순간의 자신이 바로 진리요 자유의 땅이다.

그대가 그 덩굴을 놓는 순간 그대는 그 진리의 자리에 떨어질 것이다.

 

제발 두려워하지 마라...

 

 

송대(宋代)의 길주(吉洲)에 거(居)하던 청원유신선사(靑原惟信禪師)은

상당하여 설법하기를

 

“노승이 30년 전 참선(參禪)에 들어서기 전에는

‘산은 그냥 산이요. 물도 그냥 물로 보였다.’

 

그 후 선지식(善知識)을 친견하여 참선의 길에 들어서니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었다.’

 

다시금 모든 것을 다 쉬고 보니

‘여전히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이더라.’

 

대중은 이 세 가지 견해가 같은가 다른가?

누구든지 희고 검은 것을 가려내면 그가 가까이 함을 허락하겠노라.

(누구든지 이 뜻을 터득하면 자신과 같은 경지임을 허락하겠다는 뜻)”

라고 하였다.

 

(吉州靑原惟信禪師上堂。老僧三十年前未參禪時。見山是山。見水是水 及至後來親見知識有箇入處。見山不是山。見水不是水。而今得箇休歇處。依然見山是山。見水秖是水。大衆這三般見解是同是別。有人緇素得出。許汝親見)

 

이 법문에 말하는

처음 산은 그냥 산이요 물은 그냥 물로 보였다.

라고 할 때에는, 이 법을 모르고 산과 물이 실재하는 것으로 본 것으로,

속뜻은 산이라 하면 산에 집착하고 물이라 하면 물에 집착하는 상태이고,

 

두 번째,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닐 때는

산도 없고 물도 없고 오직 이 한 법밖에 없는 이사무애(理事無碍)의 상태이다.

자칫하면 오직 이 한 법만 귀중하게 여겨 대상을 부정하는 상태가 될 수 있다.

즉 법과 세상사를 차별하여 모든 것에 대해 오직 이 한 법만 고집하는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여전히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이더라.’

라는 말은,

일체의 모든 것이 다 이 한 법으로,

산은 산대로 법이고, 물은 물대로 법으로

따로 법이라 할 것이 없음을 깨달아 인연 따라 살아가는 상태, 즉 사사무애(事事無碍)를 말한다.

 

우리는 숨 쉬고 밥 먹고 살고, 또 하늘을 날 수 없고 물고기처럼 물에서 살 수 없는 존재다.

즉 여전히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이다.

 

이러한 육체의 한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어찌 분별을 하지 않고 살아가겠는가?

 

다만 전에는 분별하며 그것에 매달리고 고집하고 시비를 하였지만,

이 법을 깨닫고 보임을 하고나면

그냥 인연에 응하여 분별할 뿐, 그 인연이 지나면 그 생각 역시 함께 사라져 자취를 남기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는 과정이 앞에서 말한,

자신이 시비하고 분별하는 것조차 시비분별하지 않는 것이다.

 

즉,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속에도 물속에도 못 들어가듯이, 한 개인이 살아온 습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개인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것으로 한 생각 일어났다고 해서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나는 법을 깨달은 사람이고 법인데 어찌 이런 것에 분별을 해?’

라고 시비한다면, 그는 법은 살리고 자신은 죽이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즉 법과 만법을 차별하는 것이 되는 것으로 법만 알고 그 법으로 드러난 만법을 무시하는 분별밖에 되지 않는다.

 

법과 만법은 하나다.

그 하나는 만법이 오직 이 한 법에만 귀일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한 법이 만법에 귀의(귀일에서 귀의로 수정)하는 것임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즉 “만법은 하나에 귀일하고, 이 하나는 어디로 귀의하는가?”라는 화두로, 만법이 하나에 귀의 하는 것은 이사무애(理事無碍)의 법이고, 이 하나가 귀의하는 곳(돌아가는 곳)은 곧 만법으로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법이다.'(첨가한 부분)

 

이것이 곧 청원유신선사가 마지막에 말한

“여전히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이더라.”

라는 말이다.

 

우리는 깨달았다고 해서 우리가 학이 되는 것도 아니고, 산이 되는 것도 아니고, 호랑이가 되는 것도 아니며 있지도 않은 신선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나일 뿐이다.

 

다만 이 법을 깨닫고 보임이 끝나 사사무애(事事無碍)의 경지가 순숙해지면 내가 그러하듯이 너도 그렇고 만법이 모두 그러함을 알아 일체의 시비가 사라질 뿐, 나의 삶은 여전히 나로 살아갈 뿐이다.

 

그러니 하늘을 나는 새가 매 순간 날개 짓을 하지만 공중에는 자취를 남기지 않듯,

나는 어떻든 나이기 때문에 우리가 살면서 나의 습관대로 살고 때론 시비분별도 하지만,

다만 그것은 그때의 인연일 뿐 다음 인연까지 그 시비를 끌고 가지 않으면 매순간 나로 살아가게 되고,

그러면 나 아닌 어떤 존재가 되려고 하거나 내게 없는 무엇을 가지려는 분별에서 벗어나, 안으로 일체의 생각에 걸림이 없고 밖으로도 모든 것에 시비와 분별이 없어 두려워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기를

“본래 아무 일도 없다.”

고 하는 것이니 두려워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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