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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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닫는데 따로 애를 쓸 필요가 없다.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1,984

20-02-27 11:14

본문

당나라의 옛 스님인 영선사(英禪師)가 별로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다. 

밭일을 하느라 망치로 흙덩이를 부수다가 

큰 흙덩이 하나를 보고 장난삼아 힘껏 후려쳤더니,

곧바로 폭삭 부서졌다. 

그러자 홀연히 크게 깨닫고, 

이로부터 은현 자재하여 남들이 헤아리지 못하게 되었고, 자못 신이함을 나타냈다. 


한 노스님이 이 이야기를 가지고 말하기를 

“산하대지를 영 스님이 한 번 후려치자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부처님께 공양하는데 반드시 많은 향을 써야하는 것은 아니다.”

고 하셨다.

                              - 원오심요 (圓悟心要) 상(上) -

 

우리는 본래부터 깨달은 존재이다.

그리고 삼라만상이 그것 아님이 없다.

 

영선사는 흙덩이를 깨부수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문득 이 자리를 보았다.

‘깨달은 존재’, ‘그것'’, ‘이 자리’라고 하는 말이 모두 같은 말이다.

그 외 부처, 불성, 자성, 진여, 여래, 진리, 도 등등이 모두 이 하나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이 하나는 모양도 없고 색도, 냄새도, 소리도,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도 붙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름을 붙일 수 없으니 무슨 이름을 붙인들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이 하나가 삼라만상에 이 하나와 함께 하지 않은 것이 없듯 모든 것이고 낱낱에게 다 하나로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름이 무엇이든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하나의 이름은 우리가 생각으로 연상할 수 있는 언어를 붙이다 보니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일 뿐,

오직 하나이므로 따로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고, 또한 그 반대로 어떤 이름을 붙인들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 이름을 따라다니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이처럼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 우주에 존재하는 것들 중 이 하나가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것도 마치 무슨 씨앗처럼 그 존재하는 그 속 어디에 따로 간직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온통 그 자체이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이 그대로 그 하나이다.

 

그래서 이 글을 보고 있는 모든 이와 심지어 이 모든 우주도 이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티끌 하나하나도 이것이 아님이 없다.

그것을 영선사는 흙더미가 부서지는 것을 통해서 본 것이다.

 

이것을 아는 방법은 오직 이것을 보아야만 한다.

위에서 모양도 냄새도 또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어떤 것도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본다는 것인가?

자신이 바로 이것이요, 그 자신이 어떤 특정한 모습, 어떤 특정한 마음을 먹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의 자신이 그대로 이 하나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삼라만상의 일체 모든 것도 이 하나라는 사실을 문득 사무치게 맞닥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살아온 세월과 세상을 보는 눈과 경험이 다 다르기 때문에 

맞닥뜨려 깨닫는 순간의 느낌(굳이 붙일 말이 없어서 느낌이라고 한다.)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러나 모두가 그 순간 하나같이 안다.

그 맞닥뜨림은 이 하나를 아는 것이고,

이것은 배운다거나 생각으로 이해한다고 알아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안다.

 

그래서 이것을 알기 위해 수행을 하거나 공부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은 이것을 아는데 생각을 쓰게 하고 자신도 모르게 이해하려고 하여

맞닥뜨리게 하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왜냐하면 생각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경험이 쌓인 것이고 현재에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조사들이 닦을 필요가 없고 오염되지 말라고 하고,

그 오염이란 머리로 아는 것과 수행을 통해 알려고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에 대한 글이나 말들은 그저 그것에 대한 설명일 뿐 그것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말씀도 또한 마찬가지여서 모든 경을 다 외운다고 해도 

이것과 맞닥뜨리지 않으면 쓸데없는 지식만 머리에 가득할 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평생을 법문을 하셨으면서도 스스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하신 것이다.

 

이 글도 마찬가지이다.

이 글 자체는 그것이지만 이글의 설명 속에는 그 하나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나이지 나를 설명하는 말에는 내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저 맞닥뜨리듯 내가 바로 그것임을 알면 되는 것이다.

마치 찬물을 마시면 차가움을 알고, 뜨거운 물을 마시면 뜨거움을 알 듯이 말이다.

 

그처럼 자신이 늘 못마땅하여 받아들이지 못해 다른 자신을 찾지 말고, 

매순간의 스스로 자신을 보며 어떤 상태이든 그것이 지금 존재하는 자신이지 

그 자신이 자신이 아닌 적이 없고, 

그 자신을 떠나 다른 자신은 어디에도 없음을 깊이 받아들이고 느껴보라.

그리고 수십 년을 쌓아온 시비와 분별을 내려놓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하면 된다. 

물론 그동안 쌓아온 시비분별이 난동치는 것에서 지금 자신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깨닫는데 따로 애를 쓸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을 맞닥뜨린다는 것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지금 그대들이 이 글을 보고 있지 않은가?

누가 보고 있는가?

그것을 두고 어디에서 자신을 찾을 수 있겠는가?

매 순간 지금 그 모습 그대로일 뿐이다.

 

애쓰지 않아도 보고, 어릴 때 글을 배워놓으면 평생을 애쓰지 않아도 읽을 수 있고, 애쓰지 않아도 손을 놀리고, 그 손으로 밥을 먹고, 그러면 애쓰지 않아도 소화가 되고, 어디를 가자고 마음만 먹으면 애쓰지 않아도 다리와 발은 걸음을 걷는다.

그를 두고 어디서 자신을 맞닥뜨리겠는가?

 

아무리 바람직하고 법다운 자신을 찾아다녀도, 그것은 생각 속의 허깨비일 뿐 자신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찾고 있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참 모습임을 알라.

 

그래서 예전에 쓴 글을 여기에 하나 덧붙인다.

 

 

* 깨달음은 숙제를 푸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숙제를 푸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숙제를 풀려고 하는지 참으로 이상하다.

 

깨달음은

매 순간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법이요 자신임을 아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이 왜 엉뚱한 숙제가 되어

지금의 자신을 버려두고

다른 자신을 찾는 것이 되어 버렸는지...

참으로 이상하다.

 

이글을 보고 있는 자신은 누구인가?

아니, 그대는 누구인가?

 

지금 이 글을 보고

또 느낌을 가지고

좀 지나 식상해서 다른 사람들의 글을 보고

더 재미가 없으면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리다

책상 앞을 떠나 커피를 마시고

애들과 놀고

동료와 수다 떨고

등등...

늘 그렇듯이 그런 일상을 이어나가겠지.

그것은 그대가 아닌가?

 

깨달음은 자신을 아는 것이라 하는데

그렇게 사는 그대를 버리고 다른 것을 찾는다면

지금 이 삶 속의 그대는,

그대가 아닌 누가 또 그대의 흉내를 내는 건가?

그런 건가? 아닌가?

도대체 어느 것이 그대인가?

 

왜 깨달음을 구하는가?

일체가 모두 하나의 법인데...

 

그 한 법에는

이 글을 보는 것,

또 느낌을 가지는 것,

식상해서 다른 카친의 글을 보는 것,

그것도 마치고 커피를 마시는 것,

그리고

아이들과 노는 것,

이런 것은 없는가?

 

이런 게 깨달음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대가 알고 싶은 그대의 모습과 깨달음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대...

정말로 깨달음을 얻고 싶긴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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