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깨달음, 수행, 실천, 사랑 등등...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3,696
관련링크
본문
이 글은 제가 십여년 전에 인터넷에 올렸던 글을 우연히 인터넷에서 발견하여 올립니다.
수년 전에 컴퓨터 하드를 날려먹는 바람에 그동안 썼던 많은 글들이 사라져버린 적이 있었는데, 다행히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고 또 제 글을 복사하여 올린 다른 이들의 사이트에서도 발견할 수 있어 복구한 대부분의 글들이 지금의 적천단상의 글들입니다.
물론 그 이후에 쓴 글도 많이 있구요.
하지만, 아직도 사라진 글들을 다 찾지 못했는데, 지금처럼 많은 시간이 지나 오랜 카페나 사이트에서 사라져버린 글을 가끔씩 발견하기도 하네요.
...........................................................................................
깨달음, 수행, 실천, 사랑 등등...
수행하는 모든 이들은 깨달음이 있다고 한다.
아니, 그렇게 믿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나도 한 때 그랬다.
그래서 수행은 별로 안 했지만,
닦아서 나아가, 열심히 하면 그 결과로 깨달음이 온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Nothing!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이 내가 알은 답 아닌 답이다.
세상에는 답이 없다.
진정으로 안 자들은 다 그렇게 이야기한다.
깨달을 것이 없다고,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부처님조차 무소득(無所得 - 얻은 바 없다.)을 말씀하셨다.
수많은 조사들이 말했다.
"모자라고 부족한 그대로의 네가 바로 그 보물"이라고....
그 보물을 알려고 한다면,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여기고 또 그럴듯한 다른 것이 있다고 비교하는 그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알아 그 생각에서 눈을 돌리면 된다.
사람들은 깨달으면 그에 합당한 실천을 하라고 한다.
하지만, 죄송하게도 그러한 것이 없다.
왜냐하면 깨달음이라는 것 자체가 없기에
그에 합당한 실천이라는 것 역시 없다.
그냥 살아감이다.
하지만, 깨달음이라는 것이 있는 자에겐,
그 깨달음의 상에 걸 맞는 행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이니, 수행이니 하는 형식을 만들어낸다.
그리곤,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을 늘 뉘우치고 채찍질한다.
선각자들이 신이라고 이야기하나,
깨달음이 있다고 여기는 자는 그것을 자기 자신을 이야기함을 모른다.
하지만, 깨달음이 없음을 안자는
신이라고 하던, 불성이라하든 자성이라고 하든, 도라고 하든, 진리라고 하든 그것은 참 자아를 이야기함을 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마음이란 놈은 상을 짓는다.
참 자아라는 상을... 참으로 마음은 그 놈의 상을 만들기 좋아하는 놈이다.
참 자아라는 것은 있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이 따로 있지 않음을 알고,
그놈의 상을 짓는 마음이 가짜임을 알고 그에게 속지 않고
지금 현 순간순간을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그 자신이 바로 참 자아이다.
참 자아는 불성이요, 자성이요, 지금 이 글에서 말하는 신이다.
이렇게 신과 우리는 하나다,
그런데,
'내가 신이다.' 라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신은 모든 곳에 두루하고 너는 육체라는 한계적인 존재인데 어떻게 불경스러운 이야기를 하느냐고 한다.
하지만, 크고 작음을 나누는 것이 바로 분별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속에서 바라보니,
신과 사람은 분명 달라 보인다. 거룩한 것이 있고 비속한 것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분별이 떨어진 자는, 그것이 하나임을 안다.
이는 몸과 몸짓의 관계이다.
몸은 신이다. 몸짓은 세상만물이다.
즉 우리의 몸은 하나이지만, 그 몸은 수없이 많은 몸짓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몸(신)은 영원하지만, 몸짓(세상만물)은 생겼다가 사라진다.
맞다.
신은 영원하지만, 우리의 개체적 존재는 반드시 사라지게 되어있다.
그래서 또 사람들은 ‘내가 신이다.’라고 하면,
몸짓처럼 사라질 내가 어떻게 영원한 신이냐고 한다.
하지만, 몸과 몸짓이 둘인 것 같으나,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이다.
몸(신)이 없으면 몸짓(세상만물)이 나올 수가 없고,
몸짓(세상만물)이 없으면 몸(신)을 알아볼 수가 없다.
(인식할 수가 없다. 신, 또는 자성은 인식의 범위를 넘어있다.
그리고 오직 몸(신)만 있으면 상대가 없어서 자신을 인식할 수가 없다.
눈이 눈을 못 보는 것과 같다.)
그처럼 일어나고 살아가고 늙어가고 사라지는 모든 것(몸짓)을
바로 몸(신)이 관장하시고,
몸짓(세상만물)을 통해서 몸(신)은 스스로를 인식한다.
하지만,
마음이란 놈은 늘 머무는 것을 좋아하니 개체적이고 한계적인 그 몸짓을(나를) 나라고 규정하고는,
몸짓과 몸이 둘인 것같이 여기면서 자성과 모든 것을 자신(아상)과 떼어놓는다.
그래 놓고는 우리 속에서 우리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그 신은 위대하고
자신은 한계적이고 개체적이며 부족하고 못난 존재이니 신이 아니라고 끝까지 우긴다.
그렇게 모든 것을 떼어놓고 우기고 있는 것이
분별하는 마음인줄은 결코 안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마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더더욱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상(내가 있다고 여기는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 있는 자는 영원히 자신과 신이 하나가 될 수가 없다.
하지만, 아상이 사라진 자(그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마음의 장난에서 벗어난 자)는 온전히 자신이 신과 하나임을 의심치 않는다.
내가 나를 의심하랴?
라마크리슈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의 은총에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자기 자신의 노력과 신의 은총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자기 자신의 노력은 전적으로 필요하다.
이 세상에 살든지, 아니면 이 세상을 떠나든지 그것은 모두 너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신의 의지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너의 삶 전체를 신에게 맡기고 이 세상에 살면서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라.”
그가 한 말 중에
'신의 은총에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말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하지만, 잘 듣고 보아야한다.
신의 은총에 주파수를 맞춘다는 것은,
신의 은총의 주파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의 은총의 주파수가 바로 그대들의 있는 그대로의 삶이요, 나의 삶이다.
그것에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함은 인위적인 노력을 그만두는 것을 말함이다.
인위적인 노력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분별하는 마음이 속삭이는 말이다.
늘 새롭고 머물지 않고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고 과거의 괜찮은 상과 비교하면서 있지도 않는 모습을 만들려는 그 헛된 노력을 말한다.
즉 분별하여서 자신을 못났다고 하여 늘 잘 나려고 하는 노력을 말한다.
그것을 그만 두는 것이 바로 신의 주파수에 맞추려는 최선의 노력이다.
즉, 진정한 노력이라는 것은,
부족하고 못난 모습을 노력을 통해서 완전한 자가 되라고 속삭이는 그 마음이 잘못됨을 알고,
그것에서 눈을 돌려, 태어날 때부터 아무 문제없이 살아온 그대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노력인 것이다.
그래서 라마크리슈나가 말한
'이러한 자기 자신의 노력과 신의 은총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는 것이 된다.
마음의 속삭임에 눈을 돌리고,
신이 준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잠시도 머물지 않고 늘 새롭게 살아가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신의 은총을 통함이요,
그러함으로서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대가 아무리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한 치도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신이 허락하지 않는 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그대의 분별하는 마음이 시키는
인위적인 모든 노력을 그만 두지 않고는
진정으로 신이 주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한 마음 때문에
우리는 늘 비교하고, 비교된 속에서 바르다고 여기는 것에 맞아떨어지지 않는 자신을 늘 쥐어뜯고 고통스러워한다.
‘이 세상에 살든지, 아니면 이 세상을 떠나든지 그것은 모두 너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신의 의지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너의 삶 전체를 신에게 맡기고 이 세상에 살면서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라.’
그렇다!
이 세상에 살든지 아니면 이 세상을 떠나든지 그것은 모두 우리의 의지가 아니다.
신의 의지에 달려있다.
그 신의 의지라는 것이 바로 생로병사를 만들어가는 그 생명력이다. 불성, 자성을 말한다.
그것이 바로 태어나서 있는 그대로 늙어가며 죽어가는 우리 속에 내재되어 있는 그 생명력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있지도 않는 자신을 만들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그대의 아름다움과 순수함을 받아들이고(그대의 삶 전체를 신에게 맡기고)
있는 그대로 열심히 살아가라(이 세상에 살면서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라.)
신과 우리의 관계를,
몸과 몸짓의 관계로 보느냐,
절대적인 존재와 상대적인 존재로 보느냐의 시각에서,
신과 내가 하나이냐, 아니냐 하는 관점이 달라진다.
그러나 분별이 사라지면,
상대적이라는 것이 성립이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절대적이 된다.
세상만물에 두루 편재하는 것은 크고 ,
내 안에 있는 것은 작다고 하는 차별의식도 사라진다.
분별이 사라진다고 하니까,
똥을 된장으로 보는 것으로 착각하는 자가 있다.
그야말로, 분별없는 자이다.
차별과 차이를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수많은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따로 따로 떼어놓고 보면,
그 어느 것도 우리가 아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다 우리이다.
그리고 또,
세상만물은 수많은 것들이 있다.
우리 역시 수많은 사람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세상만물과 우리는 불성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불성을 아는 자는
수많은 사람이나 세상만물이 바로 나임을 안다.
신과 나의 관계도 그러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화엄경에서,
불국토 속에 또 수많은 불국토가 있다고 하셨다.
즉 신속에 수많은 신이 있다는 말이다.
그 수많은 세포 하나하나가 다 나이듯이,
이 세상에 신성(불성)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신인 것이다.
존재 그 자체(신, 불성, 자성)는 그 성품만 우리에게 빌려주었다.
그리고 그 성품을 빌려서 우리의 마음이 우주를 만들었다.(인연에 의해서)
개개의 존재는 개개의 것을 만들고,
그것들이 모여서 우주가 된 것이다.
이 우주에 있는 생명 있는 것과 생명 없는 모든 것이 그렇게 해왔다.
모든 것이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인연이다.
이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고 인연에 의해서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와 세상만물은 인연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인연 또한 불성의 성품이 없으면 생기지 못하므로,
우리와 세상만물은 불성을 한 치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인연에 의해서 그렇게 만들어진 것들이 끊임없이 생멸 한다고 해도,
그 성품, 즉 불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건물이 무너진다고 해서 공간까지 무너지랴?
그 성품은 태초이전부터 있었고,
그 성품이 시공을 뛰어넘어 우리 개개의 안에 온전히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시공이라는 것 자체가 성품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시간이 없다는 말이다.
그 성품이 바로 신이다.
그리고 그 신이 바로 우리 안에 온전히 자리 잡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은총을 내려주고 있다.
우리는 바로 신의 은총 그 자체이다.
우리는 바로 신 그 자체이다.
그러한데도, 마음이란 놈은 그 은총 그 자체로서 살아가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제 맘대로 있지도 않는 상을 지어서 그곳으로 나아가려 한다.
이 어찌 은총을 거부하는 꼴이 아니랴?
분별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아 보라!
도대체 못났다, 잘났다, 부족하다, 구족하다 하는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분별하는 그 마음은 내려놓을 생각을 하지 않고
공연히 본래 완전한 자신만 모자란다고 탓하고 있을 뿐이다.
분별하는 그 마음과 생각의 놀음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깨달음이라는 것이 없음을 알게 되고,
그러면 깨달은 자의 행이라는 것 역시 헛된 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수행이라는 것도 역시,
못난 자신을 채찍질하여서 잘난 자신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분별하는 생각과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을 알 것이며,
그리하여, 사랑이라는 것 역시, 우리의 분별하는 그러한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냥, 그대들은 태어날 때, 아니 개체적인 존재로 태어나기 이전부터,
태초 이전부터,
사랑의 삶을 살아왔음을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신에게 의탁하고, 이 세상에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마음이 시키는 자신의 어떠한 노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노력하는 그것,
그것이야말로 신의 의지에 맡기지 아니하고, 자신의 의지에 놀아나는 꼴이며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대들은 신에게 완전히 맡기라는 라마크리슈나의 메시지를 보지 못하였는가?
그러한데도 어찌하여, 신이 아닌 그대의 노력으로 무엇을 얻을 수가 있다고 기대하고 믿고 있는가?
우리 속에 신성이 있다고 하니까,
우리의 깊은 어느 곳에 신성이 있는데,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여서 잠자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
지금도 여전히 잠을 자고, 세수하고, 코가 간지러우면 기침을 하고,
길가다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고, 상한 음식을 먹으면 배가 아파 뒹구는
그 하나하나의 모습이 바로 신성이 살아 움직임을 증거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라는 개체가 태어나고, 또 나라는 개체가 죽어서 사라지는 그 것 역시,
신성이 살아 움직임을 증거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옛 조사님께서
"도를 깨닫기는 세수하다가 코끝을 만지기보다 쉽다"
고 했다.
분별하는 그 마음하나만 돌리면,
이 세상과 우리의 모든 삶이 바로 도임을 안다.
그래서 따로 구할 것이 없다.
따로 구할 것이 없으니,
따로 해야 할 것도 없다.
부디...
마음의 말에 속아서, 나의 노력으로 완전한 자가 되려는 인위적인 헛된 노력을 버리고,
신의 은총으로 세상에 나와 온전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대의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받아 들여 보라.
밑져야 본전이 아닌가?
고통이 정말로 극에 달한 자는 안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뼈를 깎는 노력을 한 자는 안다.
자신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그 노력이 부질없음을 알고(왜냐하면 그 마음이란 놈이 허상인 줄 깨닫기 때문이다),
모든 노력을 던져버린다.
그래서 그는 온전히 신에게 맡긴다.
신에게 맡긴다하니,
신에게 맡기는 어떤 행위를 해야하는 줄 알지 말라,
그냥 모든 인위적인 노력을 그만 두는 것뿐이다.
즉, 분별하는 마음을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러면, 신은 그대에게 애초부터 고통이 없었음을 알게 해준다.
다만 고통이니 행복이니, 선이니 악이니, 잘났느니 못났느니 하는 그 마음의 분별이
고통이라는 것을 낳았음을 알게 해준다.
그때부터 그는,
애초부터 한 번도 목이 마른 적이 없었음을 알고
마셔도 마셔도 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마시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찾은 자이다.
그래도 자신의 노력(분별하는 마음)으로 무엇을 이루려고 한다면,
그는 참으로 교만한 자다.
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자신이 마치 할 수 있는 것처럼 헛된 노력을 하고 있다.
신을 찾고 있는 자는, 신을 기다리고 있는 자는,
그가 신을 찾고 있는 이상 평생을 가도 신을 만나지 못한다.
찾고 있다는 그 자체가 바로 자신은 신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찾는 자는 행복하지 못한 자이며,
사랑을 구하는 자는 자신에게 사랑이 없는 자이며,
또 사랑하려고 하는 자 역시 사랑이 없는 자이며
(사랑이 있는 자는 몸짓 그 자체가 사랑이므로 따로 사랑하려고 하지 않는다. 신과 신의 몸짓인 우리가 하나이듯이..)
신을 찾는 자는 그에게 신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찾는 곳에는 답이 없다.
찾는 자 그가 바로 답인데도, 찾는 자 스스로 자신을 보지 않고 바깥으로만 찾고 있으니 답이 있을 리가 없다.
찾고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바로 없음을 증거하므로.....
이 것은 없어진 물건을 찾는 것이 아니다.
없어진 물건은 찾아야 나오겠지만,
이미 있는데(자신이 바로 그것인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지도 않는 곳에서(바깥에서) 찾고 있는 자는,
자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음을 알지 못하므로,
아니 바로 자신이 바로 그것임을 알지 못하므로,
그 찾는 여행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그는 영원히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리라.
이런 말을 하면,
또 마음이란 놈은 또 하나의 상을 만들어서,
자신 안에 어떤 곳에 그것이 있는 줄 알고 또 찾기 시작한다.
아니다.
자신 안 어떤 곳에 그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대 자체가 바로 그것이다.
그대가 아침에 일어나고, 세수하고,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때론 기뻐도 하고, 슬퍼도 하고, 화도 내고, 칭찬도 하는 그 모든 삶이 바로 그것 자체이다.
찾음을 그만 두라, 그러면, 이미 그대가 바로 답임을 알리라...
그러면,
깨달음, 수행, 실천, 사랑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아침에 일어나고, 세수하고,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때론 기뻐도 하고, 슬퍼도 하고, 화도 내고, 칭찬도 하는 삶!
늘 쓰고 행하는 그대의 모든 삶이 바로 그것 자체임을 알리라.
- 다음글 달마불식(達磨不識)
- 이전글 깨어 있음이란?
댓글목록
없음님의 댓글
어떻게 이렇게 틀림없는 말만 하시는지 신기방기 합니다.
아마도 바른생활이 몸에 밖한듯 합니다.
코미디언이 말했듯이 "어쩔 수가 없어"^&^
삐카님의 댓글
항상 도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