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감동(感動과 희열(喜悅)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3,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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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영화를 보거나 연극을 보거나 또는 티브이에서 드라마를 볼 때에
그러한 매체를 통해서 느끼는 감정이 보통 두 가지인 것 같다.
감동(感動)과 희열(喜悅)...
물론 분노와 두려움과 불안감등도 호러나, 스릴러, 서스펜스 등도 있겠지만 공영방송(公營放送)의 한계적 상황 때문에, 그러한 내용을 방송했던 말든 어떻든 간에 결과적으로 시청자(視聽者)에게 주는 것(앤딩)의 대부분의 느낌이 감동 아니면 희열인 것 같다.(긍정적 느낌을 주는 것)
이 글에서 이렇게 서두를 잡는 것은 드라마의 어떤 연출이나 극적인 어떤 상황을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감동과 희열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어서 이런 이야기를 시쳇말로 허접스럽게 실마리를 잡았다.
감동(感動)... 그리고 희열(喜悅)..
내가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이 두 단어에 대한 정확한 개념은 이야기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의 느낌을 그냥 이야기 한다.
감동, 그리고 희열....
난,
감동(感動)은 내면적(內面的) 만남이고 희열(喜悅)은 외면적(外面的) 만남이라고 내 나름대로 생각이 들어서 이런 이야기를 시작한다.
난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그래서 내가 대학을 다닐 때에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림에도 무엇인가 철학(哲學)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는데 선배님한테 미학(美學)이라는 학문이 있다는 것을 듣고 미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나름대로 궁금해 하고 있었지만 미술과에 미학이라는 과목이 없어서 궁금증만 키우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2학년 때에 마침 철학과에 미학이라는 과목(科目)이 개설되었다는 말을 듣고, 철학과의 미학과목을 청강(聽講)을 한 적이 있었는데 미학강의 자료가 ‘칼 야스퍼스의 미학’이었고 다행하게도 그 과목을 강의하신 교수님께서 나의 학문적인 열정(?)에 청강(聽講)을 흔쾌히 받아주시는 덕분에 그 과목(科目)을 잘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내 머리가 아주 나쁜 바람에 그 교수님께는 정말로 죄송한 이야기지만 미학의 큰 뜻은 이해를 못하고 지금까지 기억에 남은 한 가지가 미(美)에 대한 구분에서 장엄미와 우아미라고 구분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장엄미(莊嚴美) : 씩씩하고 엄숙함, 슬픔 등, 즉, 존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감정들을 내면으로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감내하는 아름다움
우아미(優雅美) : 아름답고 단아함, 즉, 존재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아름다움을 바깥으로 들어내는 아름다움
감동(感動)과 희열(喜悅)....
나는 감동은 (순전히 내 감동이지만) 내면적(內面的)으로 마음을 움직여서 자신의 가치관(價値觀)을 바꿀 만큼 큰 영향이 오는 것을 감동이고
그리고 희열은, 물론 마음은 움직이지만, 자신의 가치관을 바꿀 만큼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과 맞아떨어져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라고 본다.
미켈란젤로가 성모마리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려서 안고 있는 모습을 조각으로 만든 작품이 있는데 그 제목이 바로 “피에타(Pieta)” 이다.
피에타란 우리말로 '대자비' 이다. 대자비는 한자말로 '大慈悲'인데 '슬픔에 대한 큰 사랑' 또는 '큰 사랑이 가진 슬픔' 이라는 뜻이다. 전 이 둘 중에 '슬픔에 대한 큰 사랑'이라고 본다.
'자비'라는 말의 뜻이 '사랑하기에 슬프다.'는 의미이다. 거꾸로 '슬픈 자를 사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쁘고 즐거운 것에서는 희열을 느끼고, 슬픔을 담고 있는 것에는 감동을 느낀다. 그리고 특히 그러한 것을 감내할 때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동을 느낀다.
그래서 지구의 가장 으뜸가는 성인이지만,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죽은 아들을 안고 안으로 슬픔을 감내하는 ‘피에타’는 누구나 감동을 느끼는 작품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즐겁고 기쁜 상황(영화나 연극이나 드라마, 그리고 세상살이에서)보다 슬픈 상황에서 감동을 느낄까?
내가 생각건대 그 이유는 모든 존재들이 기쁨을 구하고 있지만 또 그러한 상황들이 있어서 기뻐하고 즐겁게 살아가지만, 삶의 대부분이 슬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삶을 보면서 공감을 깊게 느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슬프다는 것은 조금 각색된 것이다. 각색되었다는 것은,
삶의 대부분이 힘드니까, 그 힘들어하는 것을 볼 때에 저나 나나 마음이 같이 슬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힘듦이 슬픔으로 각색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실 힘들기에 슬프다.
그래서 슬픔에서 감동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우아미보다는 장엄미가 더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恨)이 많은 한국인에게만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니라, 서양인인 칼 야스퍼스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양인인 미켈란젤로도 역시 그러한 조각을 만들었고 그것을 감상하는 서양인들 역시 그것을 명작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는 동서양을 떠나 그렇게, 다 그렇게 슬프게 살아가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무리 행복을 찾고,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즐거움을 찾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언젠가는 사라질 슬픈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바로 그러한 존재들이다. 아무리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우아해도 결국에는 슬픈 존재라는 것이다.
왜 그렇겠는가? 왜?
그것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한계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쁜 삶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실 죽은 자는 아무런 느낌이 없다. 살아 있는 자들이 방금 자신의 옆에 있는 자가 사라지고 없으니까, 죽고 나니 아무 것도 아니고 너무 허망해보이니까 스스로를 반추해서 느끼는 것이 슬픔이다.
물론 그렇게 느끼는 우리 역시 정작 죽은 자가 되면, 그러한 슬픔이니 외로움도 못 느낄지는 죽어보지 않아서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가 되지 못한 우리는 살아있는 자이니까 그렇게 죽어가는 자들을 보면서
자신도 언젠가는 자신의 바람은 하늘과 같이 높고 많지만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에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다,
물론 일체가 한 법임을 깨닫고 나면 생사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기 존재에 대한 한계때문에 슬픔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고 같이 생활하는 존재들이
그러한 것을 느끼고 살아가는 자들이니까,
서로가 그러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감동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때에 큰 철학자였던 '칼 야스퍼스'가 '장엄미'를 크게 보았던 것도 여기에 있고,
예수님이나, 부처님의 사랑을 자비(慈悲)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그래도 그러한 삶을 묵묵히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그러한 삶을 예수님이나 부처님 역시 같이 살아가셨기 때문에
그러한 자비심이 나오는 것이다.
다만,
그분들은 생사가 아닌 이 한 법의 인연의 모양으로 삶을 깨달으셨기 때문에 자유로워지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힘 드는 것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비록 깨닫지 못한 그런 힘듦에서도 서로를 보듬고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에서 감동의 슬픔을 느낀다.
그리고 예수님과 부처님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서 자유로워지셨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비록 감동은 느끼지만 온전히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모습이 더 안타까우니
슬픈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나오시는 것이다.
그래서 ‘자비(慈悲)’라는 단어가 생기게 된 것이고....
하지만,
그 분들이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분들이 무엇 때문에 슬퍼하시겠는가?
그분들이 안타깝게 여기는 그러한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 한 하늘아래 같이 호흡하며 살을 맞대고 살아가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그분들이 슬픈 마음을 내겠는가?
힘들든, 고통 받든, 슬프든 괴롭건 살아있기에 감동이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기에 감동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나 부처님, 그리고 그동안 존재하고 했던 모든 성인들의 관심은
죽은 이들에게 있지 않다.
살아있는 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슬픔과 자비를 느끼는 것이다.
살아있는 자들은 크고 작던 간에 한계성에서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라는 것.....
그 토록 무엇인가 갈구하고 찾아 헤매면서
무엇인가 이루려고, 아니면 이름을 남기려고 또는 가치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다가
결국에는 모든 것을 다 놓은 채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떠날 수밖에 없는 우리들...
그러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그 욕심을 놓지 못하고
희열을 찾아 마냥 정처 없이 다니는 그들을 보는 그 안타까움.....
그 찾아다님에서 비록 희열을 느꼈다고 하더라도, 연극처럼 막이 내리고 돌아오는 그 허허로움과 두려움과 불안감과 나아가 비뚤어지기까지 하는 그 가벼운 마음의 허망함을 느끼는 그들...
그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아마... 님들도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드라마로 보면 비슷한 감정을 느끼실 것이다.)
하지만,
그분들은 우리와 다르게 슬픔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랑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비라고 한다.
자비 : 자(慈 : 사랑 자) 비(悲 : 슬플 비)
그 분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의 아픔이 모든 이들에게 있음을 알고 모든 이들의 아픔을 당신의 아픔처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에게 자비가 있은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감동이든 희열이든 살아있는 자에게 적용되고 필요한 것이다
살아있는 자가 누구인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님들이 바로 그 자요,
이 글을 읽으면서 자신에게 아픔을 준 사람을 떠올릴 때에 떠오른 그 사람이 바로 그 자요.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바로 그자다.
그리고 매순간 우리 안에서 시시 때때로 일어나는 모든 감정과 생각들이 바로 살아있는 자들이다.
그들이 우리와의 관계에서 미운 사람도 있고 고운 사람도 있지만, 그 모든 살아있는 사람들이 다 슬픈 존재들이다.
그들이 우리 안에 있든 우리 바깥에 있든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희열을 느끼든 감동을 느끼든
그것은 우리의 자유다.
다만 우리는 옳고 그름을 떠나 그러한 것들을 볼 때 거의 예외없이 감동하는 자라는 것이다.
희열은 사랑이 없어도 가능할지 모르지만 감동은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내가 필요해서, 내가 견디지 못해서 사랑하는 것은 희열을 추구하는 것이지
감동이 아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내 옆에서 살아 숨쉬기 때문에 또 그가 아름답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감동을 느끼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다.
아주 오래된 드라마지만,
'SBS' 에서 하는 드라마 '토지'에서 '길상'이가 이런 말을 했다.
(물론 길상이가 한 말이 아니고. 작가가 했지만.^^)
“이 일을 하다보면 사람에게 절망합니다. 하지만, 절망을 이길 희망 또한 사람에게 있어요.”
사랑하는 나의 님들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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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조나단님의 댓글
잘 봤습니다.
설연휴 잘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