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진시황(秦始皇)과 맹강(孟姜)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3,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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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맹강여전(孟姜女專)이라고 당나라 때에 형성된 전설이 있다.
맹강(孟姜)은 맏 맹(孟)자에 성씨 강(姜)이 합한 글자로 맹씨 집안의 맏딸이라는 뜻이다.
지금 말하는 진시황과 맹강이 바로 맹강여전(孟姜女專)의 이야기이다.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때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았다.
진나라 법에 만리장성을 쌓는 노역(勞役)에 진나라 백성들의 한 가족에서 한 사람만 노역에 종사하고 그 종사기간도 30일을 넘지 못하게 했다.
시황제(始皇帝)는 자신의 나라의 인력(人力)으로 볼 때 그러한 법만으로 충분할 줄 알았다. 그래서 장성이 축조되는 진행을 보면서 계속 장성을 쌓아 나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장성의 규모가 어마어마했었기에 법으로 정해져있는 기간의 노역만으로는 인원이 충당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관리들은 시황제의 법보다는 시황제의 바람이 두려워 법을 어기면서까지 백성들의 노역기간을 늘리고 노역인원도 한집에 한 사람이 아니라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노역장(勞役場)으로 끌고 가서 일을 시켰다.
그래서 한 사람이 몇 년씩이나 노역을 하면서도 집에 돌아가지 못했고, 또 한 집에 삼대(아버지, 아들, 손자)가 함께 노역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맹강(孟姜)은 그러한 노역에 끌려간 남편 범기량(范杞梁)의 아내였다.
맹강은 몇 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서 남편에게 줄 솜옷 한 벌을 등에 지고 몇 천리나 되는 길을 떠나 장성을 향해 길을 떠났다.
맹강은 장성에 도착하여도 남편을 찾지 못해 장성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샅샅이 찾아갔건만 끝내 남편 범기량을 만나지 못했다.
결국 남편을 찾지 못하고 실의에 빠진 맹강은 장성의 끝에서 장성축조의 상태를 보려 순수(巡狩)나온 시황제와 마주쳤다.
시황제는 이미 이전에 우연하게 맹강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녀를 만났을 땐 이미 그녀의 남편인 범기량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시황제는 자신이 만난 여인이 맹강이라는 것을 알고 그녀에게 물었다.
“너는 여기에 왜 왔느냐?”
“저는 노역을 나간 남편을 찾아 왔습니다.”
시황제는 이미 범기량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다시 물었다.
“만일 내가 너에게 찾지 말고 돌아가라고 하면 돌아가겠느냐?”
그녀는 대답했다.
“남편은 내 생명과 같으니 그를 찾지 못하면 나는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시황제는 다시 말했다.
“너는 이미 장성의 끝까지 왔다. 이제는 어떻게 할 것이냐?”
“여기서도 만나지 못하면 다시 저쪽 끝까지 가야지요.”
그러자, 시황제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너는 그곳에 가도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의아한 눈으로 보는 그녀에게 다시 말했다.
“너의 남편 범기량은 이미 죽었다고 들었다.”
“그럼 저는 이제 살 이유가 없습니다.”
돌아서면서 맹강은 물었다.
“황상(皇上)은 왜 장성을 쌓습니까?”
“진나라를 위해서다. 장성(長成)이 있고 도로가 통일(統一)되면 나라가 분열이 되지 않고 안전하게 될 것이다.”
그러자 맹강은 말했다.
“황상이 쌓고자한 장성 때문에 저는 남편과 분리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장성 아래로 몸을 던졌다.
일설(一說)에 그녀가 몸을 던졌을 때에 맹강의 한이 서렸는지 그 자리의 장성도 함께 무너졌다고 한다.
시황제는 그녀의 시신을 신하들에게 따뜻하게 묻어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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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각자의 이유로 각자가 다른 생각으로 각자의 가치(價値)를 가지고 그곳을 향해 나아간다.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로 서로 반목(反目)하고 대립(對立)하고 싸우기도 하고 또는 같은 생각을 가졌다고 사랑하고 살아간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하지만, 이 우주에 인구, 아니 지구의 모든 강과 바닷가의 모래만큼이나 많은 세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많은 세상과 그 세상에 사는 어떤 존재도 이 한 법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사람들이 만약 자신이 바로 법이요, 우리가 사는 이 우주 삼라만상 역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법 그 자체요, 또 하나임을 안다면 따로 더 욕심을 낼 것도 없고 더 나은 무엇을 위해 나아갈 곳이 없다.
시황제(始皇帝)는 장성(長成)을 축조(築造) 할 필요도 없고, 남편을 아내에게서 떼어낼 필요도 없었으며 맹강은 남편을 찾아 그렇게 정처 없이 헤매며 고생을 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따로 어떤 평화와 안녕도 찾을 필요도 없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세계에 살든 우리는 모든 것이 갖추어져 티끌만큼도 부족함이 없는 평화와 안녕이 넘치는 이 한 법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 곳이 지옥이든 천상의 세계든 스스로 자신이 법임을 안다면 그 순간 그 곳에는 지옥과 천상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존재하는 일체처(一切處)요 법의 바다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헛된 구함에 속아 의식의 진동을 높여 비록 육신을 가지고 다른 단계로 나아간다 하더라도 그 곳 역시 법(法)의 손바닥 안이다. 물론 그러한 곳은 있지도 않지만 말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다. 그리고 완전한 존재이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인간들은 스스로 자신을 믿지 못하는 이유로 나그네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하고 자신을 보호할 무엇을 만들어야 한다.
지옥이면 지옥에서, 세간이면 세간에서, 또 천상이면 천상에서,
그것의 상황이 아름답든 추하든...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법이라 하더라도 이미 우리는 꿈과 같은 잠시지만 이곳에 태어나 이곳에서 산다. 그리고 비록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이곳이 꿈일지라도 우리의 오온(五蘊 : 몸과 생각)이 이곳의 상황에 맞는 옷을 입고 태어났다.
그러니 여기를 버리고 어디로 가랴? 또 어디로 간들 그곳이 법 아닌 세계랴?
생각의 차이.....
맹강과 진시황제의 생각의 차이....
그들이 만약 스스로 법임을 안다면 그러한 생각의 차이가 일어날 것인가?
또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서로의 것을 배척하고 자신의 것만 고집할 것인가?
죽은 맹강을 보는 시황제의 마음이 아팠다.
그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勸力)을 가진 중국(中國) 최초(最初)의 통일(統一) 황제(皇帝)였지만, 자신의 왕국(王國)의 권력(勸力)에 비해 아무것도 아닌 한 아낙의 죽음 앞에서 한 인간으로 마음이 아팠다.
이 순간 그는 잠시나마 자신의 꿈도 야망도 사라지고 그녀의 죽음이 아팠던 것이다.
그래서 천하의 황제가 이름 없는 촌부(村婦)인 맹강에게 마음서린 대화를 했고 그녀가 죽었을 때에 아랫사람을 시켜서 따뜻하게 묻어주라고 했다.
그것이 바로 사랑하는 마음이요, 그 사랑의 바탕에는 우리가 한 법(法)이라는 하나의 본성(本姓)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마음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이다.
그런 우리가 언제부터인가 있지도 않는 어떤 곳을 찾아 떠나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그러한 마음을 잊어 버렸다. 시황제 역시 그러하였다.
하지만, 시황제(始皇帝)도 자신 속에 내재하는 한 법의 씨앗으로 맹강(孟姜)을 만나 잠시 사랑의 마음을 일으킨 것이다. 물론 그리곤 또 다시 자신의 관념 속으로 들어 가버렸지만....
매 순간 존재하는 당신이 바로 진실이요 법이다. 또 그렇게 매 순간 존재하는 당신의 주위가 바로 진실이요 법이다.
내가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주를 횡단하고, 빛의 속도로 우리의 의식을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그리고 여기라고해서 법이 떠난 곳이 아니다.
우리가 그러한 경지(境地)를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법임을 부인(否認)할 수가 없다.
서방 극락정토가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있는 여기가 바로 서방극락정토이다. 우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매순간 지금 여기가 바로 그 곳이요 나와 함께 삼라만상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그 자리가 바로 그곳이다.
누가 말했다.
"물론, 이러한 세계도 우리의 본래 모습에 비하면 한낮 미망의 세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법을 구하고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말하는 참 좋은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연의 변화에 어떤 옷을 입던 그것은 중요하지 않고 또 우리가 어떤 옷을 입고 있든 우리의 본래 모습을 단 한 번도 여읜 적이 없는 법과 하나다.
그래서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의 본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따로 생각하거나 말한다면 그는 법이 무엇인지 불성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또한 법도 아니고 불성도 아니다.
우리는 단 한 번도 법, 불성을 떠난 적이 없고 우리의 지금 이대로 이 모습이 바로 법이요 본래모습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본래모습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만 그러한 모습을 지닌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그러한 모습을 가지고 있고, 그 삼라만상의 다양한 모습이 모두 하나인 법의 자리에서 나왔고, 그것이 곧 법 그 자체다.
나는 나를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떠날 수 없기 때문에 만약 내 속에 내가 보이면 그것은 이미 내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만약 우리의 본래모습, 즉 법, 불성이 따로 보인다면 그것을 보는 자나 본래모습 중 하나는 가짜이거나 아니면 둘 다 가짜요, 헛된 망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법이요 불성 그 자체이지 법을 보고 불성을 보는 자가 아니요, 법과 불성도 우리에게 보이는 대상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분명해지면 지옥이니, 천상이니, 우주 넘어니.... 그리고 도(道)니 법(法)이니 불성(佛性)이니 하는 것까지도 결국에는 우리의 관념(觀念)이 만들어낸 하나의 헛된 꿈일 뿐이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매순간 이 모습과 이 자리가 바로 참된 우리요, 바로 우리의 삶터요, 진실이요, 법임을 알고 늘 자유와 평화와 사랑 속에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드러난 형상(形相)과 생각이 다할 때까지 이 속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모습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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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반야지님의 댓글
선생님. 추운데 잘 계시죠? 오래만에 글 올려주셨네요. 법비가 자주자주 내리기를..^^^
윤기붕님의 댓글
앞으로 자주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반야지님도 추운데 건강하시길~^^
난야님의 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