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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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空)과 무(無)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2,078

20-03-24 20:49

본문

공(空)은 공(空)마저 공(空)해야 진정한 공(空)이고, 

무(無)는 없음(無)마저 없어야(無) 진정한 무(無)다. 

 

공은 마냥 텅 비어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 있다고 해서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있다고 여기는 모든 것이 잡으려 하는 순간 변해버려 

원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없어 있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있지만 없고 없지만 있는 것으로, 그것은 연기법(緣起法)에 의해 세상만법이 끊임없이 변하며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있다는 것은, 있지만 있다 할 것이 없는 있음이고,

없다는 것은, 없지만 없다 할 것이 없는 없음이다.

 

이것을 아주 적적하게 말한 것이 바로 반야심경이다.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

즉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아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라는 것이다.

 

공을 다른 표현으로 하는 것이 무(無)라는 것이다.

그래서 공과 무는 표현상의 차이일 뿐 다름이 없어 반야심경의 이 말을 무와 유로 표현하면

“모양 있는 것(有)은 모양 없는 것(無)과 다르지 않고 모양 없는 것과 모양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아, 모양 있는 것이 곧 모양 없는 것이요, 모양 없는 것이 곧 모양 있는 것이다.”

라고 표현이 된다.

 

우리는 공이니 무니 하는 말에서 옳고 그름이 없고, 양변이 없다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공과 색의 관계를 분명히 안 뒤의 알게 되는 것이고,

이 공부에서 말하는 공과 색, 무와 유는 앞에서 말하는 것처럼 있지만 없고, 없지만 있는 것을 말함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새벽별을 보고 깨달은 우주의 원리로, 우리가 연기법(緣起法)이라고 칭하는 그 법칙과 작용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 우주는 이 연기법에 의해 생기고 변하고 흩어지고, 그 흩어진 것이 다시 다른 인연으로 모여 생기고 변해가는 것이어서 어떤 것도, 어떤 순간도 정해진 모양이 있거나 머무는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모양을 만들면서 변해간다.

 

또 이 모양이라는 것도 보는 존재의 시각에 따라 달라진다.

즉 같은 물건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보는 물건과 새가 보는 물건, 또 벌레가 보는 물건, 세균이 보는 물건의 형태가 다 다른 것이다.

그리고 같은 물건이라 하는 것도 동물에게는 하나의 물체로 보일지 몰라도 식물의 촉수나, 세균의 감각에서는 무수히 나누어진 것들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무엇이라 이름 붙일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다만 인간은 같은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으니 서로 공통으로 느끼는 것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 세상 만법의 이름일 뿐, 이 만법이 본래부터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으면 공과 색, 무와 유가 무슨 의미인지를 알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우리의 감각기관의 살림살이 안에서 보고 듣고 느끼며 그것의 진실을 보려는 것이기 때문에, 반야심경에서 그렇게 표현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이라 하더라도 실제로는 분명히 뭔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 한 법(不二法), 불성(佛性), 자성(自性), 진여(眞如), 도(道) 등으로 부르는 무엇이다.

 

왜 무엇이라 하는가? 그것은 모양은 없고 오직 법칙과 작용만 있기 때문이다.

아니 더 엄밀하게 말하면 그 자체의 모양은 없고 오직 법칙과 작용으로 생겨나는, 매순간 변하는 모양으로만 자신(法))이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법이 그런 방법으로 세상에 드러내는 것을 일러 우리는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연기법은 이 우주를 움직이는 법칙과 작용일 뿐인데, 그것이 어떻게 근본 본성이 되느냐?’

고 부정적으로 되묻는 사람이 많다.

 

삼신불(三身佛)은 하나다.

즉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이 하나로, 본성, 또는 본체의 이름인 법신과, 그것의 행위인 보신, 그리고 그 행위로 드러나는 세상만물의 낱낱인 화신이 모두 하나의 몸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법신은 모양도 기미도 없기 때문에 무엇이라 말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의 작용과 그 작용의 원리, 즉 법칙으로 그것을 감지할 뿐이고, 그 작용과 법칙은 이 세상에 드러난 것들이 인연으로 변해가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작용과 법칙에 연기(緣起)라는 이름 붙이고는 법(法)이라는 이름도 함께 붙인 것이 연기법(緣起法)이다.

 

법이 이와 같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고 나누면 이미 이 법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내가 말하는 행위가 낱낱이 다르지만 그 어느 것 하나 나 아님이 없듯이, 세상에 드러난 만법들이 낱낱이 그 인연으로 다른 모양을 띠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이 법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공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하게 법신이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공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으로 그것을 공이니 색이니 무니 유니 하고 규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규정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그렇게 규정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 기준은 그 실체를 보아야만 기준이 옳음을 알 수 있는 것으로, 우리는 그것을 감지(感知)하는 것 자체를 할 수 없으면 어떤 규정도 마련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공이니 색이니, 무니 유니 하고 논해봐야 그것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밖에 안 된다.

 

그런 논의가 우리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래서 우리가 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감지하기 때문에 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이 사실은 지금 우리가 이렇게 글을 쓰고 그것을 읽고 또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그것을 하거나 하게 하는 뭔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설명이 된다.

 

즉 나라는 존재가 말하고 행하고 생각 하면서도 정작 그렇게 하는 그것은 아무도 모르지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그렇게 하는 무엇이 우리 속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임을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나 하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움직이고, 동물 식물, 그리고 계절의 순환과 별과 달이 늘 저렇게 규칙적으로 뜨고 지는 것 등을 보면서 이 우주의 근본이 분명히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을 공식적으로 처음 밝히신 분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신 것이다.

 

즉 고행으로는 절대로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모든 고행을 내려놓고는 니란자라 강에서 목욕을 하고, 또 수자타가 공양한 우유죽을 먹고는 보리수아래 앉아 있다가 새벽별을 보고 문득, 매일 같이 저렇게 규칙적으로 뜨는 것은 세상에 분명히 뭔가는 모르지만 한결같고 분명한 법칙과 작용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칠일 밤낮을 사유하시며 모든 진리를 꿰뚫어 파악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연기법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법경에서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요 또한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법계는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다.”

라고 하시며,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라고 하신 것이다.

 

이처럼, 도대체 뭔지 모르지만 이 우주를 움직이는 무엇이 있다는 것에서는 부처님처럼 가끔 깨닫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왜? 직접 그 모양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고, 직접 모양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이 법신은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름이야 붙일 수는 있어 불성(佛性), 자성(自性), 진아(眞我) 등으로 붙이고,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으로 부르지만 정작 그 실체는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것이어서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의 법칙과 작용과 그것으로 드러난 세상만법을 통해 알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을 바라제존자는 이견왕을 만나

“불성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 말에

“작용하는 데 있다.”

고 했고, 그것이 우리의 몸과 눈, 코, 귀, 입 등에서 작용할 때의 공용(功用)과 세상만법에서의 작용을 말했을 뿐, 그것에 대한 실제 모양에 대해서는 어떤 묘사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 약산이 그냥 앉아 있을 때 대우선사가 뭣하냐고 물을 때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는데, 그 말에 대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한가롭겠구나.”

라고 되물으니

“한가롭다면 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고, 그러자 대우가 다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것이 무엇이냐?”

라고 물으니

“천성인(千聖人)이 와도 모릅니다.”

라고 하였으며,

 

달마조사와 양무제의 대화에서도 양무제가 달마와 대화를 하다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자, 약간 화가 나서 묻기를

“내 앞에 앉아 있는 그대는 누구요?”

라고 하니 달마조사가 대답하기를

“나도 모르오.(不識)”

라고 대답한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달마불식(達磨不識)인데, 달마조사가 모른다는 것은 자신이 여기에 있게 하고, 또 그렇게 양무제와 대화를 하게 하는 법칙과 작용의 근원인 이 한 법의 본체 즉 법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성, 자성, 하느님, 진아 진여 등등으로 불리는 이 법신은 법칙과 작용과 그것으로 드러난 것들이 없으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모습을 감출 수 있는 사람이 만약 우리 곁에 있다면, 우리가 그가 있음을 알려면 그가 움직여야 하고 우리는 그의 움직임으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 그를 알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이 한 법 법신(法身)도 그 움직임의 법칙과 작용인 보신(報身)으로 한 법의 모양인 화신인 세상만법을 드러내어 우리가 그것과 함께할 수 있게 하므로 그것을 총칭하여 연기법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나라는 것 자체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지만 매순간의 나의 행위로 나를 알 듯이 그것과 나의 행위가 둘이 아닌 하나인 것처럼, 법신과 보신과 화신이 역시 한 몸이므로 ‘연기법’을 일러 ‘이 한 법’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두 이름일 뿐이니, 그렇게 알아들으면 될 뿐 이름을 가지고 시비하지 말라.

 

어쨌든 실제로 윤기붕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윤기붕의 용모와 말버릇, 또는 행동하는 버릇 등을 통해서 알 수 있지,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상태에서 이름만 듣고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아무도 윤기붕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세상에 존재하며 형체를 가진 사람도 우리가 보지 못하면 그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없는데, 형체도 없는 이 하나가 오직 법칙과 작용으로만 세상에 드러나는데 어찌 우리가 그것을 직접 보거나 알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법, 또는 도, 즉 법신을 직접 보려는 사람은 반드시 이 점을 명심하고, 그러한 생각이 망상임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이 법신은 절대로 직접 볼 수도 느낄 수도 없고 단지 그 법칙과 작용을 통해서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법칙과 작용은 이름 붙인 사람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엄정하게 적용이 되고, 또 그것의 적용을 받지 않는 것이 없다.

그래서 법칙 자체가 사사로움이 없고, 또 그 사사로움이 없는 법칙을 작용으로 생기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어, 이 세상에는 그것을 떠난 것은 없기 때문에, 그 법칙의 이름을 연기법이라 하며 감히 본성을 대신하는 것으로 칭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법을 공부하면서 말하는 공(空)과 무(無)는 그것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드러난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을 말하고 있고, 우리가 누구를 안다는 것은 그의 성격과 용모를 알고 안다고 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을 통해 이 법을 아는 것이니,

이 법의 법칙과 작용이 공과 무이므로 이 법이 역시 공과 무이며, 이 공과 무는 공하기만한 공이 아니고 무이기만 한 무가 아니라, 만법이라는 현상으로 드러나 공과 현상이 끊임없이 교차하면서 흘러가니,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공이니 무니 한다고 해서 늘 공한 것은 공하고 없는 것은 늘 없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세상만법이 이 법칙과 작용은 연기의 원리로 서로 인연이 되어 공이라 하는 순간에 공 아닌 모양이 되고, 공 아닌 모양이 되었다 하는 순간에 그 모양은 다시 사라져 공이 되는 이런 상태가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니, 반야심경에서는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양이 사라져 공이 된다는 것은 표현일 뿐, 사라져 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양이라 하는 순간 다른 모양이 되기 때문에 앞의 모양의 입장에서 볼 때 공이어서 공이라 하는 것일 뿐 실제로는 단 한 번도 공일 수가 없다.

그리고 모양도 마찬가지로 모양이 있다 하는 순간 변해버리니 단 한 번도 모양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공에 집착해도 망상이고, 색에 집착해도 망상이라 하는 것이니 그것을 반야심경에서 색불이공 공불이색 등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이 법의 공과 무는 절대로 공과 무와 함께 하지 않고 색과 유 역시 색과 유와 함께 하지 않는다. 즉 공은 색과 함께 하고 무는 유와 함께 하는 것으로 절대로 영원히 공한 무기공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색과 공이란,

색은 인연만 되면 그것에 응하여 드러나니 색이라 하고,

공은 그러면서도 잠시도 머물지 않아 자취가 없기 때문에 공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머물지 않아 공(空)이라 하고, 그 머물지 않는 것이 끊임없이 인연에 응하여 모양으로 드러나니 색(色)이라 하니, 이 법의 공은 공도 공(空)하고 무(無)라는 것조차도 무(無)하기 때문에, 또한 공(空)이라 하고 무(無)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공이니 무니 하는 것은 머물지 않는 이 법칙과 작용의 특성 때문에 붙이는 이름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왜 이런 말을 중요하게 말하는가?

 

머물지 않는 이 법칙과 작용으로 세상만법이 생겨나, 그 법칙과 작용으로 살아가듯 우리 역시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이고, 그런 삶에서 이 법칙과 작용을 알아 모든 것이 본래 그렇다는 사실을 알아야 망상에 빠지지 않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으며 바르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 법칙과 작용을 알아 우리가 본래 그러함을 알면 마음에서 쓸데없는 망상이 없어지고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으로 함께 흘러가게 되므로 늘 마음이 한가로워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세상은 이 법칙과 작용이 그러하듯 어떤 것도 머무는 것이 없고, 고정된 모양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 역시 절대로 머물지 않는다.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면 세상에서 일어난 어떤 일에도 집착하거나 시비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으로 살아가며 우리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기생하여 살아가는 이 생각이란 놈은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생각에 기대어 세상을 보지 않는다.

이것을 일러 ‘깨달은 눈으로 본다.’라고 하는 것이다.

 

사족(蛇足)을 붙이면 무기공(無記空)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에 빠진다는 것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다.

 

이 한 법이 이러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무념(無念)이라 하면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라 착각하고는 텅 빈 생각으로 앉아 있게 되는데 이것을 일러 무기공이라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무념이라는 것이 생각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망상심(妄想心)이 없는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주혜해스님은 누가 무념에 대해 물으니

“무념은 삿된 생각이 없는 것이지 바른 생각마저 없는 것이 아니다.”

한 것이다.

바른 생각은 이 둘을 알아 모든 것이 이 한 법의 연기법의 발현일 뿐 법아님이 없으므로 일체에서 시비분별이 떨어진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삿된 생각인 망상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텅 비어지지 않는 머리를 텅 비우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생각이 인연을 지어 만들어낸 모양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그것에 좋다 나쁘다 하는 모양을 짓는 것이 그것이다.

즉 공(空)에 집착하는 망상과 색(色)에 집착하는 망상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망상심은 이 법을 양변으로 나누어 한 쪽만 취하여 생긴 것으로, 실재의 이 세상은 법칙과 작용이 그러할 뿐 공도 없고 색도 없어 양변이 없으므로 망상이라 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자신의 앎과 세상을 고집하지 않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요, 깨달은 그 마음은 곧 망상심이 없는 무념의 상태요, 반야심경의 말처럼 공과 색, 그리고 무와 유의 의미를 아는 마음이다.

 

 

 

 

댓글목록

진천현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저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