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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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객미분(主客未分)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3,100

20-03-23 11:16

본문

어떤 사람이 선사에게 물었다. 

“스님께서는 도를 보십니까?”

“본다.”

“그런데 저는 왜 못 봅니까?”

“그것은 네가 있어서 그렇다.”

“그러면 스님께서 제게 보여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너만 있어도 그런데 나까지 있으면 무엇이 보이겠느냐?”

그러자 그 사람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제가 없으면 보이겠습니까?”

“네가 없으면 누가 보느냐?”

 

이 글을 볼 때에,

 

처음엔

도를 보려는데 나라는 것이 있어서 못 본다고 하였다.

그리곤, 뒤에서 ‘그러면 내가 없으면 보이겠느냐.’고 묻는 말에 오히려 ‘네가 없으면 누가 보느냐?’라고 한다.

 

여기서 선사는 ‘본다. 안 본다.’라는 양변이 없는 사람이고 묻는 사람은 ‘본다. 안 본다’는 양변을 쥐고 묻고 있다.

 

양변이 없다는 것은 온통 그것일 때 양변이 사라진다.

하지만 질문자는 도라는 것이 따로 있고, 도 아닌 것이 또 있다는 양변을 쥐고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러니 선사가 온통 그것이라는 의미로 ‘도를 본다.’라고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한다.

 

주객미분(主客未分), 또는 물아일체(物我一體)라는 것은 일체가 모두 한 법이어서 둘이 없다는 말이다.

둘이 없다는 것은 세상 가운데 어떤 것이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이 법계가 온통 그것밖에 없다는 말이다.

즉 여기에는 하나, 둘 등의 숫자가 붙는 자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늘 상대와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온통 하나라는 개념이 상당히 부족하다.

그래서 이 말을 금방 이해하거나 익숙해지기가 참으로 어렵다.

 

온통 하나, 또는 오직 하나라는 말은 그것 이외에는 이 세상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세상이 있고 세상에 그것 하나만 있구나.’

아니면

‘세상에 저런 종류는 그것밖에 없구나.’

라고 생각한다.

 

그런 뜻이 아니라,

세상이 하나이고, 그 세상의 내용도 하나라는 말이다.

즉 하나가 있는데 그 하나가 세상이고 내용이라는 말이다.

좀 더 서술하면 안과 밖이 없는 오직 그것이고 온통 하나라는 말로, 이것을 떠난 세상이 없고 또 이것 아닌 다른 세상이라는 것도 따로 없어, 이 하나가 바로 모든 세상이고 모든 세상이 바로 이 하나이고, 또 이 하나가 곧 안이요 이 하나가 또한 밖이어서 안과 밖이 없는, 오직 그것뿐인 하나요, 온통 그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말에도 사실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종교마다 세 가지를 이야기한다.

대표적인 종교인 불교와 기독교(구교와 개신교를 포함)에서도 같은 뜻의 세 가지인데,

불교는 삼신불(三身佛)이라 하여, 근본본성인 법신불(法身佛)과, 본성이 세상을 내고 움직이는 작용인 보신불(報身佛), 그리고 그 본성이 드러난 모양들인 화신불(化身佛)로 나누고,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三位一體)라 하여 근본본성을 성부(聖父)라 하고, 역시 본성이 세상을 내고 작용하는 성신(聖神 개신교에서는 성령 聖靈이라 함), 그리고 그 본성이 드러난 모양을 지칭하는 성자(聖子)로 나눈다.

 

다만 기독교에서는 불교보다 더 종교적인 색체가 강해서 성자는 오직 예수 한 사람이라 하지만, 성경의 뜻을 분명하게 알면, 이 세상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다 이 근본본성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것을 안다.

다만 기독교는 인간 이외의 것에는 하느님의 숨결을 불어넣지 않기 때문에 인간 이외의 것은 하느님의 자식이 아니고, 또 인간도 예수님만 독자(獨子)라 하여 나머지 인간들은 예수와는 차별을 이룬다.

 

사실 이런 관점은 불교에서도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우리는 다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그렇게 가르치는 스님도 많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한 법을 종교별로 세간과 인간의 관점에서 나눈 것이 삼신불이요, 삼위일체이다.

그런데,

종교가 다른데도 왜 이렇게 비슷하게 나눌까?

그것은 인간의 속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내가 법회에서 자주 예를 들지만,

우리는 늘 나와 나의 행위와 행위를 하는 모양을 나누어 말한다.

즉

“나는 잠을 잔다.”

또는

“나는 일을 한다”

라는 표현이다.

여기서 ‘나’라는 것이 있고, 자는 행위가 있고, 잠자는 내 모양이 있다.

일도 마찬가지다.

내가 있고, 일하는 행위가 있고, 일하는 모양이 있다.

 

이 ‘나’와 자거나 일하는 행위가 있고, 잠자거나 일하는 모양이 바로 삼위일체인 것이다.

나와 나의 행위와 매순간 내가 행하는 모양이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라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늘 변함이 없고, 또 행위를 하는 그 작용 역시 보이지 않지만 늘 하고 있는데, 내가 행하는 모양은 매순간 달라진다.

 

그래서 나는 나인데, 매 순간 달라지는 나와 변하지 않는 내가 있게 되니 어쩔 수 없이 ‘나는 잠을 잔다.’ ‘나는 일을 한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이, 이 법을 깨달은 사람들이 깨닫고 보니, 이 세상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만든 무엇이 있고, 만든 그것을 움직이는 무엇이 있고, 그것에 의해 세상에 각각의 모양이 나오고, 그 나온 모양은 단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매순간 달라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우리 개인과 하등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이 내재된 본성과 그것의 작용과 드러난 모양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알기 쉽게 이 한 법을 세 가지로 나누어놓은 것이다.

그것이 본성과 작용과 모양으로, 불교에서는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이라 하여 삼신불이고, 기독교에서는 성부, 성신(성령), 성자라 하여 삼위일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물아일체의 실상은 바로 이 삼신불, 또는 삼위일체를 말하는 것이다.

즉 세상과 내가 둘이 아닌 주객미분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처음에 질문자와 선사의 대화에서, 선사는 자신이 그대로 법신불이요, 보신불이요, 화신불임을 알기 때문에 따로 볼 도가 없었고, 또 자신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늘 도(道)와 함께, 아니 도(道)로 있으니 본다 안본다 하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묻는 사람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내가 있고 도가 따로 있다고 여기므로 그에게는 보아야 할 도가 따로 있게 되고, 또 사람들이 도가 있다 하고 또 선사가 도를 깨달았다고 하니 도라는 것이 ‘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스님께서는 도를 보십니까?”

 

라고 물은 것이다.

이 물음에 선사는 일체만법과 자신이 도 자체임을 알고 늘 하나로 살아가니 본다 안 본다는 말 자체가 의미는 없지만, 그가 그렇게 물으니 대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본다.”

 

고 대답한다.

그러자 질문자는 자신은 도를 못 보는데 깨달은 선사가 본다 하니 더욱 궁금하고, 또 선사는 보는데 왜 자신의 눈에는 안 보이는가 하는 궁금증도 일어나

 

“그런데 저는 왜 못 봅니까?”

 

하고 물은 것이다. 그러자 선사는

 

“그것은 네가 있어서 그렇다.”

 

라고 대답하는데,

이는 온통 하나요, 오직 하나여서 주와 객이 없어 자신을 떠난 도라는 것이 없는데, 이 질문자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을 세워 눈 아니면 소리로라도 보거나 들으려고 하니, 그런 도가 어디에 있겠는가?

보는 놈도 도이고 보려고 하는 것도 도이고 그렇게 묻는 것도 도인데, 자신을 따로 세우고 도라는 것도 따로 세워 찾으려니 그것이 보일 리가 없다.

그래서 선사는 ‘그것은 네가 있어서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이 말은 자신과 도가 둘이 아닌데 둘로 나누니 못본다는 뜻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선사를 대하고 있는 자신이, 눈이 나쁘거나 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나라서, 그런 나라는 것이 있으니 못 보는가 보다. 라는 생각으로

 

“그러면 스님께서 제게 보여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이제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온통 이 한 법밖에 없는데, 법과 자신을 나누고, 이제 선사까지 자신과 나누어 보고 있는 것이다.

즉 도와 도 아님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세상을 낱낱이 등급으로 나누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도를 구하는 사람들도 이 사람과 별반 다름이 없어, 이 사람이 선사는 깨달았고, 나는 깨닫지 못했고 등의 생각으로 보고 있는 것과 같이, 역시 도와 세상을 점점 복잡하게 보고는 도라는 것이 어디에 숨어 있거나, 어떤 대단한 모양으로 있거나, 아니면 대단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기도하고 빌거나 수행을 열심히 하면 세상에 기적처럼 드러나거나, 게다가 사람의 병을 낫게 하거나 등등의 미신적인 생각까지 얹어, 도를 깨달았거나 그것으로 신통력을 얻은 사람들이 자신을 도와 줄 수 있다든지 하는 생각으로 도를 생각한다.

이 사람도 그렇게 물은 것이다.

 

즉 깨달은 사람은 자신과 다르고 신통력이 있어 내게 도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물은 것이다.

이렇게 더더욱 도에서 멀어지고 있으니

선사는, 모든 것이 오직 하나여서 너와 나 모두가 도 아님이 없는데, 이제는 그렇게 등급으로까지 나누어서 찾아다니면 어떻게 도를 보겠는가 하는 의미로

 

“너만 있어도 그런데 나까지 있으면 무엇이 보이겠느냐?”

 

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러면 제가 없으면 보이겠습니까?”

 

라고 물었는데,

지금까지 유(有)로 나가다가 안 되니 이제는 무(無)인 공(空)으로 들어가 묻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사는 그것을 깨어주기 위해

 

“네가 없으면 누가 보느냐?”

 

라고 대답하는데,

지금처럼 이 사람이 선사에게 묻는 그 물음에 세상 사람이 이 도와 깨달음에 대한 생각이 모두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오직 그것뿐이라는 말, 또는 온통 그것뿐이라는 말, 즉 오직 하나, 온통 하나라는 말에 사람들이 익숙하지 않은 것이,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오직 하나는 다른 것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라는 뜻으로 듣고, 온통 하나는 그 오직 하나의 무리들이 온통 같은 모양, 또는 종류, 또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뜻으로 듣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 온통 하나라는 말은 우리가 존재하는 이 세계, 즉 우주라고 해도 되고, 법계라고 해도 되는 데,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알 든 모르든, 또 앞으로 우리가 모르든 것이 새롭게 나타나든, 모두가 다 이 한 법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말이 오직 하나, 온통 하나라는 말이요, 내가 늘 말하는

“일체가 한 법이다.”

라는 뜻이다.

 

그리고 일체가 모두 이 한 법이니, 자신이 이 법임을 깨닫든 못 깨닫든 다 이 한 법으로, 비록 깨달은 사람을 부처라 하지만, 깨닫든 못 깨닫든 이름이 다를 뿐 모두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일체가 한 법이다.”

라는 말 뒤에

“내가 부처다.”

라는 말을 붙여서 사람들에게 늘

“일체가 한 법이다. 내가 부처다.”

라고 되뇌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법 아닌 것은 한 티끌도 없다. 그래서 부처 아닌 것이 없다.

물론 굳이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이 부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이라는 것이 공부를 좀했다고 사람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고, 또 돈 좀 많이 벌었다고 또 더 나은 존재가 되며, 생각이 좀 깊다고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가시에 찔리면 아프고, 밥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고, 오래 안 먹으면 죽고, 또 배에 뭐가 들어가면 반드시 화장실을 가야한다.

 

그리고 인간과 다른 종들도 살아있는 것은 뇌의 기능이나 몸의 기능의 우열은 있어도 서로 상호작용해야 존재하고 살아감을 피할 수가 없다.

그리고 무생물도, 생물이 가지고 있는 원자와 분자를 가지고 있고, 또 그 분자와 원자의 활동이 생물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것은 똑 같은 쇳물을 금형이 다른데 부어 넣은 것과 다름이 없으므로 그 어떤 것도 이 한 법과 이 한 법의 법칙과 이 한 법으로 드러난 모양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이러하니 도가 어디에 따로 있겠는가?

그런데 이 사람은 그것을 따로 찾고 있으니 어떻게 도를 보겠으며 자신이 도 그 자체임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말한 것이 바로 주객미분(主客未分)이다.

즉 우리를 만든 도(道)인 주(主)와 그것으로 드러난 갖가지 모양의 만법(萬法)인 객(客)이 둘이 아니라, 온통 하나인 한 통속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아는 것, 즉 법과 세상만법이 하나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곧 주객미분을 아는 것이고, 이 주객미분이 들어난 만법의 세상으로 들어오면 물아일체(物我一體)라는 말이 생겨나는데, 이는 드러난 것, 일체만법이 모두 이 한 법으로 드러남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객미분이라는 말은 물아일체라는 것은 법과 사물과 내가 한 몸이라는 의미이긴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내가 컵이 될 수가 없고, 내가 책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주객미분, 또는 물아일체라 하면, 보통 사람은 안 되고 아주 수행이 높아지고 도력이 생기면 벽을 뚫고 다니고, 또 하늘을 날고, 물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뜻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그런 도를 깨친다고 산속 곳곳에 들어가 온갖 수행으로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주객미분이나 물아일체는 그런 뜻이 아니라,

비록 모양, 즉 상(相)은 다르지만, 모두가 다 이 한 법으로 드러난 하나의 체(體), 하나의 용(用)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벽을 뚫고 하늘을 날고 물에서도 산다.

다만 우리가 죽고 나면 우리의 육체가 인연으로 흩어지면, 칼슘 등 무기질은 벽을 만들 수 있고, 또 다른 성분은 새의 몸에 들어가 하늘을 날 것이고, 물고기에 들어가 물에서도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드러난 만법이 매 순간 변하지만, 모든 형체가 없어지지 않는 이상 부처님의 말씀처럼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인연의 끈이 남아 있어 그만의 인연의 삶을 산다.

그래서 사람은 물에서도 살 수 없고 탈 것을 이용하지 않고는 하늘을 날 수 없고, 또 맨몸으로 벽이나 건물 등을 뚫고 다닐 수도 없다.

 

이런 영화나 드라마가 많이 나오는데, 앞으로 과학이 발달하여 우리 몸에 레이저광선 등을 장착하여 다니면 그 광선으로 벽을 뚫고 다니고, 또 우리의 몸에 아가미와 같은 도구를 장착하면 또 물속을 다닐 수 있고, 등에 날개와 같은 기계장치를 이식할 수 있는 기술이 발달하면 하늘을 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인간의 속성을 벗어날 수가 없다.

여전히 밥은 먹어야 하고, 배설을 해야 하고, 또 생각에 잡혀서 시기도 하고, 질투도 하고, 사랑도 하고, 행복해하기도 하며 살아갈 뿐 그것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모양을 가진 만법의 인연이다.

 

그래서 주객미분이니 물아일체라는 소리에 너무 많은 상상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오히려 주객미분과 물아일체는 곧 깨달음과 같다.

그 말의 뜻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이고, 그리고 깨닫고 나면 성향의 차이일 뿐 누구에게나 사랑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깨달음으로 세상을 대하고 그들을 자신과 같이 여기는 것이 곧 주객미분이요 물아일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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