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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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즐거움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1,930

20-03-10 17:08

본문

고통과 즐거움 

 

 

매순간 인연에 즉하여 일어났다 사라지는 세상의 일이나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는 고통이니 즐거움이니 하는 것이 없다.

그래서 마조스님은 즉심시불(卽心是佛 : 즉심이 부처다)이라 하였다.

 

하지만, 초시계로도 헤아릴 수 없는 찰나의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생각이 과거의 기억으로 생성된 잣대로 분별하여서 고통이니 즐거움이니 하고 판단하고 흔들린다.

 

고통과 즐거움은 현재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를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필터링하여 볼 때에 일어난다.

그래서 고통이나 즐거움이라는 것이 정말로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으로 헤아리는 세상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만나는 세상의 모든 일과 현상은 나의 영향이 미치는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

이처럼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나의 영향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일어날 인연이 있어 그렇게 일어난다.

그래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애초에 고통이나 즐거움 따위의 내용물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의 조건에 의해 일어날 뿐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과거의 습에 의해서 생성된 생각의 집합체를 개체적인 자아, 즉 아상(我相)으로 삼아, 그것으로 새롭게 만나는 모든 세상과 정보를 좋고 나쁨으로 분별한다.

이처럼 이 아상이란 놈은 늘 현재에 살지 못하면서도 늘 현재를 간섭하며 매순간 일어나는 삶의 현상을 옳다 그르다 하며 받아들이고 싶으면 즐겁다하고 거부하고 싶으면 고통스럽다한다.

 

이처럼 사람이 좋다 나쁘다 하는 잣대가 모두 한 개인의 습에 의해 생긴 것이기 때문에 개개인 마다 즐거움과 고통의 기준과 대상이 다르다.

 

하지만 세상은 한 개인의 삶만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 전체의 삶이 서로 어우러져 흘러가는 인드라망 같은 세상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행복하거나 누구에게나 불행한 삶이 아니다.

그래서 불행과 행복은 자신이 만든 기준, 즉 잣대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이 아상은 모든 것을 자신의 필터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세상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알거나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마다 세상에서 느끼는 행불행이 다 다른 것이다.

 

이것이 사람이 느끼는 고통과 즐거움이 생기는 이유다.

 

하지만 반대로 이렇게 개개인 마다 다 다른 이유 때문에

오히려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가 바로 보리이다.’ 또는 ‘중생이 바로 부처의 씨앗이다.’

하는 의미로 화엄경에서는

‘불국토 안에 수많은 불국토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즉, 이 우주 삼라만상이 하나의 불국토요,

그 안에 수많은 은하와 별들이 불국토 안의 불국토요

나아가 한 사람사람 개개인의 삶이 각각 불국토 안의 불국토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면, 이 세상은 우리 한 개인으로서는 절대로 만들 수 없는 멋지고 다양한 화엄세계를 맛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상이라는 자신만의 필터에 갇혀 이렇게 다양하고 화려한 불국토를 보지 못하고, 그러한 불국토를 이루는 존재가 바로 자신과 모든 존재들임을 보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만 옳다는 생각의 교활함에 속아 고통과 즐거움이란 세상을 만들고는 그 속에서 널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고통의 시작이고, 번뇌는 그렇게 생겨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의 고통과 즐거움은 삶의 현상에 그러한 모양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인연으로 흘러가는, 즉 화엄세계(華嚴世界), 온갖 꽃으로 장엄한 이 거룩하고 화려한 세상을

오직 좁디좁은 자신만의 세계와 자신만의 잣대로만 저울질 하여 마음에 들면 즐겁다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통스럽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또 이놈의 한 생각은 자신의 필터의 문제임을 티끌만큼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인정할 마음은 더더욱 없으니, 모든 시선을 오직 바깥으로만 돌려 세상을 탓하고 삶을 탓하며 그것을 바꾸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삶이 힘들지 않으리오....

 

아상은(분별하는 생각) 본래 없는 놈이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상태가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즐거움을 추구한다. 즐겁다는 자체가 자신이 있음을 만족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래서 아상은 자신의 생각이 거부당할 때에 두려움을 느끼고 고통을 느낀다.

거부당한다는 것은 존재자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보다 고통을 받아들일 때 아상은 생명력을 잃어 간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은 세상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눈이 있다는 것이고, 세상을 평등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나의 관점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니 아상이 힘을 잃어가고 있는 현상인 것이다.

 

세상엔 믿지 못할 것도 믿을 것도 없다.

믿지 못하는 것도 우리 생각이요

믿는 것도 우리의 생각이다.

삶이 우리를 믿게 하거나 속이는 것이 아니라,

분별하는 생각, 그 놈 스스로 믿고 속고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들은

다만 인과 연이 합하여 일어날 뿐이다.

 

그리고 그 인과 연이라는 것은,

수많은 조건의 인과 수많은 조건의 연이 만나서 하나의 일이 일어나므로,

매 순간,

인이 된 나의 생각과 몸의 상황과 주위의 환경(날씨, 온도, 시간적 조건, 주위 사람들의 상태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여건들이 모인 환경)과 과거의 지은 업 등과,

연이 된 상대의 생각과 몸의 상황과 주위의 환경과 과거의 지은 업 등이

그 순간에 만나서 매순간의 일들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우리의 매 순간 살아가는 현재의 삶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 수많은 조건이 어떤 것들이 모여 있는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 인과 연이 왜 그렇게 만나서 하나의 일이 일어나는지를 아는 자도 아무도 없다.

 

설사 인(因)이 된 나의 조건을 알 수 있다고 하더라도,(물론 그런 존재도 없지만)

연(緣)이 된 상대의 조건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의 인과 연이 만나서 어떤 과를 만들어내려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변수와 함수가 존재해야 일어난다.

 

예를 들어, 내가 택시 운전을 할 때의 일이다.

내가 택시에 어떤 손님을 태운다고 할 때에,

내가 그 손님을 태울 수 있는 조건만 보더라도,

내가 아침에 그 손님과 만날 수 있는 조건의 시간에 일어나야 하고,

밥도 그 시간에 먹어야 하고,

세수도 그러하고,

혹시 면도를 하면서 얼굴에 작은 상처라도 생겼다 치면,

그것을 정리하느라 1, 2초의 시간만 시간이 늦어진다면,

나는 그 손님을 못 만날 것이다.

 

이처럼 그 외에도

집을 나서는 것,

차에 시동을 거는 것,

벨트를 매는 것, 등등...

아주 사소한 것 같은 수많은 일들도 꼭 맞아떨어져야 그 손님을 태울 수가 있다.

 

그리고 그 손님 역시 나와 똑 같은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내차를 탈 수가 있다.

 

그리고 또,

내가 그 손님을 태우기 전에 내가 태운 다른 손님의 상황이 그 사람이 있는 곳, 그 사람이 탈 시간 등과 맞아떨어져야 하고,

그 손님 역시 나의 차를 타기 전에 하는 일들에서 사람을 만나고, 또 일을 하고 등등의 일들이 나를 만날 조건에 부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복잡하고 다단한, 그리고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면, 결코 나는 그 손님을 태울 수가 없고, 그 손님 역시 나의 차를 탈 수가 없다.

이러한, 마치 먼지와도 같은 수많은 크고 작은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비로소 하나의 인연이 생성되는 것이다.

하나의 인연이 만들어지기 위한 이렇게 복잡하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만큼이나 방대한 조건들을 누가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여러분은 한 번이라도 이러한 세세한 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연이라 하면 자신의 평소의 삶에서 색다른 것만 인연이라 하지, 아침에 그 시간에 일어나고 눈곱을 떼려 눈을 비비는 것까지 인연이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리고는 크게 보이는 일만 가지고 세상일을 따지고 다툰다.

그러니 빠져나가는 수많은 요인들을 알 수가 없고, 또 사람마다 크게 여기는 일이 다 다르니 오해와 다툼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고통과 즐거움이 생기는 것이다.

 

숙세의 인연으로 만난다고 보통 이야기 한다. 그러나 숙세의 인연 역시 그만큼 복잡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복잡한 과정에서 인연되어져 일어나는 일들의 연속에 우리의 삶은 엮어져 간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개개인의 각자 각자의 과거가 그만큼 조건적으로 맞아떨어진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 삶 속에서, 어느 날 하루만이라도 그 시간이 일어나지 않고 늦잠을 잤다고 해보라. 또 어느 날, 할일을 조금이라도 늦장을 부리고 다른 일을 했다고 생각해보라. 과연 우리가 만났을까? 만났을지 만나지 못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게 엮어져 일어나는 일의 수많은 조건을 모두 아는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렇게 엮어져 일어나는 일들을 통제할 능력은 우리에겐 눈곱만큼도 없다.

 

우리가 한치 앞도 모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삶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도 분별하는 그 놈의 생각은 과거에 겪은 한 두 개의 일로 마치 그것이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설명하는 사전(事典)처럼 들고는 모든 것을 자신의 생각대로 하려고 한다.

좋은 것을 만들고 나쁜 것은 일어나지 않게 말이다.

 

실제로는 모든 것이 다 이 한 법의 연기법이 하고 있어 우리라는 존재는 할 수 있는 능력이 털끝만큼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고 애를 쓰며 쓸데없는 노력과 고민을 하고 있으니 어찌 사람들에게 괴로움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인연되어서 일어나는 우리의 삶이니 그 삶에서 완전함이니 불완전함이니 하는 것도 없다.

그러한 것 역시 분별하는 생각에만 존재하지 매 순간 일어나서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실재적인 우리의 삶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그러한 일들이 우리에게 닥쳐왔고 우리는 그러한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모든 깨달은 선지식들이 한결같이

“인연 따라 살아가라.”

고 하는 것이다.

 

삶이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삶에 대한 겸손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럴 때에 비로소,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아무리 탓을 하고 고치려 해도 되지 않음을 알고, 그것을 어떻게 하려는 헛된 노력을 그만 둘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겁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우리를 지배하려는 아상이라는 폭군에 맞서는 의로운 행위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즉 이 한 법의 백성을 해방시키는 거룩한 일인 것이다.

 

깨달은 사람을 왜 거룩하게 여기겠는가?

이처럼 자신을 해방시키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도 이 폭군에서 해방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상으로 인해 어지러워지는 세상의 문제를 바로잡는데 기여를 하기 때문에 거룩하게 여기는 것이다.

 

우리와 더불어 이 우주의 모든 일은 이 한 법의 일이므로 우리같은 개체적인 존재는 한치앞의 세상도 모른다.

아니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모르는 자가 모름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겸손하며 지혜로운 행동이지 비겁한 행동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것이 마치 소경이 앞을 보는 것처럼 속여 다른 소경을 이끌고 가는 어리석은 일인 것이다.

그러한 왜곡된 자존심(自尊心)은 자신도 망치고 다른 이도 망치고 나아가 세상도 망치는 부끄러운 일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제발 삶에서 겸손해지자.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망상에서 벗어나자.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그 생각이 바로 분별망상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에서 매 순간 일어나는 일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자.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진정 그러할 때에 비로소 우리에게는

휴식과 자유와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여기서 조금 더 덧붙여 이러한 인연을 우리 개인의 생각과 감정에 대입하여 설명하면.

 

이 인연이라는 것이 바깥의 세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과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우리의 삶에서 인연이 조금만 비켜갔다면 우리는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고, 그러면 분명 세상을 대하는 감정과 생각도 달라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삶에서 우리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도 있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내가 인(因)이라고 하더라도, 연(緣)인 상대의 삶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도 알 수도 없으니

그러한 인연에서 받아들여 생성된 우리의 감정과 생각이 어떻게 옳다 그르다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올 인연은 한치 앞도 알 수 없는데, 그 알 수 없는 삶과 나의 감정과 생각을 내가 어떻게 하여 조절한단 말인가?

설사 바깥으로 인연을 짓지 않더라도 잠시도 쉬지 않고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 떠오르는 생각을 자신의 생각대로 조정할 수 있는 자가 세상에 있는가?

 

우리의 생각이라는 것은 일어나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을 인지하는 기능밖에 없는 것이고, 일어나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생각의 내용을 우리가 어떻게 일어나기 전에 미리 조정하겠는가?

 

그것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우습고 어리석은 짓이요. 헛된 노력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러한 것이 이 한 법의 인연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만법은 모두 이 한 법의 인연에 의해 생겨났으니, 그 생겨난 것은 모두 이 한 법의 인연에 따를 수밖에 없고, 우리 역시 그러하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우리의 삶,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인연이 되어 일어나고, 우리는 그렇게 일어나는 헤아릴 수 없는 인연의 조건들을 대부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도 모두 이 한 법의 일이어서 바깥 세상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일어나기 전에 미리 그것을 제어할 방법이 없다.

즉, 분노, 원망, 화, 미움, 짜증, 번뇌, 밴댕이 같은 생각 등등 이러한 감정 역시 그때그때의 인연에 따라 일어날 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역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또 입을 댄다.

그러면 비겁한 것이라느니,

그러면 어떻게 자신의 잘못된 습관을 바로 잡겠느냐느니,

그러다보면 나쁜 짓도 마음대로 하지 않겠느냐느니

등등으로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이 모든 것이 다 시비하는 것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시비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곳에는 반드시 좋고 나쁨이 생겨난다.

 

그런데 좋고 나쁨이라는 것이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람마다 다 다르니, 자신은 옳아 보이는데, 또는 하고 싶은데, 억지로 시비하여 억누르면 어떻게 되겠는가?

 

긍정하는 사람도 있고 부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나라는 개체 안에서도 스스로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생각도 있을 것이고, 우선 바깥 시선이 두려워 참지만 억울하다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 어떤 모양으로 밖으로 나오겠는가?

역시 시비와 분별로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이처럼 시비는 시비를 낳고 분별은 분별을 낳아 끝없이 되풀이 할 것이다

 

실제로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세상에서 옳다 하는 것을 모두 다 긍정하는가?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모든 인연에 다 똑같이 적용하는가?

 

시비는 분명히 시비를 낳게 되는 것이다.

 

이 우주는 본래 하나여서 어떤 시비도 없는데, 특히 사람의 생각은 이 하나를 알지 못하고 각각 자신이 옳다고 하니, 이 우주에 존재하는 생각가진 존재들만큼 옳고 그름이 난무하게 된다.

 

그러한 난무를 참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비겁하다고 할 것인가?

 

이 세상에 일어나는 어떤 일도 이 한 법의 인연이 없으면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좋고 나쁨도 옳고 그름도 없다.

 

그래서 그것을 받아들일 때에, 즉 어떤 옳고 그름이라는 시비의 잣대도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될 때,

자신의 생각은 시비를 일으키지 못할 것이고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모두 당연하게 볼 것이니 그의 세상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축복은 받아들이는 곳에만 존재한다.

그 받아들임에서 번뇌는 사라진다.

그 받아들임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 속에서 우리의 본성을 볼 수가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자성의 그러함을 알 수가 있다.

이 모든 것이 자성의 힘이요, 자성의 모습임을.....

 

그 받아들임이 바로 축복이다.

그리고 그 축복 속엔 불완전도(분별하는 눈으로 보니까 불완전이다.) 함께 있다

그래서 완전도 불완전도 없다.

 

그러세 우리의 본성은 생각이란 놈이 분별하여 완전이니 불완전이니 하는 것도 함께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자.

 

그러면 우리의 삶은 고통과 즐거움을 분별치 않을 것이요

완전과 불완전을 분별치 않을 것이요

옳다 그르다 분별치 않을 것이며

일어나는 것들을 분별하여서

생각에 드는 것은 계속 누릴 수 있고,

생각에 들지 않는 것은 없앨 수 있다는,

즉,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의 착각에서 벗어날 것이며

우리의 아상은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즐거움이 오면 그냥 즐거움을 받아들이고

고통이 오면 그냥 고통을 받아들이자.

그리고

고통과 즐거움이 왔다가 때가 되어서 갈 때가 되면

그것대로의 삶을 살고 가도록 내버려두자.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현재의 삶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열심히 살자.

 

외부의 현상들이 당연하듯이

우리 속에 있는 여러 가지 현상 역시 당연하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에(분별하지 않을 때에)

우리들의 있는 그대로의 삶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래서

분별할 것이 없다.....

 

삶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문제가 있음을 알자.

그것을 아는 자는 고통도 즐거움도 그냥 일어나는 하나의 일일뿐임을 알고,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화엄경에서 말하는

“불국토 안에 수많은 불국토가 있다.”

는 말이 자신 안에 쑤욱 들어올 것이다.

  

이러한 자가 진정 삶의 주인인 것이다. 

 

댓글목록

조나단님의 댓글

코로나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분들 누구나 읽어보면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인거 같습니다.
추후에 짧은 영상으로 youtube에 올려도 좋을거 같습니다.
매번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윤기붕님의 댓글

너도 조심하고 건강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