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생사(生死)가 열반(涅槃)이다.(수정판)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2,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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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5년 전에 올린 글인데, 중간에 말 이음이 매끄럽지 않거나 모호한 부분이 있어 중간 중간 수정하여 다시 올립니다.)
생사(生死)가 열반(涅槃)이다.
이 한 법은 무루(無漏)다.
원래 불교에서 유루법(有漏法)과 무루법(無漏法)이 있는데, 유루법은 당장의 번뇌는 아니지만, 그냥 두면 번뇌를 증장(增長 : 성질과 행실이 나쁜 방향으로 더 심해짐)시키는 작용을 하는 모든 허물의 법을 말하고, 무루법은 번뇌가 끊어진 상태, 또는 번뇌를 끊어지게 하는 법을 말한다.
하지만 내가 지금 말하는 무루(無漏)는 일체가 온통 한 법이어서 삼라만상의 모든 것들이 티끌만 한 것도 이 법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로, 어떤 것도 이 법에서 새어 나가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 우주는 오직 한 법의 법계로 삼라만상이 모두 이 한 법이어서 일체만법이 티끌 하나도 이 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만, 이 한 법과 만 법이 다른 점이 있다면,
이 한 법(法)은 나지도 멸하지도 않는 법의 몸(體)이요,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성품 그 자체여서 영원불변하는 것이고,
그에 비해 만법(萬法), 즉 삼라만상은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 즉 연기(緣起)로 세상에 생기고 변하고 사라지므로 그 어떤 것도 자기 성품이 없어 매 순간 이 한 법의 인연에 의해만 존재하여 고정되어 있거나 영원불변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체가 이 한 법으로부터 건립(建立)된 것이기 때문에, 비록 찰나지만 매 순간 드러나는 만법은 이 한 법의 성품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 dl 한 법과 다름이 없고, 그대로 법이요, 자성이요, 부처요, 진리이다.
이를 거꾸로 말하면 만법이 자신만의 고유한 성품이 없어 인연으로 드러나는 그 순간에만 진실하게 존재할 뿐, 순간이라 이름 붙이고 잡으려 하면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기 때문에 찰나의 그 순간만이 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찰나에 존재할 뿐 사라져버린다고 말하면, 마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단멸(斷滅)에 빠진다.
하지만 이 사라짐은 사라짐이 아니라, 그 찰나의 인연으로 모양이 다르게 변해가므로 사람의 눈에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인연으로 변해갈 뿐이다.
이는 이 한 법이 세상을 낼 때 연기(緣起)의 법칙과 작용으로 내고, 그 법칙과 작용은 단 한 번도 변하거나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만법이 매 순간의 모양만 가지고 있을 뿐, 모양을 가졌다 하는 순간 다르게 변하면서 끊임없이 다음 찰나 또 다음 찰나의 인연으로 계속 이어간다.
그래서 일체 만법이 모양만 바뀔 뿐 이 법계를 떠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루(無漏)이며, 반야심경에서는 이를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을 내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으로 비유하면 내가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고, 일어나서 걸어가고 하는 것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과 같다.
그리고 앉아 있더라도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바뀌든, 다리를 흔들거나, 손을 움직이거나, 보는 대상을 바꾸는 등, 잠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의자에 앉아 있을 때는 앉아 있는 그것이 그때의 이 한 법의 모습이고, 일어나면 일어나는 것이 그때의 이 한 법의 모습이며, 걸어가면 걸어가는 것이 또한 걸어갈 때의 이 한 법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이 한 법을 내 몸으로 비유하면 나의 몸은 하나이지만 내 몸에는 눈도 있고 코도 있고 머리카락, 신체 기관, 세포 등 수 많은 중생들, 즉 만법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인연이 되어 또 변해 가며 또 세월이라는 인연에 의해 끊임없이 늙어가지만, 그것이 모두 하나이다.
이처럼 이 세상도 내 몸과 내 몸의 기관처럼 세상에 갖가지의 것들이 하나를 떠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기억이라는 것이 있고, 또 그 기억이라는 것이 제칠 식인 말라식(末那識)을 만들어내어, 현재와 과거의 기억이 같은 시간과 공간 대에 있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일을 잊지 않고, 또 이미 흘러간 과거를 지금에 고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일은,
그 착각이 자신에게 향할 때 생각이 스스로 잘못된 행위나 생각을 했다고 여기는 문제에 대해 그것을 고치려고 자신을 탓하고 쥐어짜는 것이고,
바깥으로 향할 때는 원한을 가지고 잊지 않고 복수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과거가 현재 상황과 이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의 생각처럼 단순한 인연의 조건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인연에 끼어드는 조건들은 하나씩 추적해보면 이 우주의 탄생부터 따져야 하는 오랜 세월과 방대한 양의 인연이다.
즉, 내가 태어난 인연, 그리고 그러한 상황으로 살아야 할 인연 등과 내게 영향을 준 모든 인연의 하나하나마다 걸려 있는 모든 인연을 다 따져야 지금 내게 일어나는 인연이 설명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인연을 다 따질 수 있는 사람이나 기계는 아마 이 우주가 다할 때까지 과학이 발달해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인연의 고리를 두고 인드라망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나 한 사람이 움직이고 있지만, 매 순간의 모양이 결정되는 것은 매 순간의 인연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사실은 서로 연관된 모든 것이 다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나의 인연이 움직이고 달라지듯이 나를 변하게 하는 모든 인연도 그처럼 매 순간 변하므로,
예를 들면 앉아 있을 때는 앉아 있는 그것이 그때의 나이고 나를 둘러싼 세상이고, 일어나면 앉아 있는 나와 세상은 사라지고 일어난 것이 그때의 나이고 역시 나를 둘러싼 세상이며, 걸어갈 때, 그리고 그 이후, 내가 죽으면 나의 모양만 사라질 뿐 역시 영원히 매 순간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고정된 나라는 것은 그저 생각 속의 기억에만 존재하는 것이지 실제의 세상에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고,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매 순간의 나와 세상밖에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지금에 내 생각이 좀 전의 나를 생각한다고 해도 실제로 좀 전의 내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생각이 미래의 나를 생각한다고 해도 실제로 미래의 내가 있는가? 우주 그 어디에도 그런 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이라 하여
“과거의 마음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마음과 미래의 마음은 분명히 지나가 버리거나 오지 않은 것이니 얻을 수 없다고 하지만, 현재의 마음은 왜 얻을 수 없다고 하는가?
그것은 일체가 연기법에 의해 인연으로 변해 흐르는 물처럼 흘러가 현재라고 하며 잡으려 하면 이미 지나가 버리고 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라는 것도 사실 이름이지 현재라는 것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실상의 세계이다.
그런데 생각이 어느 순간부터 ‘나’라는 상(相)을 만들어 ‘내가 있다.’라는 착각을 일으키면서, 생각이 지은 것이 실재하며 고정된 내가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으며, 바깥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온갖 시비와 투정을 부리면서 그것은 실재하는 세상이 아니라 바꾸고 버려야 하는 세상으로 여기며 자신과 세상을 향해 온갖 번뇌 마구 쏟아내고 우리는 이 생각의 충실한 종이 되어 그 번뇌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세상을 ‘불타는 집’이라 하고 그 불타는 집과 같은 곳에서 사람들이 고통을 참고 살아가니 ‘사바세계(娑婆世界)’, 즉 ‘고통을 참고 견뎌야 하는 세계’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생각의 기억 때문에 습관을 만들어 우리 몸이 삶을 편리하게 영위할 수 있게 하지만, 그 반대로 실상의 세계는 상대가 없는데 생각이 만들어낸 이 세상은 늘 상대가 있어서,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하는 기억이 있는 만큼 기억의 모양을 고집하고 그것을 놓지 않으려는 생각도 함께 있어, 우리를 온갖 집착과 분별과 시비로 번뇌에 빠지게 하고 고통 속에도 살게 하는 것이다.
이 생각의 착각과 망상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유루(有漏)다.
즉 실상에 없고 오직 생각이라는 환상 속의 것으로 이 한 법의 세계에 속하지 않음으로, 이 한 법을 벗어난 유루(有漏)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의 생각이 기억에 의지하여 고정된 내가 있다고 믿고 고집을 부린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는 나와 세상은 매 순간의 인연에 의해 끊임없이 변해가며 드러나는 나와 세상이 있을 뿐, 생각이 지어낸 완성되고 고정된 나와 세상은 이 우주 어디에도 없는 것이 실상의 세계이다.
그래서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하는 것이다.
어쨌든, 앞에서 말했듯이 만법이 찰나의 모양으로 변해가니 사람의 눈에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해갈 뿐이고, 그렇게 매 순간 변하면서 드러나는 일체 만법이 인연에 의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나가기 때문에, 우주는 매 순간 모습을 바꾸며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한 법에는 사라지는 것이 없고, 또 나는 것도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생사가 없는 이유를 드러난 실상의 세계를 설명하는 위의 글에서 다 이야기했지만,
우리의 한 생각은 일체가 법이라고 해도 꼭 자신은 제외하는 참으로 중생 노릇을 제대로 하는 놈이어서, 다시 이 실상법(實相法)을 우리에게 적용하여 설명해야 한다.
사실 나도 이 법을 깨치기 전에는 생각의 노예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늘 그러했다.
들은 것은 많아서 입으로는 일체가 법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그 일체에는 늘 나를 제외하며 중생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실상의 법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도 앞에서 의자에 앉았다 일어나는 이야기처럼 역시 그렇게 매 순간 모양을 바꾸어가며 끊어지지 않고 살아간다. 그리고 이 몸이 사라져도 무수한 세균에 의해 분해되고, 그 분해된 수많은 법(원자, 분자, 세포, 또는 여러 영양분 등)이 다시 여러 방면으로 흩어져서 또 다른 인연을 만나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해가며 조금도 이 한 법에서 벗어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가진 이 몸이 매 순간 변하며 삶이 흘러가지만 늘 이 법과 함께 하고, 그 과정에 가장 큰 변화로 우리의 몸이 해체되어 이름하여 죽음이라는 것을 만나더라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분해되고 분해되어 원자로 나뉘고는 다시 다른 인연으로 변하여 여전히 이 한 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우주는 원자의 양이 태초와 지금이 조금도 변하지 않은 똑같은 양으로 존재하고, 에너지 역시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라고 하듯 조금도 변함이 없다.
즉 이 한 법의 드러난 수많은 모습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그 모든 것이 모두 다 이 한 법의 인연의 변화일 뿐, 이 한 법 자체는 조금도 달라짐이 없는 모든 것의 ‘나’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생사가 없다.
서장(書狀)을 짓고 간화선(看話禪)을 창시한 대혜종고(大慧宗杲)스님의 서장에 향시랑 백공에게 답하는 편지에서
“‘부처님께서는 구경에 도달한 사람은 꿈이 없다.’고 하셨으니 (이 없음은) ‘있다. 없다’의 없음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꿈과 꿈 아닌 것이 하나일 뿐입니다.”
라고 한 말이 있다.
여기서
“있다. 없다’의 없음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꿈과 꿈 아닌 것이 하나일 뿐입니다.”
라고 할 때, 없다는 것은 우리가 통상 쓰는 상대적인 의미의 ‘있다. 없다.’하는 ‘없음’이 아니라, 일체가 하나이기 때문에 ‘있다. 없다’는 것 자체가 없다는 말이다.
즉, 있어도 이 자리고, 없어도 이 자리로 있음과 없음을 떠나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있음과 없음을 떠나라고 하는 것이고, 또 ‘꿈이 없다.’는 말도
“말하자면 꿈과 꿈 아닌 것이 하나일 뿐입니다.”
라고 하듯이 꿈이 없어서 없는 것이 아니라, 일체가 하나이기 때문에 꿈도 이 자리요 꿈이 아닌 생시도 이 자리여서 꿈이니 아니니 하고 나눌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처럼 일체가 오직 하나요, 한 법이기 때문에, ‘생사가 없다,’는 말 역시 인간의 소견으로 우리의 삶을 볼 때 삶과 죽음이 없어서 ‘생사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일체가 이 한 법이니 살아도 이 자리요 이 법이요 죽어도 이 자리인, 즉 삶과 죽음은 모양의 모양일 뿐이고 실제로는 끊임없는 이 한 법의 변화일 뿐이기 때문에 ‘생사가 없다.’고 하고, 또는 ‘생과 사가 하나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열반(涅槃)은 번뇌의 불을 꺼서 보리(菩提)를 증득한 것으로 이 한 법을 깨달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한 법을 깨달은 사람이나 깨닫지 못한 사람이나 모두 이 한 법이요, 또 이 한 법과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끊임없이 생사를 거듭하는 만법이 여전히 이 한 법이니, 나고 죽는 생사(生死)와 이 한 법을 깨달은 열반(涅槃)이 조금도 다름이 없는 하나이다.
그래서 생사가 바로 열반으로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어도 열반이요 한 법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를 세우면 상대가 서고, 하나가 사라지면 상대도 사라지는 것처럼, 결국 생각이 생사라는 모양을 지으니 열반이 있었지만, 생사가 없어지면 열반도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사를 벗어나서 열반에 이른다고 여기고 생사를 벗어나려고 온갖 애를 쓴다.
이것은 큰 착각으로, 이렇게 애를 쓰는 사람은 아직도 자신이 이 한 법이요, 이 한 법안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이다. 또 이 한 법을 알지 못하기에 생사가 있다고 여기고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이처럼 생사가 오직 생각의 착각임을 알지 못하는 이런 소견은 결국 생각 속에 갇히고 생각의 종이 된 것이어서, 그런 생각으로는 수억 겁을 닦는다고 하더라도 끝내 자신의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또 있지도 않은 생사에 매여 벗어나지 못할뿐더러, 있지도 않은 열반을 얻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떻게 살든, 어떤 곳에 있든 우리는 이 한 법을 절대 떠날 수 없고 이 한 법과 하나인 성품으로 이 모습 이대로 바로 부처요, 진리요, 법이다.
우리의 본성과 정체가 바로 법 그 자체인데 어찌 법이 다시 법을 구하겠는가?
그래서 달마조사(達磨祖師)께서는 혈맥론(血脈論)에서
“만약 자신의 마음이 부처임을 알면 마음 밖으로 부처를 찾지 않을 것이요 부처로 부처를 헤아리지도 않으리라.”
고 하셨고
“또한 부처로서 부처에게 예불할 수가 없고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생각할 수가 없느니라.”
라고 하셨다.
이처럼 생과 사가 모두 생각이 지어낸 것이고, 생사와 열반 역시 이 생각이 우리를 속인 것이니, 오직 일체가 한 법이요 자신이 법이요 부처임만 믿고, 법으로서 법을 구하지 말고 부처로서 부처를 찾지도 말라.
생사를 떠난 열반이 없고 열반을 떠난 생사는 없다.
그래서 생사도 열반도 모두 생각이 만들어낸 모양일 뿐, 그리고 깨달음 역시 깨닫고 나면 모두 생각의 속임수임을 알 뿐이니, 이 한 법에는 일체의 모양이 없음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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