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삶의 목적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1,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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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목적
우리는 존재 자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목표는 존재함이다.
존재는 우리의 실체요.
존재함은 존재의 행으로 드러나고.
우리의 눈에 드러난 존재의 행은 삶이다.
우리가 바로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만약 목표가 있다면 그냥 존재함이다.
그 이외 아무것도 없다.
존재는 우주의 시작이요. 시간과 공간의 시작이요.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끝이다.
하지만 존재는 시간과 공간과 함께하면서도 그것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존재는 시간과 공간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인연 따라 생긴, 모양 있거나 없는 모든 것들은 존재함을 영위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매 순간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연기하여 단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이 연결되어 있다.
이처럼 일체만법이 모두 이 법이라는 하나의 나무와 같다. 뿌리와 줄기와 잎과 꽃이 비록 그 모습은 서로 독립적이며 다른 모양과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전체로 보면 하나의 나무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와 세상만법의 본 모습이다.
그래서 삼라만상의 모든 형태를 가진 것들이 어떤 인연으로 어떤 형태의 삶을 살더라도 이 한 법에서 보면 조금도 다른 것이 없는 이 한 법일 뿐이다.
그래서 아무리 개체적의 모양에 따라 삶의 목적이 다르다 하더라도, 결국은 모두가 다 이 한 법의 존재함을 똑같이 누리고 있는 이 한 법 자체이다.
그래서 동물이든 식물이든 무생물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미립자이든 사람처럼 고등동물들이든 모두 그냥 존재함을 산다.
다만 인연에 따라 모였다가 흩어지며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며 변화할 뿐 서로를 해치지도 않고 희생하지도 않는다.
그 어느 것도 소멸하거나 더 증가하지도 않는다.
다만, 드러난 현상계의 삶과 개체성에 대한 집착이 강한 종족, 아상이 강한 인간과 같은 종족의 입장에서 볼 때는 세상의 만법들이 마치 서로를 빼앗고 희생하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땅은 갖가지 양분과 수분으로 되어 있으면서 그것들끼리 물리적 화학적 반응으로 끊임없이 변하고,
식물은 그 양분과 수분으로 자신의 형태를 머묾 없이 변화시키고,
초식동물은 식물을 통해 영양을 섭취하며 자신의 형태를 변화시키고,
육식동물은 초식동물을 통해 역시 그러한 변화를 하고,
사람 역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섭취하며 삶이라는 변화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인연이 다하면 다시 분해되어 땅으로 흡수되고
땅의 미생물들은 위의 모든 것들을 섭취하면서 변하고 또 땅도 변화시킨다.
하지만 이 우주의 에너지와 원소는 조금도 늘거나 줄지도 않으니, 수많은 존재가 끊임없이 변해도 결국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오직 그냥 존재만 존재한다.
삶이란 변함없는 존재의 테두리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끝내 존재 속에서 항상 함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가 생명이라는 것과 개체의 모습을 가지지 않았을 때도 우리는 존재해 왔고, 생명과 개체의 모습을 가지고 있을 때도 존재한다.
그리고 개체적 모습이 소멸되었을 때도 역시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존재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을 비롯한 생물 무생물 등의 모든 물질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이 한 법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그래서 이 한 법은 존재자체이면서도 모든 존재의 근본이다.
그래서 스스로의 성품이라는 뜻으로 자성(自性)이라고 하고 진실로 그러하다는 뜻으로 진여(眞如)라고 한다.
그 외 수많은 이름이 있지만 모두 이런 뜻이다.
이것이 우리의 진실한 모습이다.
개체의 삶을 살기 위해선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할 수도 있고, 어느 것을 선택해도 상관없다.
우리의 실체인 존재는 그 무엇이든 허용하는 관대함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나 아름답고 거룩하고 성스럽다.
하지만, 아름답다, 거룩하다, 성스럽다는 것은 이름뿐이요.
그 어떤 것도 존재를 더 아름답게도 더 추하게도 할 수가 없고
존재에는 그러한 이름 자체가 필요조차 없다.
오히려 인간이 지은 이름으로 인하여 이미 그러한 존재를 이름과 그 뜻에 구속할 뿐이다.
사람을 제외한 모든 것은 대부분 그냥 존재함만 산다.
물론 사람도 역시 존재함만 산다.
그러나 유독 사람만은 존재함을 살면서도 존재함을 살지 못한다.
이름에 매이고, 모양에 매이고, 나라는 허상에 매이는 그 한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모습을 두고
해친다거나 빼앗는다거나 나쁜 짓을 한다거나, 아니면 돕는다거나, 희생한다거나 좋은 짓을 한다는 등의 의미를 붙이고는 그 의미와 이름에 매여서 스스로 존재의 아름다움을 망각해 버렸다.
그래서 삶이 이름에 춤추는 꼭두각시가 되고 고통스러워진 것이다.
왜 이름에 매이고 모양에 매이는가?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동식물이나 무생물 등도 자신이 존재임을 알기 때문에 삶을 고통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이 가지지 못한 덕(德)이 있다.
그것은 바로 순응함이다.
물론 그들도 인간처럼 개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한다.
그래서 죽음보다는 삶으로 나아가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정작 죽음에 맞닥뜨렸을 때는 인간과 같은 원한이나 분노나 복수심 등을 품지 않는다.
왜?
그들에게는 살아서 이루거나 얻어 지녀야 할 목표가 따로 없고 오직 존재함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그들의 마음에는 선과 악이 있고, 좋고 나쁨이 있고, 귀하고 천함이 있고, 사랑함과 미워함이 있기 때문에 살아서 이뤄야 할 목표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집착으로 인한 개체의 삶에 대한 집착이 다른 존재들보다 많아서, 죽음에 맞닥뜨릴 때 그 집착만큼이나 복잡한 마음이 일어나 원한과 분노와 복수심 같은 것을 품으며 죽어가는 것이다.
그리고는 영혼이니 귀신이니 환생이니 하는 헛된 모양을 만든다.
그런 것은 없다.
그 모두가 다 인간들만이 가지고 있는 가치와 그 가치에 집착하는 생각들이 만들어낸 헛된 그림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을 제외한 만법은 모두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다른 것을 빼앗고 또는 영역을 차지하고 그것을 침범하지만,
그것은 오직 삶을 영위하려는 자연스러움이어서 그들이 노력한 만큼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변화에 순응하며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이것이 진정한 존재의 삶이요 목적이다.
인간이 그들과 다르고 낫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섬세한 사고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인간은 자신이 존재 자체임을 알 수 있었지만, 오히려 그 능력으로 인하여 결국 죽을 때는 다 버리고 갈 뿐인 더 나은 것을 바라게 되어 자연스러움을 거스르는 아이러니도 만들었다.
그래서 쓸데없이 만들고 구하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남을 해치고 자신을 해치는 고통 속으로 빠져들어 가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우리의 실제의 삶은 존재함이다.
그 존재함을 위해서 어떤 삶이든 선택할 수 있고 존재는 그것을 허용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고 사무치게 아는 것을 일러 깨달음이라 한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어떤 삶을 살더라도 인간의 가치라는 허상이 만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아니 애초부터 고통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목적이 존재함이라는 것을 모르고 스스로 존재라는 것을 모르는 자는, 이미 존재하면서도 존재하기 위한 쓸데없는 덕목과 계율을 만들어 스스로 고통 속에 집어 던지고 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가에 관한 물음은 버려라.
그것은 물 분자가 물에서 어떻게 존재하는 것이 잘 존재하는 것인가 하고 묻는 것과 같다.
스스로가 존재 그 자체임을 안다면
잘 산다 못산다 하는 그 의문이 얼마나 쓸데없는 질문인가를 알게 된다.
행복, 사랑, 자유, 평화, 아름다움, 거룩함, 성스러움, 빛남 등등으로 이름 붙이는 것들은 우리의 생각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우리를 조종하기 위해 만들어 낸 위조수표일 뿐이다.
생각이 만들어낸 그런 미화(美化)된 수사(修辭)가 마치 우리의 드러난 삶을 좀 더 풍부하게 만드는 것 같아 보이는 바보 같고 착한 우리는, 생각이 조종하는 대로 속아 그것이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데려다줄 줄 알고 있지만,
결국 그것은 이름, 그것도 우리를 존재에서 분리시키고 세상을 둘로 나누는 상대적인 수사일 뿐, 우리가 진정으로 도달해야할 삶의 목적의 모습이 절대 아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행복하고 자유로운 것은 바로 우리 자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미화된 수사는 생각이 일체가 한 법임을 알지 못하고 또 그것이 우리와 하나임을 알지 못하여 만들어낸 것으로,
세상이 분리 되어 있고 우리도 역시 이 한 법과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고는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보다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해야한다고 착각하는 생각의 분별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낸 것이 바로 거룩함과 그곳을 향한 수행 등의 수단이다.
그러면서 그 거룩함과 수행의 그늘에서 우리는 늘 부족함만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온통 하나다.
그래서 좋고 나쁨이 없고, 옳고 그름이 없고, 높고 낮음이 없고, 귀하고 천함이 없다.
이 양변이 없음은 세상이 각각 나누어 있지만 누구나 평등하다는 뜻이 아니라, 애초부터 단 한 번도 나뉜 적이 없어 양변이 없다는 말이다.
양변이 없기 때문에 인연이라는 것이 생겼다.
즉 양변이 없으므로 이것과 저것이 서로 섞일 수 있고, 그렇게 섞이는 것을 우리는 인연이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본래부터 하나였고, 이후로도 이 생각의 세상이 아닌 실제의 세상에서는 단 한 번도 나뉜 적이 없는 오직 한 법이요 온통 한 법이다.
그래서 진여(眞如)라고 하니 대승기신론에서 진여를 일러
“진여라고 말하는 것은 보낼 것이 없음을 진이라 하고, 세울 것이 없음을 여라고 한다.”(言眞如者 無遣曰眞 無立曰如)
라고 하였다.
이 말은 모두가 다 하나라는 말이다. 즉 하나이기 때문에 떼어서 보내거나 따로 세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한 법으로 생겨난 일체법(一切法)에 대해서도
“이 진여의 체는 보낼 만한 것이 없으니 일체법이 다 참되기 때문이며, 또한 세울 만한 것도 없으니 모든 법이 다 같이 같기 때문이다.”(此眞如體無有可遣 以一切法悉皆眞故 亦無可立 以一切法皆同如故)
라고 하였다.
이 말은 일체만법의 본성인 진여의 체가 이러하기 때문에 그것의 드러난 모습인 일체만법도 역시 모두 참되고, 또 따로 세우거나 버릴 것이 없는 똑같은 하나의 법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스스로 누구인지 모르고 생각의 종으로 살 때는, 생각이 만들어낸 거룩함과 수행이라는 수단이 참으로 가치가 있고 훌륭한 교훈이요 교본이겠지만,
본래부터 우리는 생각의 종이 아니라 오히려 생각의 주인이기 때문에 그런 수단 따위는 아무런 필요도 가치도 없다.
수단을 위해 애태우지 말라.
스스로 존재임을 명확히 알면 그러한 수단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널리고 널려 있다.
우리는 그것을 그냥 가지면 된다.
아니 우리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필요도 없다.
그리고 삼라만상이 모두 이 한 법 그 자체이기 때문이고 우리 역시 그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은 우리가 쓰고 또 써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그래서 모두가 서로 나누고 또 나누어도 남을 만큼 충분하다.
이는 곧 우리가 바로 목적이요 또 수단이기 때문이다.
수단을 얻으려 하지마라.
수단을 얻으려 하면 할수록 스스로 자신과 분리되고 이름에 매여서 우리는 있지도 않는 것에 더더욱 목이 마를 뿐이다.
이러한 자는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자들이다.
수단을 얻으려 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얼마나 넉넉하고 아름다운 존재임을 알라.
'알라'는 말도 참으로 헛된 말이다.
우리는 이미 그러한 존재인데 그것을 알라는 것은 얼마나 헛된 일인가?
그저, 수단을 얻으려는 모든 행위를 중단하라.
마음에서 이는 의문과 불안을 해결하려 하지 말고 조금만이라도 견뎌보라.
그 의문과 불안이 사라질 때까지...
그러면 우리가 찾으려는 수단이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헛되며 이름뿐인 것이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가를 알 것이고,
그것을 알 때 우리의 삶의 목적은 그냥 존재함임을 알고,
우리의 목적이 존재함이란 것을 알면
존재자체인 우리에게 목적은 생각이 만들어낸 한낮 허구일 뿐임을 분명하게 알 것이며,
우리는 따로 행복을 구할 필요가 없는 존재임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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