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나쁜 나무엔 나쁜 열매가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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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나무엔 나쁜 열매가
나쁜 나무엔 나쁜 열매가 열린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다.
만약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당치가 않는 일이다. (여기서, 나무가 나빠도 간혹 좋은 열매가 열리지 않느냐? 하고 말한다면, 이 글을 쓰는 취지를 모르고 시비하는, 그야말로 나쁜 나무에 좋은 열매를 맺으려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고 바라는 데 이루어지지 않으니 갈등과 고통의 바다에 사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채송화가 큰 해바라기 꽃을 피우려하는 것과 같고 가을에 피는 코스모스가 봄에 피려고 하는 것과 같다. 채송화가 자그마한 꽃을 피우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코스모스가 가을에 피어야 코스모스답듯이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어야 나쁜 나무다운 법이다.
우리는 항상 자신을 부족하게 여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부족한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고 항상 뭔가 더 나은 자신이 되려고 한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부족하기 때문에 노력해서 완전해지려고 해야 하지 않는가?’
라고 할 것이다.
참으로 그림은 그럴 듯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라.
부족한 자가 노력한다면 그것 또한 부족한 노력이 아닌가? 그 부족한 노력으로 어찌 완전에게 다가갈 수가 있단 말인가?
이것은 농담이나 언어의 유희가 아니다. 진실로 그러한 것이다. 이것에 대한 뼈저린 고백과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한다.
평생을 마음에 들지 않는 나를 버리고 다른 나를 찾으려 다녔지만, 지금 과연 그런가? 대부분의 답은 ‘노’이다.
이것이 바로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하기 때문에 오는 결과이다.
부족한 자가 어떤 것을 해도 부족한 것 밖에 나오지 않는데도 스스로의 부족한 모습을 맘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늘 괴로움과 갈등과 고통 속에 살 것이다. 그래서 중생의 삶은 고해(苦海)라고 했다.
하지만 자신을 부족하다고 여기는 자가 단 한 번만이라도 진정으로 스스로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자신의 부족에 대한 뼈저린 고백과,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의 바닥까지 떨어지는 아득한 막막함에서 발가벗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한번만이라도 제대로 보기만 한다면,
부족한 자신에게서 나오는 부족한 모습을 받아들일 것이며 더 이상 그 부족한 모습을 고쳐 자기에게 없는 것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그 부족함 속의 완전함을 받아들이며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대로 살아갈 것이다.
자기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
더 이상의 갈등을 하지 않는 것,
그리하여 나쁜 나무가 자신의 나쁜 열매를 맺고도 그를 탓하지 않듯이 부족한 우리는 부족한 우리의 모습을 탓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자가 될 것이다.
이것이 생각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지독한 감옥이 타인의 시선이다.
하지만 그 감옥에서 나를 지키는 나쁜 간수는 바로 ‘나’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고, 자신에게 없는 잣대를 갖다 대며, 나를 볶아 대는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다.
엄밀히 말하면 잣대를 쥐고 ‘비교하는 생각’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남의 것, 책 속의 것, 좋은 말의 것, 등등 늘 자신에게 없는 것과 비교하고 살피는 그 생각이 바로 간수다.
하지만 이 간수가 들고 있는 채찍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남의 것, 책 속의 것, 좋은 말의 것일 뿐이다. 그리고 평생을 단 한 번도 빗나가지 않고 그런 좋은 말처럼 사는 사람도 이 세상엔 아무도 없다.
그리고 이 실재하지 않는 간수는 우리가 스스로를 시비분별 하지 않기만 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평생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크고 지독한 감옥 역시 아침 햇살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이슬과 같은 것이다.
내가 오래 전에 아는 기독교 신자 아주머니가 있었다.
이 아주머니는 주일마다 교회에 가서 하던 예배를, 어느 날 무엇에 걸려 자신이 너무나 죄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때부터 그 사람은 교회에서 하는 모든 영성행사에 다니면서 하늘을 보고 부르짖으며 자신의 죄를 사해달라고 하느님께 빌었다.
그냥 빈 것이 아니라, 꿈속에서 나타날 만큼 잠시도 끊어지지 않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이 년이란 세월이 흘러가도록 빌고 또 빌었지만, 오히려 그녀의 마음만 더욱 더 피폐해지고, 자신은 오히려 벗어날 수 없는 죄인만 되어갔다.
즉 다닐수록 더더욱 좋은 말과 거룩한 말을 더 배우고, 그럴수록 자신은 나쁜 죄인이 되어간 것이다.
그렇게 2년을 울고 다니다가, 어느 날 저녁, 문득 자신을 되돌아보다가
“아! 나는 정말로, 정말로 죄인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은 이 년 동안 빌 던, 즉 자신이 죄가 많아서 하느님께 빌어 깨끗해질 수 있는 그런 죄인이 아니라, 아무리 빌어도 자신은 절대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죄인이라는 사실이 가슴속에 사무치게 와닿닸던 것이다.
그렇게 죄인에서 벗어나려는 그녀는, 그 사실을 느끼자 하늘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펑펑 울었다.
그렇게 밤새 울다가 자신도 모르게 지쳐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자신에게 무엇인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이상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니, 이 년 동안 그렇게 없어지길 바라던 죄가 흔적 없이 사라진 것이다.
아무리 찾아도 죄를 찾을 수 없었다.
너무나 신기하고 이상한 기분으로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그녀는 자기 생각이 자기를 죄인으로 만들었음을 깨달았다.
즉, 그 동안 죄를 없애려는 노력 속에서는 자기 안에 티끌만한 죄라도 있을까 하고 늘 살피던 놈이 있었는데, 도저히 구제받을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나니, 죄에서 벗어나려는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자신의 죄를 살피던 그놈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렇게 그 동안 자신의 죄를 살피던 그놈마저 사라져 버리니 더 이상 자신에게서 발견할 수가 없어진 것이다.
이 말은 뻔뻔스러워진 것이 아니라,
우리는 원래 죄가 없는데 자기의 것이 아닌 남의 것, 바깥의 잣대로 자기를 살피니, 그 거룩하고 좋은 말로 치장된 잣대에 자신이 맞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사실 그렇게 비교하고 탈탈 털 때에 세상에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거기다가 다른 사람, 다른 환경과 비교를 하니 어떤 이가 그 지독하고 나쁜 간수의 눈을 피할 수가 있겠는가?
그것도 24시간 단 한 순간도 떨어져 있지 않고 살피는 자기 생각의 눈을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자기 스스로 ‘네가 아무리 죄를 찾아 타박을 해도 이 놈은 안 돼!’라고 깨달으니 이 지독하고 나쁜 간수가 손을 들고 도망을 가버린 것이다.
결국 알고 보니, 죄인이라서 죄인이 아니라, 시비분별 하는 나쁜 간수가 타인의 시선과 시비 분별이란 있지도 않은 법과 죄목을 적용하여 자신을 죄인이라 하며 불법(不法)으로 감금해 놓은 것이었다.
천수경(千手經)에서 말하기를
“ 죄는 스스로의 성품이 없어 마음 따라 일어난다.(죄무자성종심기 罪無自性從心起)”
고 한다.
이 아주머니도 이 년 전만 해도 아무런 문제없이 살다가 문득 무엇에 걸렸는지, 자신이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바람에 그렇게 고통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 체험을 통해 그녀는 죄뿐만 아니라 모든 삶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삶을 한 생각이 왜곡하고 고통 속에 빠뜨린다는 것을 깨닫고, 그 이후부터 너무나 가볍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
아니 죄가 사라져 다시 그 죄속으로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쁜 나무엔 나쁜 열매가 열린다.?
엄밀히 말하면 세상에는 나쁜 나무도 좋은 나무도 없다. 서로 비교하고 시비하고 분별하니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이 법을 깨닫지 않은 사람이면, 세상에서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그런 사람이라도 자신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있고, 또 그럴 때마다 자신을 질책한다. 평생을 살면서 단 한 순간도 그렇지 않은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그러하다.
특히 불교에서는 육바라밀(六波羅密)이라는 것이 있어서, 불자들은 늘 바라밀의 실천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을 하지 않으면, 마치 입 속에 가시가 돋듯, 실천하는 불자의 삶이 아니라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늘 사랑을 해야 하고, 보시를 해야 하고, 인욕을 해야 하고 등등.... 지금의 자신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이 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잘 되지 않으면, 늘 부처님 상 앞에서 그러하지 못한 자신을 꾸짖어 달라고 애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부처님께서는 통탄할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부처님의 말씀은, 모두가 공하여서 공함도 없음을 설하시고, 화엄경에서는 세상에 불국토가 아님이 없어서,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 그대로가 바로 부처임을 누누이 말을 하는데 말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하고, 그 하지 못하는 자책으로 스스로를 미워하고, 또 스스로의 싫어하는 모습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남의 그 마음을 탓하니, 늘 그 마음속에는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화탕지옥(火湯地獄)처럼 들끓어서 끊임없는 고통 속에 허덕이는 삶을 헤매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야말로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하고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까 두려워하는 것과 같아서 어찌 번뇌가 끊일 날이 있겠는가? .
진정한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으뜸은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이라고 했다.
돈오입도요문론(敦悟入道要文論을 지으신 대주혜해(大珠慧海 - 마조스님의 제자)스님께서
(돈오입도요문론은 문답식으로 되어 있다.)
“이 돈오의 문은 어디로부터 들어갑니까?”
“단바라밀(檀波羅密)로부터 들어가느니라.”
“어떤 인연으로 단바라밀이라고 합니까?
“단(檀)이란 보시(布施)를 말하느니라.”
“어떤 물건을 보시하는 것입니까?”
“보시는 두 가지 성품을 버리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두 가지 성품입니까?
“ 선(善)과 악(惡)의 성품을 버리는 것이며, 있음(有)과 없음(無)의 성품, 사랑함(愛)과 미워함(憎)의 성품, 공(空)과 공 아님(不空), 정(定)과 정 아님(不定)의 성품과, 깨끗함(淨)과 깨끗하지 아니함(不淨)의 성품을 버려서 일체 모든 것을 전부 보시하면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을 얻느니라.
만약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을 얻을 때에 또한 두 가지 성품이 공하지 아니하다는 생각을 짓지 아니하며, 또 보시한다는 생각도 짓지 아니함이 곧 진실로 보시 바라밀을 실행하는 것이니, 만 가지 인연이 함께 끊어진다고 하느니라.
만 가지 인연이 함께 끊어진다 함은 곧 일체 법의 성품이 공하다는 것이니 법의 성품이 공하다 함은 곧 일체 처(一切處)에 무심(無心)함이니라.
만약 일체 처에 무심함을 얻었을 때에는 한 모양(一相)도 얻을 수 없으니, 왜냐하면 자성이 공한 까닭에 한 모양도 얻을 수 없느니라. 한 모양도 얻을 수 없다 함은 곧 진여의 실상이니 진여의 실상이란 여래의 묘한 색신의 모양이니라.
금강경에 이르기를
‘일체의 모든 모양을 떠나는 것이 곧 모든 부처님이라 한다.’고 하였느니라.”
라고 하신 것처럼 보시란 무엇을 남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보시는 분별하지 아니하여서
좋은 것을 택하려하고, 나쁜 것을 버리려하지 않음을 보시라고하고,
사랑함을 따르고 미워함을 버리려하지 않음을 보시라고 한다.
있음을 따르고 없음을 버리려하지 않음을,
공(空)을 따르고 공(空)하지 않음을 버리려하지 않음을,
정(定)을 따르고 정(定)아님을 버리려하지 않음을,
깨끗함(靜)을 따르고 깨끗하지(靜)않음을 버리려 하지 않음을 말한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고 갈 수 있도록 내버려두고, 그것이 가고 나면 또 다른 마음이 와서 살다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 그리고 그것을 좋다 나쁘다, 깨끗하다 더럽다 하지 않고, 일체의 분별을 여의어서 따르거나 거스름이 없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보시요,
그것이 바로 나쁜 나무에는 나쁜 열매가 맺음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다워진다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보시오, 육바라밀의 첫 번째인 것이다.
그리고 누가 우리를 보고 ‘나쁘다 좋다.’ 하고 ‘완전하다 부족하다.’ 하는가?
그것은 모두, 생각이란 놈이 만들어낸 분별의 영상에 비친 한갓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일 뿐 세상에는 완전과 부족이라는 것은 없다. 모두가 다 인연의 모양일 뿐...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여기는 자가, 나쁜 나무가 절대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듯이, 부족한 자에게선 부족한 것만 나올 수밖에 없고, 절대로 완전한 것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는 더 이상 구하지 않는 자가 될 것이다.
사랑도 구하지 않고, 행복도 구하지 않고 자유도 구하지 않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는, 그 구하지 않는 곳에서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사랑이니 행복이니 자유니 하는 것들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만들어낸 습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한 것들은 우리의 생각 속에만 존재하지 실상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되고, 아무리 봐도 사랑이 없는 것 같고, 행복이 없는 것 같고, 자유가 없는 것 같아서,
사랑하는 자가 되길 바라고,
행복한 자가 되길 바라고,
자유로운 자가 되길 바라는
그 부족하고 못난 그대로가 그 무엇보다도 완전한 자신을 발견하고는,
더 이상 비교하지 않고 시비하지 않는 자가 되어
사랑하는 자가 되고,
행복한 자가 되고,
자유로운 자가 되고,
모양만 다를 뿐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아름답고 자신으로 살아갈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바라던 사랑이, 행복이, 자유가, 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속에 완전하게 구비되어 있다.
그리고 깨달음은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지만 한없이 자유롭고, 그 자유는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무소득(無所得 : 얻은 것이 없는)의 깨달음이다.
다시 자신의 고통을 보라, 나쁜 나무가 열리지도 않을 좋은 열매를 바라고 있어서, 결코 사랑이나 행복이나 자유가 없듯이, 자신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자가 부족함에서는 결코 생길 수 없는 완전을 바라고 있기에, 자신에게는 사랑이나, 행복이나, 자유는커녕 고통밖에 없지 않은가?
다시 말하지만, 그 바람을 없애지 않는 이상, 그는 영원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을뿐더러, 그렇게 간절히 바라는, 사랑과 행복과 자유는 죽을 때까지 맛도 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통감할 때에, 구하는 그 마음이 철저히 죽을 때에, 그리고 그 부족함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일 때에
완전함을 바라고 있는 부족한 자가 아니라,
노력하면 될 것 같은 부족한 자가 아니라,
진정으로 부족해서 온통 부족밖에 없어서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이라는 것은 도저히 얻을 수가 없는 자라는 것을 뼈저리게 통감하고 부족을 받아들여 부족과 하나가 되었을 때에,
완전을 바라는 마음은 사라지고 오직 부족만 남을 것이다.
온통 부족밖에 없는 곳에 무슨 ‘완전’이란 상대적인 모양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오직 부족밖에 없다면 그것을 부족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가?
부족과 완전은 비교할 때에 존재하는 것이지 오직 부족밖에 없을 때에 부족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름일 뿐이요, 완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인 것이다.
그래서 마조스님은
“미혹이 없으면 깨달음이 없고, 깨달음이 없으면 미혹도 없다.”
고 했다.
그 곳엔 오직 있는 그대로의 자신만 있다.
그 때에 비로소 그에게
자유의 빛과 사랑의 빛과 행복의 삶이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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