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포정(庖丁)의 도(道), 두께 없는 칼을 쓰다.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2,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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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정(庖丁)의 도(道), 두께 없는 칼을 쓰다.
장자(莊子)의 양생주(養生主)편에 보면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글이 있는데, 포정해우는 포정(庖丁 : 요리사, 또는 도축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소를 잡는 것을 비유로 도(道)를 이야기하는 글이다.
포정(庖丁 : 소 잡는 요리사)이 문혜군(文惠君 : 전국시대 양나라 군주)을 위하여 소를 잡는데, 그가 손으로 잡고 어깨로 받치며 발로 밟고 무릎으로 누르면서 뼈와 살을 바르는 소리와 가벼운 칼 솜씨가 음률에 맞지 않는 것이 없어 그의 동작은 마치 상림의 춤(桑林之舞 : 은나라 탕왕이 상림에서 기우제를 지내면서 추는 춤)과 같았고, 경수의 박자(經首之會 : 요임금이 상제에 제사 지내며 연주하는 음악의 박자)와 같이 들어맞았다.
(庖丁爲文惠君解牛 手之所觸 肩之所倚 足之所路履 膝之所倚 砉然響然 奏刀豁然 莫不中音 合於桑林之舞 乃中經首之會)
문혜군이 말했다.
“아~! 참으로 좋구나! 기술이 어떻게 이런 경지까지 이르렀는가?”
포정이 칼을 놓고 대답했다.
“신이 좋아하는 바가 도여서 기술보다 앞서기 때문입니다. 신이 처음 소를 잡았을 때는 보이는 것이 소가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온전한 소가 보이지 않았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정신으로 소를 대할 뿐 눈으로는 보지 않아 감각의 앎은 멈추고 정신이 가고자 하는 대로 합니다.
하늘의 이치(天理)를 따라 큰 틈새를 열어젖히고 큰 뼈마디 틈새를 따라 칼을 넣는 등 본래 그러함을 따르니 힘줄이나 근육에 부딪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물며 큰 뼈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文惠君曰 嘻 善哉 技蓋至此乎 庖丁釋刀對曰 臣之所好者道也 進乎技矣 始臣之解牛之時 所見無非牛者 三年之後 未嘗見全牛也 方今之時 臣以神遇而不以目視 官知止而神欲行 依乎天理 批大郄 導大髖 因其固然 技經肯綮之未嘗 而況大軱乎)
좋은 솜씨의 백정은 한 해에 한 번 칼을 바꾸는 것은 살을 베기 때문이요, 보통의 백정들은 한 달에 달마다 칼을 바꾸니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의 칼은 19년째 사용하고 있고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으나 칼날이 마치 숫돌에서 방금 간 듯합니다.
이는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지만 저의 칼에는 두께가 없는 것 같아, 틈이 있는 곳에 두께가 없는 것을 넣으면 크고 넓은 공간에 칼이 노니기에 반드시 여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까닭에 19년이 지나도 칼날은 마치 숫돌에서 방금 간 듯한 것입니다.
(良庖歲更刀 割也 族庖月更刀 折也 今臣之刀十九年矣 所解數千牛矣 而刀刃若新發於硎 彼節者有間 而刀刃者無厚 以有閒入無厚 恢恢乎其於遊刃 必有餘地矣 是以十九年而刀刃 若新發於硎)
하지만 매번 뼈와 살이 엉켜있는 곳에 이르면 저는 그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경계하며 그것에 눈을 두고 천천히 행동하면서 칼의 동작은 섬세하며 재빠르게 하여 해체해버리면 마치 흙이 땅에 떨어져 쌓이듯 쌓이게 되고, 저는 칼을 든 채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만족한 기분으로 칼을 잘 닦아 챙겨 넣습니다.”
문혜군이 말하기를
“훌륭하구나 나는 포정의 말을 듣고는 양생의 도를 터득하였도다.”
라고 하였다.
(雖然 每至於族 吾見其難爲 怵然爲戒 視爲止 行爲遲 動刀甚微 謋然已解 如土委地 提刀而立 爲之四顧 爲之躊躇滿志 善刀而藏之 文惠君曰 善哉 吾聞庖丁之言 得養生焉)
이 이야기의 핵심은 뼈마디에는 틈이 있는데 포정의 칼날에는 두께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는 두께가 없는 것이 틈이 있는 곳에 넣기 때문에 그 넉넉함이 칼을 휘두르는데 거침이 없어 그 칼은 늘 새로 간 듯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의미는 참으로 금강석과 같은 도와 지혜를 이야기 하고 있음을 본다.
장자(莊子)는 노자(老子)의 뒤를 이은 도가(道家)의 사상가이다.
사람들은 노자나 장자를 읽을 때에 대부분 정치사상이나 양생술(養生術) 정도로 이해하고 읽는다.
특히 노자의 도덕경은 군주가 세상의 사람들을 위해 행하는 정치적 철학서 정도로 이해하는데, 노자와 장자는 그런 이야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자연의 이치, 즉 이 한 법의 이치인 법을 이야기하고 있고, 그리고 우리가 바로 그것이어서 각자 모두가 함께 하는 이 한 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세상을 다스리는 위정자들이 이런 생각으로 세상을 위해 산다면 조금이라도 세상은 나아지겠지만, 도(道)는 마음이기 때문에 사람들이나 세상이 그 영향은 받아도, 그 영향이 그의 것으로 소화되지 못하면 위정자가 바뀌면 금방 증발해버리는 떨어진 물방울과 같다.
그래서 이들의 글을 읽을 때는 하나의 사상 정도로 읽어서는 그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이 법의 근본을 이야기하고 있음으로 보아야 제대로 읽을 수 있고 자신의 삶에 보탬이 된다.
포정의 칼에 두께가 없다는 것은 양변, 즉 잣대가 없다는 것이다.
양변을 여의었다는 것은 항상 중용(中庸)을 쓴다는 말이다.
그리고 중용은 양변을 여읜 중간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잣대 자체가 없어 이쪽, 저쪽 그리고 중간 등 어디를 만나더라도 매 순간 그것과 함께 한다는 뜻이다.
그것을 부대사(傅大士)는
“밤이면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야야불포면(夜夜佛抱眠)
아침이면 아침마다 함께 일어나네 조조환공기(朝朝還共起)
부처가 간 곳을 알고자 한다면 욕지불거처(欲知佛去處)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그치는데 머물러라 어묵동정지(語黙動靜止)”
라는 선시(禪詩)로 표현했다.
즉 말할 때는 말하고, 침묵할 때는 침묵하고, 움직일 때는 움직이며, 움직임을 그칠 때는 그치는데 머무는 것이 바로 매 순간의 삶, 즉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갈 때 있지도 않은 이쪽 저쪽 등의 다른 쪽을 만들어 비교하거나 시비하지 않고 늘 인연 따라 여여(如如)하니, 마치 늘 새로 갈아 놓은 칼과 같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위의 글 중에서
“좋은 솜씨의 백정은 한해에 한 번 칼을 바꾸는 것은 살을 베기 때문이요, 보통의 백정들은 한 달에 달마다 칼을 바꾸니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의 칼은 19년째 사용하고 있고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으나 칼날이 마치 숫돌에서 방금 간 듯합니다.
이는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지만 저의 칼에는 두께가 없는 같아, 틈이 있는 곳에 두께가 없는 것을 넣으면 크고 넓은 공간에 칼이 노니기에 반드시 여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라는 말 중에
보통의 백정들이 뼈를 자른다는 말은 뼈를 건드려 부딪힌다는 뜻이고, 부딪히는 것은 모두 힘으로 해쳐나간다는 뜻으로, 오해를 풀고 이해하기보다는 옳고 그름을 따져 이기고 지는 시비분별을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딪침이 많으니 뼈를 자른다고 비유한 것이다.
좋은 솜씨의 백정이 살을 벤다는 것은, 세상을 오해에서 삼을 빼서 이해를 하는 것으로 서로가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삶은 웬만하면 부딪히지 않으니 부드러운 살을 베는 것에 비유를 하고,
하지만, 뼈를 자르듯이 일마다 시비하며 옳고 그름을 따져 부딪히는 사람은 삶에서 많은 상처를 입게 된다. 그래서 칼날에 비유하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쯤은 갈아줘야 할 만큼 자주 무디어진다는 것이고,
또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살아도 불만의 근원이 완전히 해소가 되지 않으므로 삶에 상처를 입게 된다. 그것을 칼에 비유하면 자주는 안 갈아도 1년에 한 번쯤은 갈아줘야 할 정도로 무뎌진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법 그 자체임을 알지 못하고 생각을 주인으로 모시고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께가 없는 칼을 쓴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잣대가 없으니 양변이라는 것이 없다.
양변이 없으면 자연히 시비분별 할 잣대가 없어져 어떤 일을 만나도 부딪히지 않고 늘 함께 하므로 그 지혜는 아무리 써도 걸림도 없고 다함도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써도 무디어지지 않고 새로 간 칼날과 같아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한 티끌의 변화도 없는 이 한 법의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의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다.
포정해우(庖丁解牛)는 이것을 말하는 이야기다.
분별하지 않으면 아무리 환경이 열악하고 힘들더라도 걸림이 없으니 늘 여유가 있다.
하지만 분별이 있으면 아무리 환경이 풍요롭다 하더라도 그 분별의 잣대에 걸리지 않을 수 없으니 넓이의 차이만 있을 뿐 늘 걸림이 있고 번거롭다. 그래서 아무리 날카로운 칼처럼 지혜가 많아도 그 반대의 것에까지 칼을 대야 하니 결국 쓸수록 무디어 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포정의 칼이 19년을 써도 날이 무디어지지 않아 항상 처음 간 것처럼 예리하다는 것은, 참 지혜가 있어 분별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으니 좋고 나쁨이 없고, 좋고 나쁨이 없으니 집착이 없고, 집착이 없으니 습이 붙지 않아 닦고 수행할 필요가 없으니 그 지혜는 처음 간 날처럼 늘 새롭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디에 무디어질 것이 있을까?
이것이 바로 금강석과 같은 단단한 지혜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그냥 보면 소 잡는 기술이 뛰어난 신기(神技)를 말하는 듯 보이지만,
그 의미를 깊게 보면
일체 법에 머물러도 늘 그 자리에 머무는 것과 같이 일체의 시비와 분별이 없어 무디어지지 않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무디어지지 않는 지혜는 곧 금강반야바라밀을 말하는 것이니, 두께 없는 칼을 들고 그 틈새를 누비는 포정의 도는 정말로 지극하고 금강석 같은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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