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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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자리에는 차별이 없다.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2,136

20-03-25 21:15

본문

본래 자리에는 차별이 없다.

 

이 글은 오래 전에 어떤 분이 제게 질문을 하고 제가 대답한 것으로 옛날 홈페이지에 있던 것인데,

시간이 지나 다시 보니 괜찮은 내용 같아, 이 글에 여러 가지로 덧붙여 반은 새로운 글로 만들어 올립니다.

 

 

 

[질문]

 

1. 도를 안, 다시 말해 깨달은 사람이 지금 죽었고 도를 못 깨친 사람도 지금 죽었습니다.

이 두 상황은 같은가요? 다른가요?

어느 책에서 로마의 황제인 마르쿠스 아루렐리우스가 죽기 전에, ‘죽으면 황제나 거지나 똑같지 뭐.’라고 말했다는 글을 보고 문득 의문이 생겼습니다.

 

2. 깨닫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고 보십니까?

수행의 방법은 많이 알려졌지만 진정 깨달은 사람 찾기 힘들고, 또 어느 스승은 방하착(放下著)하라 하여 아무런 수행의 방편을 주지 않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참선하라 하기도하고...

님은 무엇을 권하고 싶으세요? 그냥 쉬는 것? 아니면 참선? 님의 경험에 비추어 한 말씀 일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합장..

 

 

[답변]

 

본래 자리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나고 죽음 역시 없습니다.

 

다만, 본래 자리의 성품을 빌어서 세상 만물이 일어났다 사라질 뿐입니다.

 

즉,

본래 자리에서 보면 일어남과 사라짐은 바다에서 파도가 일었다 바다로 떨어지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바다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요.

 

세간의 모든 살림살이는 바다 위의 파도처럼 생겼다가 사라지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지만,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여전하듯이(조금도 늘지도 줄지도 않고, 탁해지지도 맑아지지도 않듯이) 본래 자리는 늘 그대로 여여할 뿐입니다.

우리의 본마음(本性)도 이처럼 늘 여여(如如)합니다. 왜냐하면 본마음이 곧 본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지풍광(本地風光) 이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 본지풍광(本地風光) : 모든 것이 본래 자리의 모습이라는 뜻, 풍광(風光)은 자연이나 세상의 모습 또는 사람의 용모와 품격을 말함.

 

우리는 개체의 존재여서 인연에 따라 생각을 일으키고, 또 그 일으킨 생각들끼리 서로 옳고 그름을 따져 분별하고, 그 분별 된 생각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아파하며 고통을 받고 살지만 우리의 본마음은 그것들과 상관없이 늘 여여합니다.

 

본마음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우주 만물이 그 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져도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탓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간에서는 질량이니 부피니 하는 것들로 우주의 무게를 재고 있지만, 허공은 그것을 많다고 비좁아하거나 그것이 무겁다고 땀을 흘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마음도 그러합니다.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많다고 하거나 무겁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마음을 비우라고 하면 마치 일어나는 생각을 없애고 욕심을 없애는 것으로 착각하여, 자신이 세운 잣대에 맞지 않는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이 너무 무거워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그것을 없애고 일어나지 않게 하여야 비로소 마음이 비워진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자신의 허공과 같은 본마음으로 돌아가, 일어나는 생각이나 욕심이나 또는 그보다 더한 어떤 것들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에 흔들리거나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감정들을 생각의 잣대로 분별하거나 시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으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바깥 세상에 대해서도 어떤 분별도 시비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마음은 인연만 되면 그러한 생각들이 일어나는 허공과 같은 것이어서, 그러한 생각들이 일어나도 그 생각들이 어떤 모습으로 일어나든지 간에 허공과 같이 전혀 상관하지 않고 다 받아주고 그 인연만큼 살게 합니다.

마치 허공이 그 속에 무수한 새가 날아가게 하지만 한 점의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본마음은 그러한 생각들에 의해서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고서 물들지 않고 또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 일어날 수 있도록 넉넉하고 한계가 없이 텅 비어 있어 어떤 생각이든 그 모양이나 크기에 구속받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안에 생각에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져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이 생각에 물든다면, 앞의 생각이 마음에 자리하고 있어서 다음 생각이 이어져 일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토록 생각 때문에 고민하고 자신을 쥐어짜며 살았어도 여전히 생각을 하며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역으로 이 마음이 텅 비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일어나고 사라지게 함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렇듯 여여한 본래 자리가 바로 우리의 여여한 본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로 자성 그 자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그 곳에는 깨달은 사람이나 못 깨달은 사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깨달은 사람이나 못 깨달은 사람이나 어쨌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는 것은 모두가 본래 자리의 성품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어난 현상에서 바라보면 서로가 달라 보이지만, 그것이 일어나는 근본에서 바라보면 모두가 같을 뿐입니다.

 

님께서 제게

“도를 안, 다시 말해 깨달은 사람이 지금 죽었고 도를 못 깨친 사람도 지금 죽었습니다.

이 두 상황은 같은가요? 다른가요?

어느 책에서 로마의 황제인 마르쿠스 아루렐리우스가 죽기 전에, ‘죽으면 황제나 거지나 똑같지 뭐.’라고 말했다는 글을 보고 문득 의문이 생겼습니다.”

라고 물으셨는데,

 

앞에서 제가 말한 바와 같이 현재 살아 있어 우리가 그것을 직접 차별하고 분별하는 것조차도 본래 자리에서 본다면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이미 죽어서 말할 대상이 사라진 것에 더 물어 무엇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자리에는 생사라는 것조차도 없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드러난 우리의 모습이나 생각이나 눈에 드러난 현상계인 삼라만상은 늘 일어났다 사라지며 잠시도 머물지 아니하고 변화하고 있지만, 그 본래 자리는 단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죽음뿐만 아니라 우주가 다 지금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깨어져서 산산이 조각나 버려 형체조차 없어진다고 해도 그 자리는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고 늘 여여하게 존재합니다.

 

그것은 마치 건물이 무너져도 허공에는 조금의 티끌도 남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 세간에서 ‘깨달았다.’ ‘깨닫지 못했다.’ 라고 하는 것이 세간법(世間法)에 의지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차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는 참으로 중요하겠지만, 그것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본 자리에서는 한 물건도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본 자리가 드러난 것이 세상살이이니 비록 죽음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깨달았든 깨닫지 못했든 다를 것 없이 모두가 다 똑같습니다.

 

다만 한 사람은 알고 다른 한 사람은 모른다는 것일 뿐입니다.

즉 깨달은 사람은 알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는 것일 뿐, 그 법칙은 모두에게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모든 삶은 똑 같습니다.

죽음도 기왕의 형체에서 볼때는 큰 변화일지 몰라도, 이 한 법인 본래 자리에서 볼 때에는 다시 다른 수많은 인연이 되어 드러나는 것이니 결국 삶의 한 연장일 뿐인데 다를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인연 지어서 나타납니다.

우리의 육체 또한 마찬가지이고 그 육체를 이끌고 다니는 그 생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세상만법 역시 인연에 의해서 세상에 드러난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인연을 전체로 보지 않고 자신들이 보고 싶은 면만 잘라서 인과로 봅니다.

그렇게 보더라도 세상에 드러난 것끼리 그러고 있으니 이런 의미로 볼 때에는 부처님도 인과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자신은 인과에 물들지 않지만 세상이 인과에 물들어서 부처님을 옳으니 그르니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아닙니까?

 

지금에선 예수님이 구세주이지만, 그 당시 유대 율법에서 본다면 이것은 대역무도한 죄요, 나아가 시비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자신들을 위협하는 존재로 도적질이나 살인이나 간음보다도 더 큰 죄인이었습니다.

 

수천 년의 역사 위에 세워진 유대라는 율법이 예수라는 존재에 의해 사라진다면, 만약 우리가 그 당시의 율법 학자라해도 역시 그 율법 학자들처럼 예외 없이 예수님을 처형했을지 모릅니다.

 

사실 지금도 자신의 잣대로 분별하고, 특히 도를 많이 공부했다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공부에 대한 공력에 자부심만 키워 가지고 자신의 잣대로 남을 단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그때의 율법 학자와 다를 것이 뭐 있겠습니까?

그들의 눈에는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수행이나 계율의 안경이 씌어져 있어, 만약 그것에 벗어난다면 옆에 부처님이 와 계신다고 해도 처형하려고 덤벼들 것입니다.

 

부처님도 인과를 피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다만,

깨달은 자는 인과라는 것은 세간법에서만 존재하는 것일 뿐 이 한 법 본래 자리에는 인과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에 매이지 않을 뿐입니다.

 

아는 자는 죽음으로 인해 사라짐은 육체가 그냥 흩어지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모르는 자는 그 사라짐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으로 여기니까 두려워할 뿐이죠.

 

이처럼 차별적인 생각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본래자리에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은 언제나 여여할 뿐입니다.

 

두 번째의 답은,

 

(두번째 질문 :

깨닫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고 보십니까?

수행의 방법은 많이 알려졌지만 진정 알은 사람 찾기 힘들고

또 어느 스승은 방하착 하라 하여 아무런 수행의 방편을 주지

않기도 하고, 참선하라 하기도 하고 .....

님은 무엇을 권하고 싶으세요? 그냥 쉬는 것? 아님 참선...

님의 경험에 비추어 한 말씀 일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미 앞의 것을 잘 살피면 다 나온 것입니다.

 

차별적 생각(일어난 일들을 뒤에 판단하여 옳다 그르다 분별하는 뒷생각) 역시,

본마음 바탕 위에서 인연에 따라서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육체이든, 생각이든,

그 어떤 것도,

자성의 성품(본래 자리, 본마음)이 없으면,

티끌 하나도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하다면,

우리가 앎으로 나아가는 도구로 여기는 생각이라는 것 역시,(알음알이, 뒷생각)

자성의 성품에 의지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성의 성품에 의지한다는 것은

스스로 성품이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성품이 없다는 것은

즉, 허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자체로의 성품이 없는 뒷생각을 아무리 굴려봐야,

깨달음으로 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진아는 생각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알음알이라는 뒷생각을 있게 하는 의식 너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진아를 알려고 한다면,

뒷생각(분별하는 생각)의 의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뒷생각에 의지하지 않으면,

진아는 자연히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여서, 진아라는 어떤 모습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진아를 가리고 있는 생각, 즉 알음알이가 사라지면서,

여여한 마음 본 자리를 알게 되고

그 본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매 순간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하니, 문제는 뒷생각일 뿐입니다.

 

수행에 대해선 제가 드릴 말씀이 별로 없습니다.

전 제도적인 수행을 거의 한번도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선도, 관법도, 호흡법도, 명상도....

 

다만,

저는 저의 문제가 너무 절실하여서,

그것에 끊임없이 매달렸을 뿐입니다.

 

님이 두 번째 질문에서

 

“깨닫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고 보십니까?

수행의 방법은 많이 알려졌지만 진정 깨달은 사람 찾기 힘들고, 또 어느 스승은 방하착(放下著)하라 하여 아무런 수행의 방편을 주지 않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참선하라 하기도하고...

님은 무엇을 권하고 싶으세요? 그냥 쉬는 것? 아니면 참선? 님의 경험에 비추어 한 말씀 일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님의 질문 속에 답이 다 나와 있습니다.

 

즉,

방하착하라 하여 수행의 방편을 주지 않거나, 참선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절실한 마음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절실하지 않기 때문에 방편만 찾아다닐 뿐입니다.

그 방편이라는 것은 모양만 다를 뿐, 하나를 이야기하는 같은 것인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굳이 제 방법을 이야기하라면, 생각을 간섭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뒷생각을 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생각에 간섭하지 않는 방법은 모든 생각이 일어나는 것도 결국 이 한 법의 작용이기 때문에 처음 일어나는 생각이 비록 이 한 법에 의해 일어났으나, 그것은 스스로의 성품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때의 상황이 이 한 법의 인연에 의해 그러한 생각의 모양으로 일어난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에 옳으니 그르니 하며 시비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즉 뒷생각으로 분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한 법은 본래 모양이 없어 오직 법칙과 작용에 의해 인연으로 세간을 드러내고, 그렇게 드러낸 것이 바로 드러난 모양 있는 모든 것과 우리의 머릿속에만 있는 모양 없는 생각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모양과 생각들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인 인연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스스로 성품이 없습니다.

 

이처럼 세상에 드러난 것들은 항상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록 우리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해서 그러한 것이 일어날 때 마치 그것이 실체를 가지고 있는 듯하고 또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이 여겨지지만, 그것은 이 한 법의 그림자일 뿐 실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간섭을 하든 하지 않든 그것이 머무는 시간은 인연의 시간 차이가 조금 있을 뿐, 인연이 끝나면 어떤 것이든 절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생각도 이와 같이 인연의 산물이어서 그것을 비켜갈 수는 없으니 그냥 우리가 간섭할 필요없이 내버려두면 그것은 이 한 법의 인연을 따라 흘러갈 뿐 우리에게 어떤 영향도 미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오랜 세월을 생각에 끌려다니며 길이 들었기 때문에 그만두는 것이 사실 겁이 나서 당장에 잘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의 어떤 것도 스스로의 성품이 없듯이 생각도 그러합니다.

 

더구나 세상에 드러나 형체가 있는 것들은 그래도 그 순간에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 실재의 것들에 대한 생각이나 의견, 또는 의미들은 사람들의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생각으로 꾸민 환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그 생각이 우리를 어찌하겠습니까?

 

그래서 생각을 따라가지 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따라가는 것은 바로 앞생각에 시비하거나 맞장구를 치는 뒷생각으로 환에 환을 갔다 붙인 정말로 허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따라간다는 것은 마치 생각이 자체의 성품이 있는 양 착각하여 그 다음의 생각을 일으키는 것으로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부정적인 것으로 일어나는 그것을 일어나지 않게 하거나 또 일어난 것을 없애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긍정적인 것으로 그 생각이 보기에 좋아 그것에 연관된 생각을 일으켜 그 생각을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는 본래 없는 즉 한 개체의 상황일 뿐인 것을 마치 전체적인 것인 양 여기고 그것을 어떻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시비분별 하는 망상일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이를 낳지 못하는 돌로 만든 여자(石女)에게 아이를 낳게 하거나 낳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일어나는 생각을 막으려는 것은 석녀에게 아이를 낳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고, 일어나는 생각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석녀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애초에 아이를 밸 수조차 없는 석녀에게 낳으라느니 낳지 말라느니 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불성설(語不成說)이겠습니까?

 

이처럼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각을 뒷생각으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 역시 어불성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 생각들이 의지를 가진 실체여서 실제로 스스로의 성품이 있다면 뒷생각이 아무리 어떻게 하려고 해도 그 자체로 의지가 있는 실체인데 그것이 생각에 휘둘리겠습니까?

 

이런 것을 볼 때에 일어나는 생각을 분별하여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들은 바로 우리의 삶의 모습입니다.

즉, 우리의 매 순간 순간의 생각과 감정들이 바로 그때그때의 나의 삶이요 모습입니다.

그 생각과 감정을 따라서 행위를 했건 아니 했건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과 감정들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연이 되고 때가 되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생각들을 쓰기도 하고, 때론 아니다 싶으면 다른 생각으로 옮겨가기도 합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냥 그럴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작용과 행위는 이 한 법의 발현이고, 우리 역시 이 한 법의 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시비분별 하는 뒷생각이라는 놈은,

그처럼 그 당시의 인연에 반응하여 자연스럽게 일어난 생각들과 감정들을 두고, 찰나라도 시간이 지나 상황이 바뀌고 나면 그 상황에 아부 하면서,

자신이 앞에서 일으킨 생각을 옳다 그르다 하며 시비하고 분별하여, 옳으면 제 것이라 자랑하며 우쭐 거리고, 그르면 제 스스로 한 짓을 마치 그러한 생각을 하는 또 다른 누가 있는 듯 자신의 발을 슬쩍 빼고는 스스로를 쥐어뜯습니다.

 

바보 같은 우리는 생각의 종이 되어 우쭐 거리면 같이 우쭐 거리고 쥐어뜯기면 쥐어뜯기는 자로 끙끙거리고 자학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각은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 선물로 얻은 꽤 쓸모 있는 도구입니다.

즉 이 한 법인 우리가 개체로 생겨나 다른 수많은 한 법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서로를 구별하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이 생각이란 놈은 그리 정밀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생각은 기억이라는 것이 있어 앞뒤를 꿰 맞추는 능력이 있다 보니, 생각은 자신이 본 세상의 지식이 점점 쌓이면서 마치 자신이 세상을 판단하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면서 우리의 주인 노릇까지 하는 놈입니다.

 

그런데 실제는 허상입니다.

즉 생각은 매 순간 행동하는 실제가 아니라 이미 지나간 자료들을 쌓아 만든 것에 의지하는 놈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삶이 대부분 특별하지 않고 일상적이다 보니 어제와 오늘이 생각으로 볼 때는 별 다름이 없어, 때에 따라 생각이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하면 대부분 그렇게 행해지니 마치 이 생각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있다는 만용을 부리면서 우리를 부하처럼 다루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생각은 그냥 생각일 뿐입니다.

그것도 생생한 현실의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것들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에 온 지구가 떠들썩합니다.

지구에는 병에 대해 전문가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왜 이렇게 떠들썩하고, 또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는데도, 이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과 치료약이 나오지 않을까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생각은 과거를 나름 쓸모 있게 모아놓은 것일 뿐, 일어나지 않는 일에는 어떤 능력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삶이 일상적인 것이 많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예를 비춰 봤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으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왜? 우리의 생각은 경험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특히 분별하는 생각은 완전히 과거의 잣대를 자신을 대변하기 때문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생생한 현실이나 오지 않을 미래에 대해선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우리의 몸이 생기고 난 뒤에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몸 이전의 것에 대해선 거의 아는 바가 없어, 이 한 법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비록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이 한 법의 연기작용에 의한 것이지만, 그 정보는 이 세상처럼 실제로 있는 것이 인연이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가서 없는 허깨비 같은 자료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오지 않은 삶에 대해서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미 지나간 것만 분별하기 좋아하는 생각으로서는 어떻게 진정한 산 것을 만들어내겠습니까?

참으로 부질없는 일입니다.

 

진정한 앎과 산 것은 오직 진아, 즉 본래 자리일 뿐입니다.

 

다만,

생각을 그냥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일 뿐임을 알고, 그것이 일어났다 사라지도록 내 버려두십시오.

이것이 바로 알음알이(뒷생각)를 가지지 마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참으로 힘듭니다.

뒷생각이란 놈은 항상 무엇인가 해야 하는 놈이고, 항상 뒤이어서 끊임없이 일어나 앞의 생각을 분별 판단하려는 놈인데,

그러한 습에 오랫동안 젖어온 사람이 어느 날 그것을 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뒷생각이란 놈은 더 난리를 피우게 되어있습니다.

 

이를 일러서 마조선사께서

 

“선(禪)이 깊으면 마(魔)가 깊다.”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하신 말씀이

 

“그러나 내가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그것은 내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힘들어도 그냥 두세요.

 

또 혹시 자신도 모르게 생각을 따라 갔다면, 그것을 아는 즉시, 그냥 그 따라간 생각도 내버려두세요.

'아....! 내가 바보같이 생각을 따라갔군.'하고 자책하지 마세요.

그 자책이 바로 생각이라는 놈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혹시 자책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아는 즉시 내버려두면 됩니다.

 

이렇게 매 순간의 생각을 옳으니 그르니 하지 마시고, 매 순간의 삶을 받아들이고, 그 순간의 삶이 사라지면 따라가려고 하지 말고 보내주고, 또 다시 다른 생각의 삶이 들어오면 그 삶을 받아들이고 사십시오.

그렇게 매 순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금강경에서 말하는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삶이요, 부대사가 말하는 어묵동정지(語黙動靜止). 즉

“말할 땐 말함에 머물고 침묵할 땐 침묵하고, 움직일 땐 움직이고 가만히 있을 때는 가만히 있는 삶”
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분별하는 생각은 늘 현재의 삶을 자신의 생각과 비교하여, 늘 현재의 생각, 즉 말하면서도 더 잘 말하는 것과 비교하고, 침묵하면서도 더 잘하는 것을 떠올리며, 늘 현재를 살지 못하게 닦달을 하는 그 생각의 장난에서 벗어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일어났다면, 그것 역시 싫다 좋다 하면서 자신을 탓하지 말고 그냥 내 버려두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생각은 머물지 않으니 자연히 다음 생각에 떠 밀려서 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또 몇 번 경험을 하면 우리가 생각에 대해 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그 생각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 그 인위적인 한 생각’이 앞의 생각을 가지도 못하고 머물게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 생각에 속지 않으려면 역시 ‘어떻게 하려고 하는 그 인위적인 한 생각’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탓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그것이 그 생각에 속거나 유혹 당하지 않는 것이고, 그러면 그 생각은 인연에 의해 한 순간도 머물지 아니하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게그렇게

끊임없이 내버려두면 모든 것이 밝게 드러나는 때가 옵니다.

왜냐하면 그 밝음은 언제나 님과 함께 있었고 바로 님 자체이니까요.

 

수행 방법이라는 것은 따로 없습니다. 님에게는 님의 방법이 가장 잘 맞습니다.

다만 방법을 모를 때는 먼저 간 사람에게 그 원리를 배우면 됩니다.

지금 제가 말하는 이런 원리 말입니다.

그 다음은 님께서 절실히 바라고 또 바라는 마음에 따라 저절로 수행의 방법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위에서 말한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님의 그 진정한 구도의 열정으로 님께서도 밝은 삶이 열리길 진정으로 바라겠습니다.

 

늘 평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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