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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들의 피아졸라는 어디에?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1,995

20-03-09 21:14

본문

님의 피아졸라는 어디에...?

 

(이글은 이미 게시판에 있는 글인데 홈페이지를 새로 만들어 옮기면서 끝부분이 잘려 나간 글입니다. 

끝부분을 메워 붙이고 놔두거나, 이전의 글을 지울까 하다가, 이전의 글에 달린 댓글이 많아 그냥 두고, 끝부분을 마감하고 본문에도 약간 수정을 하며 몇마디를 붙여서 다시 올립니다. 

예전에 읽은 글이라도 다시 읽으면 새로운 맛이 나겠지요.^^) 

 

세상사가 모두 인연으로 일어납니다.

 

심지어 내가 생각을 하고 팔을 들어올리고, 밥을 먹기 위해 숟가락을 들고 씹는 행위까지 모두가 인연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결국 ‘나’라는 것은 인연으로 생겨나, 인연으로 보이는 존재로 존재하며, 또 인연이 다하면 사라집니다.

 

그 인연을 관장(?)하는 것이 바로 모든 수행자들이 잡고 있는 ‘이뭣고’의 실체요,

 

그 ‘이뭣고’, 또는 자성, 불성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바로 진정한 우리의 실체입니다.

(이름이야 뭐라고 붙인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일찍부터 그것이 스스로 ‘내가 자성이다. 불성이다.’ 라고 한 적도 없으니...)

 

사실 알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모르면 참으로 어렵고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냥 살면 ‘있는 그대로’ 살지만, 찾으려 하면 할수록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체가 이것이 아님이 없어 찾으면 이것이 따로 있게 되고, 이 법은 오직 한 법인 불이법(不二法)이기 때문에, 만약 지금의 이 삶과 세상을 두고 따로 있다면 그것은 환이요, 꿈이요,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이 한 법은 모양도 없고 소리도 없고 냄새 등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알 수 있는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드러난 만법과 만법의 현상을 통해서 알 수 있을 뿐, 현상을 떠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을수록 점점 더 알 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이라는 것은, 그것을 움직이는 인연과 그 인연의 법칙의 주체인 ‘이것’ 또는 이 ‘법’이 우주 삼라만상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고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스스로 삶을 주재(主宰)하고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주재한다는 것은 어떤 일을 자신이 중심이 되어 처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늘 자신의 순간순간의 삶을 되돌아보고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좋아하거나 우쭐해하고 싫은 것이 있으면 버리고 싶어서 안달을 하지요.

즉,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대단한 존재인줄 착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매 순간 후회를 하며 자신을 쥐어뜯으면서 말입니다.

 

사람이란 존재들은 대부분 그렇게 살아갑니다.

시절 인연이 좋은 사람은 살아서 그것을 끝내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평생을 그렇게 살아갑니다.

 

못난 모습보다는 멋진 모습을,

나쁜 모습보다는 좋은 모습을,

미워하는 마음보다는 사랑하는 마음을,

밴댕이 같은 마음보다는 넉넉한 마음을

작은 일에 목숨을 거는 것보다는 보다 큰일을 하는 모습을 가지고 싶어서 그것을 바라면서,

평생을 그렇게 자신을 되돌아보며, 시비하고 판단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보일 때마다 자신을 크든 작든 나무라거나 채찍질을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라고 여기고 있는 그 생각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떤 모습을 짓든 상관없이, 우리는 바로 신령한(?) ‘이 한 법’이 모양을 지어 드러낸 모습이며 인연으로 일어나는 합당한 모습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생각은 어릴 적부터 배워온, 늘 지금보다 더 나은 자신이 되라고 강요받다시피 새겨진 관념 때문에 모든 것에 대해 좋다 나쁘다는 시비와 분별의 잣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도 생각은 스스로가 그러한 시비의 인연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절대로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절대적인 기준이요 잣대로 생각하고,

그 잣대로 매 순간 자신과 대상을 판단하고,

그 판단 속에서 기뻐하고, 힘들어하고, 분노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짜증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또 다시 그러한 자신을 되돌아보고는

꼭 같은 모습을 되풀이하는 것이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하지요.

 

평생을 그렇게 말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놈입니다. 이 생각이란 놈이 말입니다.

 

그런 자신이 억울하지 않나요? 우리를 위해서 이 한 법이 붙여준 생각이란 종이, 마치 주인인 것처럼 우리를 부리고 있는 것이 말입니다.

 

한번만, 단 한번만, 진심으로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여보십시오.

그 모습이 못나든 잘나든...

긍정도 부정도 하지말고

‘그래 이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야!’

라고 하면서 그 순간 그렇게 인연이 되어서 일어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냥 넘어가보십시오.

우리의 삶은 매 순간 변화하고 또, 한 번도 꼭 같은 모습을 연출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나쁜 일을 해 놓고,

‘그래. 이것이 내 모습이야!’

하면서 즐기고 그것을 옳다고 여기고 계속 하라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냥, 그 순간 인연에 의해서 그렇게 일어났을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나쁜 모습이든 좋은 모습이든....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의 삶은 잠시도 머물지 않고 흘러가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른 삶이 찾아오고 우리는 그 삶을 살아야합니다.

 

삶이 그러한데 지나가고 다시는 오지 않을 그 인연을 언제까지 잡고 늘어지며 살 것입니까?

 

우리의 생각은 어떤 생각이 들어오면 그것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줄 압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것을 생각의 잣대로 그것을 판단하고, 그 결과를 리포트로 제출하고 또 반성을 하고 자신을 나무라야만 안심을 하는 놈입니다.

 

그리고는 좋은 일은 따라가야 하고, 나쁜 일이면 내어쳐야만 마치 자신이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것처럼 여기고 안심을 하지요.

 

단 한 번만이라도 그러한 일을 하지 말아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늘 생각을 따르는 버릇이 있어서 처음엔 뭔가 뒤처리를 하지 않은 것 같은 찜찜한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분명히 들 것입니다.

 

하지만, 그 느낌도 참고 그냥 넘어가보십시오.

몇 번만 그렇게 하면 찜찜한 느낌도 사라지고, 생각이 시킨 대로 하지 않아도 인생에 아무런 금이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냥...

세상의 일과 내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몸과 생각의 일들이 그냥 그렇게 인연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음을 바라보라구요.

 

아니 사실 바라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시비하는 생각이 없는 것처럼 살아보세요.

 

인연을 좋게 지으려거나 마무리를 마음에 들게 하려하지도 마십시오.

 

세상일이란 항상 대법(對法)으로 찾아옵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명암과 같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비록 보이는 것은 좋게 보일지는 몰라도 반드시 그 반대가 함께 찾아오지요.

 

그리고 좋은 일과 나쁜 일은 사실 좌고우면(左顧右眄)과 같습니다.

 

좌고우면은 본래 이리보고 저리 보며 눈치를 보거나 망설인다는 뜻인데, 저는 여기서는 그런 뜻으로 쓰지 않고, 이렇게 보면 나쁜 일을 저렇게 보면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뜻으로 쓰겠습니다.

 

즉, 일이란 자체로 보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냥 인연이 그렇게 되어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생각이란 놈이 바라는 것이 있고, 집착하는 것이 있는 욕심의 눈으로 바라보니, 좋은 일과 나쁜 일로 보이는 것입니다.

 

제 과거의 이야기지만 저는 사실은 이혼을 하고, 제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을 하기를 깨달음을 얻어서 제대로 된 삶을 살아보자 하고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전부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십 년을 노력하고 살아왔지요, 그래도 늘 뜨뜨미지근한 물처럼 진전이 없다가, 이혼의 아픔의 고통이 동반하면서 깨달아야겠다는 마음에 푹 잠겨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에 대한 회한으로 4개월을 울고 다녔습니다.

 

향엄지한(香嚴智閑)은 밭을 갈다가 나온 돌이나 기와조각을 대나무밭에 던지다가 어느 날, 기왓장이 대나무에 부딪히는 소리에 이 자리가 분명해졌습니다.

 

향엄이 한번 만에 알았을까요?

 

향엄이 스승 위산영우(潙山靈祐)에게 질책을 듣고는 책에서 답을 찾다가 아무리 찾아도 없기에 그동안 의지해왔던 모든 책을 불사르고, 남양혜충(南陽慧忠)국사의 탑이 있던 폐사에 와서 토굴을 짓고 농사를 지으면서 공부를 했는데,

 

먹고는 살아야 하지만, 이미 폐사가 되어버린 터에 밭이 있을 리가 만무하지요,

그래서 밭을 개간해야 하는데, 무너진 절 터 위에 밭을 개간하니 돌과 기와조각이 한 두 개가 나오겠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많은 돌을 던졌겠습니까?

그렇게 수없이 던지다가 어느 날 용케 걸린 것이지요.

 

저도 그렇게 수십 년을 깨달음을 구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는데, 이혼이라는 아픔에 용케 걸려서 사 개월을 울고 다니다가 문득 일체가 생각이 짓고 있음을 알고는 모든 고통이 사라졌지요.

 

그리고는 이 도리를 모를 때에는 그렇게 그립던 전처보다는, 이혼을 당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 도리를 알았을까? 하는 마음에, 이제는

‘참으로 이혼을 잘 당했다.’

는 생각이 드니 참으로 이쪽을 보다가 저쪽을 보는 좌고우면(左顧右眄)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이는 부도를 맞아 수십억을 말아먹고는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 있다가 문득 이 도리를 알고는, 공공연하게

“내 사업이 잘 망했어요.”

라고 말하며 다니니 참으로 좋고 나쁨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삶이란 그런 것입니다.

일체의 시비와 분란이 모두 이 한 생각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이 마치 자신이요, 주인인 것처럼 떠받들고 있으니 생각의 장난에 벗어날 날이 참으로 아득하지요.

 

그리고 인연이 맺어지는 것은 순간일지 몰라도 그 순간에 맺어질 인연이 일어나기 위해서 적든 많든 우리의 평생의 삶이 다 원인이 됩니다.

전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지금 손가락 하나 까딱거리는 것도, 태초부터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

고 말입니다.

세상일과 우리의 인연이 이러한데, 그것을 지금 우리가 어떻게 알고 판단하고 끄집어내어서 마음에 드는 대로 고칠 것입니까?

 

여러분이 어느 날 꿈을 꾸다가 느낀 것조차도 어느 순간에 그대의 생각이 되어 지금의 삶과 인연이 되고, 또 다른 인연을 짓는 생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어 있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떠도는 먼지보다 더 많은 사건들이 모여서 하나의 인연이 되는데 그것을 어떻게, 무슨 능력으로....?

 

그런데도 생각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은 할 수 있다고 당당하게 버티고 있으니 그 망상이 가히 항우보다 더 기운이 셉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무식하고 바보 같은 기운 자랑하는 생각에 속아 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끙끙거리지 말고, 그냥 매 순간 자신의 삶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한번 바라봐보십시오.

 

그렇게 정녕 그렇게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그냥 인연에 의해 일어난 하나의 이벤트로 볼 수만 있다면 그대는 매순간 자신의 일에 매이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 매이지 않고 보는 그 마음이 바로 여여한 마음입니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어떤 생각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롭고 허허로운 마음이 바로 그 마음이요,

그렇게 사는 삶이 바로 '무사인(無事人 : 일 없는 사람)의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그 삶이 가장 좋은 인연을 짓는 삶입니다.

 

그래서 달마조사(達磨祖師)께서는 혜가(惠可)에게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 마음이 장벽 같아야 가히 도에 들어가느니라.”(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牆壁 可以入道 )

라고 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인과(因果)에 떨어집니다.

하지만, 인과에 어둡지 않아 그것에 매이거나 고통받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무사인(無事人)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할 이야기의 주제는

 

‘누에보 땅고(Nuevo Tango)’, 즉 ‘새로운 탱고(New Tango)’라는 음악의 새로운 장르의 창시자(創始者)인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antaleon Piazzolla)’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921년 아르헨티나의 아름다운 해안도시 마르 델 쁘라따에서 태어납니다.

세살 때에 미국 뉴욕으로 이주해서 8살 때에 아버지가 사다준 반도네온(아코디언을 개조한 악기)을 연주하면서 음악과 인연을 맺었고, 음악에 재능이 있어 어린나이에도 각종 라디오 연주회에 출연해 반도네온으로 고전음악을 연주하였으며, 열세 살이 되면서 옆집에 살던 피아니스트 벨라 윌다를 만나 음악의 길로 나가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벨라 윌다는 헝가리 출신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자 라흐마니노프의 수제자였는데, 피아졸라는 벨라 윌다의 피아노 솜씨에 반해 자주 집을 찾아갔고, 윌다로부터 클래식 음악에 입문하게 됩니다.

 

윌다는 피아졸라에게 악보 읽는 법부터 클래식 음악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주었으며 피아졸라는 마치 종이가 물을 빨아먹듯이 배웠습니다. 피아졸라는 나중에 윌다를 자신에게 최초의 위대한 스승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또 그 당시에 우연히 탱고가수이자 작곡가인 '가르델'의 눈에 띄어 그가 만든 영화에 신문팔이 역으로 출연해 직접 연주를 하기도 하였지요.

 

당시 뉴욕을 휩쓸었던 재즈와 가르델의 탱고, 벨라 윌다로부터 배운 클래식 음악은 아스토르 피아졸라를 세계적인 누에보 탱고의 거장으로 만들어준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1937년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때에 17세의 나이로 고국 아르헨티나로 돌아옵니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전통 탱고음악에 식상해했고 또 반도네온과 같은 악기를 전통 클래식 악기에 비해 수준이 낮은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밤에는 당대 최고 그룹인 '아니발 트로일로'밴드에서 반도네온 연주자로 일했지만, 그 부끄러운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해 낮에는 자신의 음악의 길을 가기 위해 열심히 클래식음악 공부를 하였습니다.

 

어느 날, 피아졸라는 대담하게도 자신이 작곡한 곡을 하나 들고 당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머물고 있던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Artur Rubinstein)의 집을 찾아갔고, 다음 날로 루빈스타인의 친구인 클래식 작곡가인 알베르토 히나스테라(Alberto Ginastera)를 소개 받아 그에게 6년 동안 레슨을 받게 됩니다.

 

그 기간 피아졸라는 미친 듯이 작곡에 몰두했습니다.

밤에는 먹거리를 위해 탱고를, 낮에는 자신의 음악 세계를 위해 스승에게서 클래식과 작곡을 배운 것입니다.

 

그런 노력과 그의 천재성으로 1953년 23세의 나이에, 아르헨티나 작곡 경연 대회에서 '신포니에타'로 수상하고, 프랑스 정부가 주는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유학길에 오릅니다.

 

파리에서 피아졸라는 자신의 음악적인 재능을 꽃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해준 스승, 나디아 블랑제(Nadia Boulanger)와의 운명적 만남을 통해 음악에 새로운 눈을 뜨게 됩니다..

 

나디아와의 만남은 그 동안 그가 걸어왔던 음악의 길을 송두리째 뒤집어버린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참으로 드라마틱한 일이었습니다.

 

장학금으로 유학길에 오른 피아졸라는 파리에서 유학생들을 지도하는 음악교수인 나디아 블랑제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곡을 선 보였습니다.

 

피아졸라는 처음에는 탱고에 대한 열등한 생각 때문에 탱고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도 하지 않고 그 동안 여러 스승들에게서 배운 실력으로 작곡한 자신의 재능을 입증할 엄청난 수의 교향곡과 소나타 악보를 나디아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나디아는 피아졸라의 악보를 하나씩 보더니

“음... 이것은 스트라빈스키이고, 이 부분은 바르토크, 여기는 라벨 같은데? 

음... 좋아, 괜찮은데? 그런데 말이야 피아졸라는 어디 있지?”

 

그 말을 들은 피아졸라는 순간 너무나 당황했습니다.

자신은 아르헨티나에서 제일가는 젊은 음악가였고, 또 열심히 공부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들과 교류하며 배우고 또 많은 연주를 해왔기 때문에, 음악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었는데 나디아의 물음은 이제까지 자신이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문제였습니다.

 

피아졸라가 어디있냐니....?

이 한마디에 피아졸라는 모든 것이 막혀 버린듯 어떤 말도 내뱉지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저 유명한 음악가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저 그들이 작곡하고 연주한 음악들을 표본으로 공부하며,

그것을 자신이 가야할 음악의 길의 표본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왔던 그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 놓으라는 말은 한번도 들어보지도 못한 말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자신에게 있는지도, 또 그러한 것들을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가, 생전 처음 닥친 물음에 어떻게 할 줄을 몰라, 우물쭈물 하고 있을 때에 나디아는 말했습니다.

 

“그래, 뭐 더 보여줄 것은 없어?”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아르헨티나의 전통 탱고와 반도네온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민속음악과 춤곡 정도로 생각하고, 클래식에 비해 현저히 질이 떨어진다고 여기며 부끄러워 했던 그 탱고와 그 반도네온...

 

그래서 그것을 버리고 열심히 품격 높은 클래식을 공부했는데

 

그 공부의 결과에 대해선 나디아는 별 의미를 두지 않고 다른 것을 내어놓으라 하고 있으니 피아졸라는 한 순간에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버리고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피아졸라의 얼굴을 살피면서 궁금한 눈동자로 바라보면서 차분히 기다리고 있는 나디아의 모습을 보면서

차마, 탱고와 반도네온의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제 남은 것이라곤 그것 밖에 없으니...

부끄러운 듯이 수줍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나디아는 의외로 흔쾌히 연주해보라고 했지요.

 

그래서 그는 탱고를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연주를 하기 시작한지 몇 소절이 지나지 않자

그것을 듣고 있던 나디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이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것이 바로 피아졸라야. 아유 이 바보. 진작에 이 곡을 보여주지. 왜 이것을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어?”

 

피아졸라는 나중에 자신의 회고록에서 나디아 블랑제와 만나 과거에 우월하다고 여기며 공부했던 클래식 등, 10년 동안 자신이 작곡한 모든 음악이 단 몇 초 만에 버려졌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밤에 탱고를 연주하면서도 그것이 부끄러워

낮에는 자신의 음악을 발전시키기 위해 십 년 이상을 노력해왔던 그 수많은 클래식의 악보들이, 단 몇 초도 안 되어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것들이 되어 무참히 창밖으로 던져져 버려지고

오히려 그토록 버리고 싶었던 자신의 그 못난 음악들이,

그를 세계적으로 우뚝 서게 한 ‘누에보 땅고 (Nuevo Tango)’의 바탕이 되었고,

그 음악을 나디아의 앞에서 연주하는 순간이, 

이태리의 ‘깐쵸네’ 프랑스의 ‘샹송’ 미국의 ‘팝’등 세계적인 음악처럼, 

남아메리카 음악을 대표하는 위대한 ‘누에보 땅고’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정말로 소중하고 귀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바깥으로, 또 내게 없는 것만 찾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평생을 그 한 생각에 내몰리며

정처 없이 자신에게 있지도 않은 더 괜찮은 허상을 찾고 헤매며 살아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피아졸라는 자신의 음악이 비교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사람이 다르듯이 장르가 다를 뿐 우열을 나누거나 좋고 나쁨으로 판단할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게 피아졸라는 나디아 블랑제라는 걸출한 스승덕분에 비로소 자신의 음악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고, 나아가 누에보 탱고라는 세계적 음악장르를 탄생시키게 되고, 많은 주옥같은 곡을 작곡하여 남기게 된 것이죠.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정말로 소중하고 귀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바깥으로, 또 내게 없는 것만 찾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평생을 그 한 생각에 내몰리며

정처 없이 자신에게 있지도 않은 더 괜찮은 허상을 찾고 헤매며 살아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은 모두 인연으로 되어 있고, 

그 인연의 세상은 이 한 법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는 피아졸라뿐만 아니라 일체의 모든 사람들의 삶, 

그리고 이 법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모든 인연의 삶이 다 이 한 법 그 자체로 똑같이 소중하고 특별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님들~!

혹시 지금이라도 자신을 주위와 비교하고 있다면 가만히 한번 찾아보세요.

자신의 피아졸라는 어디에서 잠자고 있는지요.

 

“지금, 님의 피아졸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댓글목록

반야지님의 댓글

여기요!!!

윤기붕님의 댓글

ㅎㅎㅎ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