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인연과 우연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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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십오륙년 전, 지금의 홈페이지 이전, 비인나우(be in now : 지금 여기 있어라.)라는 이름으로 홈페이지를 운영할 때 묻고 답하기에서 질문자와 대화한 내용입니다.
제가 모아둔 글 속에 이 글이 보이고, 그때의 인연과 지금의 인연이 달라 이 글을 처음 보시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 같고, 또 지금의 소중한 인연의 님들이 보시면 좋겠다는 생각에 조금 수정하여 다시 올립니다.
[질문]
세상사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한 것이라는 말을 많이들 합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요.
그러면 우연은 무엇일까요?
저도 예전에는 중요한, 일생일대의 큰 사건은 인연, 필연, 악연, 운명 등으로, 일상 속에서의 사소한 일들은 우연으로 여겼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이 같은 것을 두고 다르게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사건과 사고, 일상들이 거미줄처럼 서로 뒤엉켜 누구도 알 수 없고 누구도 풀 수 없고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인연과 우연이 같은 것을 두고 다르게 부르는 동전의 양면인 듯합니다.
[답변]
우리의 삶은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드라망(그물)처럼 얽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존재하는 티끌보다 더 작은 것으로부터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큰 존재 등의 모든 존재들은 서로 영향을 주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사람끼리 만나서 서로 주고받는,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말이나 행동에서부터, 공기, 온도, 기후, 땅의 기운, 그리고 우리 주위에 널려 있는 모든 물체들에게서 흘러나오는, 모든 기운들(원적외선이니, 전자파, 그리고 각 물체의 고유의 진동 등)까지, 크든 작든 서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존재합니다. 그 영향들이 서로에게 미치면서, 자신의 인과 영향되어오는 연에 의해서 삶이 펼쳐져 나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밤새 나쁜 꿈에 시달려 잠을 자고 난 뒤에도 머리와 몸이 뻐근한 상태일 때와 그렇지 않고 꿈도 없이 푹 자서 맑은 상태일 때에, 똑같은 일을 하면 그 일을 하는 자신의 상태가 밤에 잠을 잘 때의 상태에 따라 뭔가 달라도 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 사람이 같은 일을 잠을 설친 상태와 잠을 푹 잔 상태로 인해 다른 형태가 되면, 그 주위에서 그를 바라보고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도 역시 달라질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어떤 것이든지 서로 서로 영향을 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작용들에 의해서 살아가는 삶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관련된 모든 영향의 개체들은 절대로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로또만 하더라도, 45개의 요인을 가지고 6개의 숫자를 적출해내는데도 800만개라는 엄청난 변수가 생기는데 우리의 삶에 미치는 요인이 어찌 45개밖에 안 될 것이며, 행동이나 삶의 나타내는 모습이 어찌 6가지 정도밖에 안되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도저히 그것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그 엄청난 인연을 알 수 없어 추론한다는 것이 눈에 보이는 아주 작은 일로 그것을 판단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과론(因果論)입니다.
“네가 이러했으니까, 이러한 결과가 나왔지”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가 왜 그러했는지, 왜 그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것은 아무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가까운 과거와, 가까운 주위에 대한 설명은 할 수 있겠지만, 그것에 얽혀있는 또 다른 인연들이 끝없이 가지처럼 뻗어나가 인드라망처럼 엮인 인연에 대해선 아무도 그것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택시기사를 할 때, 손님과 대화를 하면서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 잘 쓰는 표현이 있습니다.
"제가 또는 손님이 만약에 아침에 1분만 늦게 일어났어도 우리는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사실이 그러합니다. 1분 늦어지면 1분 전과 상황이 다른 상태에서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와 나는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연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통 인연이라고 하는 그와 나와의 인연만 생각하면 너무 짧은 것입니다. 그와의 만남 속에 그와 내가 만나기 전의 모든 인연도 함께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를 만나기 전의 인연이 달라졌다면 나는 그가서있는 곳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고, 그 역시 택시를 탈 인연이 안 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와의 인연이 되고 난 뒤에 그와 나의 대화가 또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가 있고, 그리고 둘이 헤어진 그 다음 어떤 상황에서도 많든 적든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영향이 당장에는 아니더라도 두 사람의 생각 속에 내재되어 있다가 어떤 계기로 두 사람의 삶에 드러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위에서 예를 들어서 말을 하되 아침에 1분전이라고 하지만, 아침에 그 시간에 일어날 수 있는 이유를 따지려면, 그 전날의 잠든 시간과, 또 그 때 일어날 수 있는 몸 상태와, 방의 상태 등을 다 따져야 할 것이고, 그렇게 따져 들어간다면, 아마 그와 내가 살아온 평생을 다 해석해야, 그 시간에 나와 그가 만난 이유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는 인과가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인과가 없습니다.
인과란 원인과 결과라는 의미인데, 세상의 일이란 어떤 일의 인연이 꼭 그러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또 그 결과가 그것으로만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의 결과는 또 다른 일의 원인으로 작용하면서 그 모든 것들의 요인들이 서로 얽혀서 나와 세상과 우주를 움직이며, 다시 재해석되어 되돌아와 또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끊임없이 흘러가고 변화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인연이 바로 부처님께서 밝히신 연기법으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는 법칙입니다.
우리가 지금이 있기까지 작용한 과거의 모든 인연을 알 수가 없듯이 역시 그러한 것들로 인해 변화되고 흘러가는 우리의 미래 역시 어떻게 변화되고 흘러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인연 속에서 내가 한 순간 다른 생각과 선택을 함으로써, 다른 인연을 만들고, 그것으로 인하여 또 다른 미래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내가 무조건 개척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세상은 절대로 홀로 살 수 없고, 어떤 일이든지 자기 혼자 이룰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뛰어나고 스스로 공부하여 세계에서 1등을 하더라도, 그 공부할 수 있는 자료와 환경들은 스스로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방금 앞에서 제가 ‘그런 인연 속에서 내가 한 순간 다른 생각과 선택을 함으로써’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내가 한 순간 다른 생각과 선택을 하는 것’ 역시 그 앞의 인연이 없으면 절대로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 인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인연, 즉 연기법을 완전히 이해하고 깨달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하기를
“내가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연이라는 것도 우리의 능력에 한계가 있어서 그 세세한 것을 알 수가 없으니 우연이라고 부를 뿐, 그 모든 것이 실제의 우리네 삶인 인연입니다.
그리고 그 인연의 법칙은 너무나 과학적이어서 인연의 주체가 가지고 있는 인연의 무게만큼 서로에게 작용을 합니다.
인연이 이렇게 인연의 무게만큼 영향을 미치고 작용하는 과학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수많은 인연의 요인들이 미치는 영향들이 그 무게만큼 정확하게 관여를 하여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가고, 우리 역시 그러한 인연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매 순간 바깥 대상, 또는 자신의 생각과 인연을 맺으면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이 미치면, 자신의 뇌에 저장된 것들 중에서 그와 연관된 어떤 정보들을 끄집어내어서, 바깥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판단하고는, 그에 적당하다고 여겨지는 생각을 만들어 반응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생각은 마치 매 순간 마치 우리가 어떤 고정된 내가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절대로 고정된 나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나’는 나에게 영향을 주는 인연의 요인들에 의해 매 순간 다른 반응을 합니다. 그래서 나의 삶, 즉 우리의 삶은 어떤 고정된 ‘나’가 있어 반응하며 삶을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인연이 매 순간 그렇게 반응하면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몸 역시, 몸이라는 어떤 물체가 있으니까 마치 고정된 나라는 존재가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우리의 몸도 우리의 생각이 대상과 반응하는 것처럼, 매 순간 우리의 몸에서 일어나는 각 세포들 끼리, 또는 호르몬, 또는 영양분등에 반응하면서, 한 순간도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라는 것은 몸이든 생각이든 늘 인연으로 변해가는 어떤 무엇입니다.
그러한 존재인 우리를, 우리는 서로서로 이름을 정하고 의미를 정해놓고, 그렇게 부르면서, 마치 그런 이름을 가지고 그런 의미를 가진 존재가 불변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라고 하면, 또 늘 그렇듯이 사람은 꼭 사람만을 떠올리는데,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 그리고 무생물까지 모두가 똑 같은 형태로 변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선현들이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의 인연의 요인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의 생각의 한계가 모자란다는 한 점의 반성이나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그냥 우연이라고 부를 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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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그렇군요. 우연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군요. 모든 것이 전부 다 인연이라는 사슬로 얽혀 있었네요. 우리는 보통, 일생일대의 커다란 일에는 '인연'이라는 멋진 단어를 쓰고, 평소의 사소한 일에는 '우연'이라고 국어시간에 배운 것 같은데... 그러나 인연이든 우연이든 단어가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결국 결론은, 삶의 그 모든 형태는 서로 어찌할 수 없는 망에 연결 되어 있어 꼼짝할 수 없다는 뜻으로도 받아들여집니다. 그 꼼짝할 수 없음을 진실로 이해하고 받아 들여야지만 또 진정으로 자유인이 될 수 있다니 참으로 진리는 역설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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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우리는 자유라는 것이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는 상태를 자유라고 합니다. 그 의미에서는 어떤 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모두 제 각각입니다. 특히 세간에서의 자유라는 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대상으로부터 억압당하거나 묶여있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통 자유라고 하지요. 또 그렇게 배워왔습니다. 그래서 남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제약하려고 하는 것은 죄라고 규정하기도 하지요.
물론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개인의 자유를 어느 정도 제한하고 있는 것이 세간법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인연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서로 서로 제약을 하고 또 당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인 것이, 이 우주에는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배워온 것처럼 모든 것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그러한 자유는 결코 얻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배워온 그러한 자유가 그리워, 그것을 찾아서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에 들어가 산다고 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영위해야할 조건에서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를 얻는 대신 찾아오는 손님이 있습니다. 바로 외로움입니다. 물리적인 자유를 찾아서 떠난 사람은 그것의 대가로 찾아오는 그 외로움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는 절대로 혼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명백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자유이겠습니까? 엄연한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 자유이겠습니까? 아니면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려하지 않고 싫어하면서 존재하지도 않는 어떤 상태를 원하여 떠나려고 목을 매는, 그러한 생각에 끌려 다니는 것이 자유로 향하는 것이겠습니까?
진정한 자유는 바로 생각에서의 자유입니다.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자신을 괴롭히고 구속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는 생각을 안 하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육조단경에서 말하기를, ‘생각이 끊어지면 자성이 육신을 떠난다.’라고 했습니다.
자성이 육신을 떠난다는 말은 죽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애초에 존재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에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혜능조사는 ‘생각이 끊어지면 자성이 육신을 떠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생각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수많은 생각들 중에서 자신을 괴롭히고 구속하는 생각이 바로 쓸데없는 망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인연 속에서 서로 비비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그 한 생각, 그것이 바로 쓸데없는 망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주혜해(大珠慧海)스님은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에서 누가 무념(無念), 즉 ‘생각 없음’에 대해서 물으니 답하기를
“무념은 삿된 생각이 없는 것이지 바른 생각마저 없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삿된 생각이 바로 망상심입니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흘러갑니다.
그래서 선시(禪詩)에도 그러한 표현들이 참 많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지요.
“정원의 꽃은 웃고 있는데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네.
숲속의 새는 울고 있는데 눈물은 보이지 않는구나.
대나무 그림자가 계단을 쓸지만 먼지 하나 날리지 않고
달이 연못의 바닥까지 뚫고 들어갔는데 물은 흔적조차 없구나!”
- 야부 도천 -
이러한 선시들은 그냥 멋있으라고 지은 것이 아닙니다.
인연의 의미를 확철하게 알면 실제의 우리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선시의 끝머리 두 연은 인연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바깥의 인연이 자신에게 어떻게 다가오든 그것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 인연과 다투지 않아 매이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노래하는 것이지요.
만약 자유를 바깥의 대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대나무 그림자가 계단을 쓸어도 먼지하나 날리지 않는 그러한 삶은 도무지 살 수가 없는 것이겠지요.
진정한 자유는 인연을 부정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는 쓸데없는 망상에서 벗어나 엄연한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우리라는 존재는 인연의 존재이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것들이 인연의 조합일 뿐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우리의 삶 속에서 수많은 인연이 오고 가더라도 그것에 매이지만 않는다면 대나무 그림자가 계단을 쓸어도 계단은 일체 그것에 반응하지 않아 먼지하나 날리지 않듯이 매 순간 자신의 인연의 삶을 살 뿐 우리의 마음은 늘 고요하여 망상의 티끌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