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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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절대적 평화다.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1,876

20-03-05 14:36

본문

깨달음의 궁극적 목표는

법에 대한 앎이나 지식의 충만이 아니라 생각에서 벗어난 마음의 평화다.

그것도 어떤 일을 해결했을 때 오는 그때그때의 모면의 평화가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 평화다.

 

이 평화는 생각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절대적이 되는 것이다.

 

생각은 늘 자신이 아는 것과 비교하여 판단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들어와도 자신과 맞지 않으면 없애려 하고,

없어지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그래서 이 생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 절대로 평화가 오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이 만약 스스로 안다고 하더라도

불안하거나 평화가 없으면

그것은 생각으로 헤아린 것이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다.

 

이처럼 깨달음은 절대적 평화이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지식과 깨달음에 대한 것을 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에게 평화를 가지고 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자신에게 평화를 가져 오지 않는 깨달음에 대한 앎은

모두가 다 거짓이다.

 

깨달은 사람을 누구나 안다.

깨닫는 즉시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여기서 말하는 해결이라는 것은

세간에서 말하는 원인과 결과를 추적하여

그에 대한 옳은 답을 내어 해결하는 그런 해결이 아니다.

 

세상의 어떤 일도 모두 다 이 한 법의 일이기 때문에

아무 일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 해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깨달은 사람은

해결할 수 있는 일이면 해결하고,

영원히 해결할 수 없거나 그 당시에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면

그냥 받아들인다.

마음에 아무런 구김도 없이 말이다.

 

그래서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이다.

 

이런 평화를 어떻게 보고 배우고 생각으로 추론하여 이해한 깨달음에 대한 앎으로 얻을 수 있겠는가?

 

어제 올린 글에서 로빈 윌리암스가 맷 데이먼에게 한 말,

자신이 성 시스티나 성당에 갔을 때 느끼는 그 속의 공기와 분위기,

그리고 전쟁터의 포화 속에서 자신의 손을 쥐고 죽어가는 동료의 그 눈동자의 느낌 등은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생각으로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實在)를 맞닥뜨려 아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 세상이 본래 그렇다는 것을 몸으로 마음을 화살이 꽂히듯 아는 것이다.

그래서 앎이라 하지 않고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다.

 

언젠가 법회에서 깨달음에 대해서 무단횡단과 같다고 한 적이 있다.

 

지구상에서 차가 있고 교통법규가 있는 곳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무단횡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대부분 무단횡단을 해보지 않는 사람들이 없다.

 

그 이유는 자신이 주위를 잘 살핀다는 자신감과 확신으로 겁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날 무단횡단하다가 사고를 당하면

비로소 자신에 대한 믿음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되고,

또 무단횡단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된다.

 

즉 지식으로 아는 것과 실제의 일의 차이를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은 이와 같다.

 

지금도 수없는 사람들이 깨달음을 구하면서도

모두가 보고 들은 것으로 생각을 헤아리고는

마치 자신이 깨달음을 안다고 착각하고,

설사 깨달은 사람을 만나도 자신의 앎과 다르면 틀렸다고 여기고 돌아선다.

 

깨달음은 무단횡단하다가 사고를 당한 것과 같이, 생각으로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오랜 세월을 이 공부를 하고,

또 어느 정도 안다고 여겨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심지어는 스승이 되어서 가르치고 있지만

스스로 마음의 평화가 없으면 그것은 가짜다.

 

깨달은 사람은 말주변이 없어 그것에 대해 설명을 잘 못해도

마음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면 마음이라는 것 자체가 없어져버린다.

그래서 무심(無心)이라고 한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안다고 할 때에 마음의 평화가 함께 해야

그것이 정말로 깨달은 것이고 깨달음을 아는 것이지,

말로는 누에가 실을 뽑아내듯이 유려해도

마음이 평화가 없다면 그것은 생각으로 헤아린 것일 뿐

진정한 깨달음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지침으로 여기게 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적어도 여기 즉심선원에 와서 법을 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러한 평화가 와야 비로소 깨달음이라 할 수가 있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물론 금방 깨달았을 때는 확 자유로웠다가도 조금 지나면 과거의 습이 올라와 괴롭힌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몇몇을 제외하고는 과거의 습이 올라온다.

그래서 보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 같은 경우에는 지도하는 스승이 없어서 아주 힘이 들었다.

심지어는 깨달았는데도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그것이 해결되고,

또 문제가 생기면 또 조금 지나면 해결이 되어갔다.

그것도 내가 애를 써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처음 깨달은 것,

아무런 일도 없다는 것이 그 괴로움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시간이 걸린다.

우리의 생각은 하나가 해결된다고 해서 각성을 해서

“다시는 그런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야지.”

하고 사라지는 그런 고분고분한 놈이 아니다.

 

오히려 수십 년을 가지고 놀았던 놈(우리 자신)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니 쉽게 물러나기는커녕 더욱 간교하고 치밀하게 속이면서 고개를 든다.

 

하지만,

결국 이 깨달음이라는 것이 시간과 관계없이 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이것이 깨달음이요, 깨달음의 힘이다.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면

이 사실을 분명하게 명심하고,

깨달음은 아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평화가 오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자신의 생각으로 깨달음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여긴 사람들이라 할 지라도

자신의 마음에 안다는 자부심 말고 절대적인 평화가 없으면 자신의 앎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비록 그럴지라도 어느 순간에 자신의 것이 껍데기는커녕 깨달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알고 내려놓을 수가 있으면, 그래도 그에게 기회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이 곧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알라.

 

깨달음은 지식도 아니고, 경험을 쌓는 것도 아니고, 생각으로 헤아려 아는 것도 아닌 절대적 평화가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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