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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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행과 깨달음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2,211

20-04-17 10:06

본문

고행과 깨달음

 

 

부처님은 자신이 하고 있는 고행(苦行)의 방법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는 고행을 그만두시고 나이란자라 강에 목욕을 하고,

수자타의 우유 죽으로 기운을 차린 뒤에 나이란자라 강둑의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다가

이레 만에 샛별을 보고 깨달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고행주의와 쾌락주의의 양변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노라!”

 

사실 수행은 깨달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면

부처님의 고행을 예를 들고서는,

 

“부처님께서 그래도 6년 고행을 해봤기 때문에 고행으로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 않았는가?”

 

라고 하면서 고행이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아니 도를 구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다.

그리고는

수행을 해야 한다고 고집하며 그것이 옳다고 쥐고 그것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부처님께서 6년 고행을 그만두고 깨달을 때,

그것이 부질없음을 느끼는 것과 깨달음이 동시에 왔다면

억지 같은 그 말이 그나마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고 또 부처님 식의 수행과 고행을 따라 해볼 만하다.

 

하지만

부처님의 고행은 오직 실패의 절망과 좌절만 안겼을 뿐이고

정작 깨달음은 고행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다른 인연, 즉 샛별과의 인연으로 얻었을 뿐이다.

 

부처님께서는 고행으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을 할 때, 깨달음은커녕 그 많은 세월을 쓸데없이 헛되게 고생만 했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고행을 그만두고 나이란자라 강에 몸을 씻었다.

이때까지는 깨달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즉 쓸데없는 짓이란 것만 알았다.

그리고 깨달음은 몸을 씻은 후 보리수 밑에 앉아 쉬다가 수자타가 목신(木神)인 줄 알고 공양을 올린 우유 죽을 먹고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고 나서 칠 일이라는 날들을 보낸 후에야 샛별을 보고 깨달으신 것이다.

 

이처럼 고행은 깨달음과 아무 상관 없는 쓸데없는 세월이었고 오히려 절망과 좌절을 안겨 준 실패일 뿐인데, 그 실패를 맛보기 위해 고행을 한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만약 그것이 필요 없는 실패라면 굳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해 그렇게 고생을 하고 세월을 허비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말이 되는가?

깨달으려는 자가 일부러 실패를 경험한다는 말이 정상적인 생각을 지닌 말인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부처님께서도 스스로 떠났다고 고백하신 부처님의 고행이 쓸데없는 것이 아니고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부처님께서 절망하신 수행을 흉내내면서 그것으로 깨달을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 오히려 이는 자신이 그동안 해온 수행이란 공덕이 아까워 그것이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합리화의 생각에 빠진 것일 뿐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것은 깨달음에 대한 열망이었고, 그 열망 때문에 당시에 유행하던 수행 방법으로 세월을 보냈을 뿐, 실제로는 열망과 수행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열망 = 수행’이라는 이상한 등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깨달음은 어디 가고 없고, 수행 방법을 가지고 옳으니 그르니 시비를 하고, 심지어는 바른 수행이라는 이상한 것을 만들어 내고는, 수행을 잘하면 마치 자신이 뭐가 되는 것을 가지고 있는 듯 으스대고, 그것이 잘 안 되면, 자신이 수행을 잘 못 한다고 자신을 쥐어뜯고 끙끙대며 중생 짓을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본래부터 미혹된 적이 없는 본래 부처가 깨달음이라는 것을 만들고, 거기다가 바른 수행이라는 틀까지 만들어 스스로 그 속에 들어가서 갇혀 있으면서도, 그것이 자유를 얻는 방법이라 하니 얼마나 이상한 짓이 아닌가?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본래부터 청정하다.

깨달음에 대한 상과 바람만 내려놓으면 말이다.

 

우리와 세상의 모습이 아무리 봐도

못나고

부족하고

칠칠찮고

밴댕이 같고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라 하더라도

늘 그 순간의 인연에 딱 맞는 모습이다.

이 세상은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인 연기법으로 일어나 변하며 흘러가고, 그것도 딱 맞는 인연의 무게로 움직이므로, 매 순간 법칙에 맞는 모습은 드러난 매 순간의 그 모습인데,

만약 생각이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고, 자기의 생각이 바라는 모습만이 지금에 딱 맞는 모습이라고 고집을 부린다면

이 순간에 마음에 들지 않는 지금 모습은 도대체 정체가 무엇일까?

 

그리고 생각이 바라는 모습은 지금 어디에도 없는데, 없는 것이 법칙에 딱 맞는 참된 모습이겠는가?

 

우리의 생각은 늘 이 법을 떠나 저만의 세상을 만들어 놓고 되지도 않을 인연을 꿈꾸고 심지어 부처의 모양까지 만들어 우리를 속이며 힘들게 한다.

 

생각에 속지 마라.

우리는 단 한 번도 중생인 적이 없었고, 또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생각의 망상이요 꾐이다.

 

단 한 번만이라도 그 때의 자기가 진정한 자기임을 깨닫기만 한다면 쓸데없는 고행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은 단 한 번도 부처의 자리를 떠난 적이 없음을 알 것이다.  

댓글목록

반야지님의 댓글

선생님  별일 없어시지요?
며칠 글이 안 올라와서 ~~~    기다렸습니다.
밖에는 비가 오네요.
그래서 딩굴딩굴하고 있습니다.
도반님들도 보고 싶네요.~~~~~~~~~~~~

윤기붕님의 댓글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농땡이를 좀 쳤지요?^^

별 탈 없이 잘 있으니 걱정 놓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