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구하지 않는 삶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1,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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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지 않는 삶
‘자성(自性)이 청정(淸淨)하여 공(空)하다.’라고 하는 것은, 자성이 공한 것을 일러 청정하다는 말이다.
똑같은 말을 뒤집어서 하는 이유는 이 법에서 말하는 청정은 공한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즉 바른 양심 바른 마음... 바르고 깨끗하다는 청정이 아니라, 바름도 그름도, 깨끗함도 더러움도 선도 악도, 거룩한 것도 속된 것도 없는 공이기에 청정하다는 말이다.
세속의 청정은 청정과 더러움의 반대의미이지만, 법에서의 청정은 더러움은 물론 청정도 없이 공한 것을 일러 청정이라 한다.
대부분, 아니 이 법을 모르는 모든 수행하는 자들은 바름에 물들어 있다.
그리고는 그것이 청정이라 생각하고는 버리는 수행까지 한다.
육조혜능(六祖慧能) 조사는 자신을 찾아온 남악회양(南嶽懷讓)의 법을 인가하면서, 회양의 깨달음에 대해
“수행해서 얻은 것인가?:
라고 묻는다.
그러자 남악회양은
“수행해서 얻지 못할 바는 없지만, 오염될까 그것이 두렵습니다.”
하였다.
수행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시비와 분별을 없애는 것과 바른 법이라는 모델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추구하며 자신에게 있는 바르지 못한 것을 없애는 것이 있다.
물론 깨달음이 마치 무슨 능력을 얻는 것처럼 여기고 능력을 얻기 위해 공력을 쌓는 것도 있지만, 이것은 수행은 수행이지만 깨달음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에 논할 필요가 없다.
오염된다는 것이 무엇일까?
수행에서 지켜야 할 것. 즉 인위적인 생각과 행위들에 오염된다는 말이고, 나아가 한쪽, 즉 바름이라는 모양에 물든다는 것으로, 바른 법이라는 모델을 만들어 놓고는 자신에게서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제거하려는 것이 오염된 수행이라는 말이다.
청정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청정과 탁함으로 나누고는 청정의 상대법인 탁함이 없는 청정을 생각한다.
즉 더러움에 상대되는 깨끗한 것을 청정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회양이 말하는 오염은 이러한 생각을 두고 오염됐다고 하는 것이다.
깨닫지 못한 생각, 즉 일체가 하나임을 알지 못하는 생각은 늘 그렇게 이분법(二分法)으로 보게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간의 이분법을 배우고 그것에 익숙지 않으면 꾸중을 듣거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정이라 하면 더러움이 없는 것이라 하고, 나아가 공이라 하면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것을 생각한다.
하지만 이 법계는 일체 만법이 모두 하나의 법에서 나와 하나의 법칙과 작용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이 한 법과 이 한 법으로 나온 세상 만법이 둘이 아니라 하나다.
즉 모든 것이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드러난 만법이 각각의 인연으로 흘러가더라도 모두 이 한 법의 일이고 그 자체이다.
그래서 드러난 만법이 어떤 인연으로 어떻게 변해가든 모두가 다 이 한 법일 뿐 다른 일이 없다.
그래서 그러한 세상과 세상의 일에는 깨끗하니 더러우니 하는 이름이 없으니, 우리가 사는 이 법계에서의 청정은 깨끗함과 더러움 모두를 여윈 것이다.
또 이처럼 청정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 청정이니 바로 공이고, 이 공은 모든 것이 다 있는 공이니, 공이라는 것도 없는 공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법계에서는 더러움은 물론 청정이라는 것조차 붙을 수가 없는 것이 청정이고, 또 있음은 물론 없음, 즉 공이라는 것도 공한 것이 우리가 사는 법계의 참모습이다.
그러니 수행에서 말하는 바름이라는 것이 어디에 붙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회양이
“오염될까 그것이 두렵습니다.”
라고 한 것이다.
어떤 것이든 머물 수 있는 모양을 가진 것은 자성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성의 발현인 이 법계에도 머물 수 있는 모양을 가진 것이 없다.
그것이 모양이든 가치든 이름이든 말이다.
이렇게 한 티끌도 붙거나 머물 수 없는 것을 일러 청정하다고 하니 청정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이미 머물러 있는 허물이 되는 것이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등의 책에서 진여(眞如)의 바다에 무명(無明)의 바람이 불어 생멸문(生滅門)이 생기고, 그 생멸문에서 세상 만물이 생겨난다고는 하나,
그것들이 이 한 법을 따라 잠시도 머물지 아니하여
‘이것이다.’ 하고 잡으면 이미 그것은 사라지고 없다.
그래서 송곳 하나 꽂을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다 저것이다.
이렇다 저렇다.
옳다 그르다.
선하다 악하다.
좋다 싫다.
귀하다 천하다.
라고 할 것이 없다.
이처럼 한 물건도 붙을 자리가 없기 때문에 공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보고 우리가 이름을 붙이고 있지만, 실제의 세상은 인연에 의해 끊임없이 변해가므로 이름이 붙어 머물만한 자리가 없다. 그리고 한 물건뿐만 아니라 이름마저도 붙을 자리가 없기 때문에 공이라는 것도 붙을 자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양을 잡고 있다 없다. 청정하다 오염되었다. 공하다 공하지 않다 등등 이것이니 저것이니 하고 나누고 시비하는 것은 모두 생각이 지은 모양일 뿐 실제 세상에는 그런 것이 없다.
그래서 ‘자성은 분별을 여의었다.’ 또는 ‘자성이 공하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체 만법이 모두 이 한 법의 발현이고 이 한 법의 성품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니 역시 분별을 여읜 것이고 공한 것이다.
이처럼 본바탕이 분별을 여의고 공하며, 그것으로 드러난 일체 만법이 분별을 여의고 공하니 ‘이것이다.’라고 할 것이 없고, ‘이것이다.’ 할 것이 없으니 역으로 모든 것이 그것이 아니겠는가?
분별하여서 보니, 바른 것이 있고, 깨끗한 것이 있고, 선한 것이 있지, 자기 생각과 눈에서 분별이 사라지면, 세상의 모든 것이 옳고 그름이 없을 것이고, 옳고 그름이 없으면 모두가 그냥 그것이니, 나도 그것이고 내가 대하는 것 역시 그것이니, 이 세상에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처럼 옳고 그름을 지워 버리면 옳으면 모든 것이 옳은 것이요. 그르면 모든 것이 그른 것일 뿐, 옳은 것과 그른 것이 한통속에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모든 것이 드러난 모양만 다를 뿐 그것일 뿐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있지만, 그것에 대한 이름이 붙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법계의 청정은 깨끗함의 반대가 아니라,
깨끗하고 더러움이라는 분별이 없어 깨끗함도 없는 청정이고, 또 모든 것이 이 한 법의 인연으로 어떤 것도 머물지 않고 흘러가므로 잡을 수가 없는 청정이다.
이처럼 어떤 모양도 없고 잡을 수도 없기 때문에 공(空)하다고 하고, 또 그러하기에 어떤 의미나 가치가 따로 없음으로 역시 공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수행하는 자는 수행에 오염되어서 깨달음이란 모양을 짓고 그것을 얻으려고 한다.
부처님은 무소득(無所得)을 말씀하셨다.
무소득이 무엇인가?
얻을 것이 없다는 말이다.
얻을 것이 없다는 말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아무것도 없어서 얻을 것이 없는 것이 있고,
다 있지만, 따로 특별하게 여길만한 귀중한 의미가 없고, 또 모두가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얻을 것이 없는 것이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즉 이 법계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심심한 곳이기 때문에 얻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다 있지만 특별하게 여길만한 것이 없는 평등한 세상이어서 따로 얻을 것이 없는 세상이다.
즉 우리가 좋고 나쁨, 옳고 그름, 선과 악, 귀하고 천하다는 모양을 짓기 때문에 따로 얻을 것이 생기고, 그 때문에 얻고 얻지 못함이라는 불평등이 생겼을 뿐,
그런 모양을 짓지 않으면 모든 것이 모두 이 한 법의 발현이고 그 자체여서 인연의 모양만 다를 뿐 모두가 평등하여 특별한 어떤 의미도 없고, 또 의미가 없다고 해서 우리의 인연이 세상에 없는 것은 아니므로, 우리가 가치를 따로 만들어 쫓아가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인연을 만나며 살아간다.
물론 생각이 좋다 나쁘다 하고 분별하여 추구하는 것은 만나기가 어렵다. 하지만 어쩌다 만난다고 하더라도 세상의 어떤 것도 머물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그것과 함께할 수가 없다.
이런 세상이 우리가 사는 법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분별하여 욕심을 내지만 않는다면 그런 것이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렇게 이 세상은 지금 인연이 된 것이 사라진다고 해서 인연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인연이 틈새 없이 찾아오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몸과의 인연이 다할 때까지는 누구나 충분히 살아갈 수가 있다.
이는 바로 이 법계가 법 자체이고 우리 역시 이 법 자체로 모두가 한 식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한 일체 만법이 특별히 어떤 의미가 없는 것이고, 이 말은 반대로 모든 것이 다 이 한 법이어서 모두가 똑같이 특별하고 귀중하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신,
“일체중생(一切衆生)에는 모두 불성(佛性)이 있어 이미 다 깨달아 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일체중생이라고 하면, 또 사람들은 사람만 생각하거나, 생명 있는 것만 생각하거나 한다.
아니다.
지금까지 말해 왔듯이 이 법계 만물이 모두 이 한 법의 법계에 이 한 법의 성품으로 생겨났기 때문에 일체 만물들은 모두 이 한 법과 똑같은 성품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사라진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런 의미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깨달음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깨달음이라 하면 사람들은 꼭 생각으로 알든 몸으로 알든 문득 알든 거꾸로 알든 어쨌든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인간이 안다는 것은 인식한다는 말이니 우리가 법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깨달음이라고 생각을 한다.
물론 인간은 인식기능이 있고, 또 태어나서 깨닫기 전까지는 법도 모르고 깨달음이 뭔지도 모르기 때문에 ‘깨달음이란 이런 것이다.’하고 인식이 와야 한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체중생(一切衆生)에는 모두 불성(佛性)이 있어 이미 다 깨달아 있다.”
는 말은,
인식의 의미가 아니라, 이 법계는 오직 이 한 법의 법계이기 때문에 세상 만법의 각각의 개체들이 인식기능을 가지고 있는 정물(情物)이든 인식기능이 없는 무정물(無情物)이든 모두가 다 이 한 법 자체라는 말로, 우리가 인식하든 안 하든 이미 깨달아 있는 법 그 자체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비록 인식기능에 좌우되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식하지 못하면 알지 못하므로 깨달았다는 인식이 중요하지만,
부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이미 그것이므로 우리 속에서 불성을 찾거나, 부처의 노릇을 배워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 불성을 가진 존재임을 알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은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불성을 가지고 있고 없음에 달렸고, 이 법계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알든 모르든 모두가 다 깨달아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법계는 이 한 법의 몸으로 한 법 그 자체여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이 한 법의 성품을 가지지 않은 것이 없어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자체가 이미 이 한 법의 성품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이 한 법 자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인식하든 하지 않든 다 깨달아 있는 것이다.
이처럼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실에까지 생각이 미친다면 따로 깨달음을 구할 필요도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세상을 살면서 존재의 삶에 필요한 것은 구할지 몰라도, 생각이 만들어낸 가치를 따라 구할 필요는 애초부터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무소득(無所得)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소득은 얻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얻어 보니 늘 가지고 있는 것일 뿐 특별한 것이 없기 때문에,
얻지 않아도 이미 있고, 얻어도 이미 있는 것을 얻을 뿐이므로 얻을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무소득은 얻을 것이 없어서 없는 것이 아니라, 따로 찾아서 얻어야 할 특별한 어떤 거룩한 것이 없다는 말이고, 특히 깨달음은 모두가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따로 찾아서 얻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항상 말씀하신 것이 바로 무소득이고, 또 모든 조사 역시 무소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관심조차도 없는 자에게 무소득을 이야기한다면, 정말로 아무런 소득이 없는 무소득이겠지만 이 게시판은 이미 자신을 구하고자 발심을 한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니, 그것만으로 충분하니 더는 구하지 말고, 다만 그 구하는 마음만 쉬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구한다는 것은 구하려는 그것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이다.
즉 모자란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하고 있는 이상 그는 언제나 부족한 자일뿐이다.
그래서 완전한 자가 되려면 오히려 완전해지려고 구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구하려는 그것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고, 그것이 부족하여 우리의 삶을 영위할 수 없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것을 구해야 하겠지만,
우리가 구하려는 그것은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고, 또 부족한 것이 아니라 이미 충만하여 따로 구할 필요가 없이 그것 자체이므로,
오히려 구할수록 고프지 않은 배가 고프고, 마르지 않는 목이 마른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을 두고
“머리를 가지고 머리를 찾는다.”
“물속에서 물을 찾는다.”
등의 말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자유를 바란다는 것은 자신에게 자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가 자유를 바라고 있는 이상 그는 언제나 속박된 자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는 자유를 바라는 그 마음에서 자유로워져야 온다.
만약 지금의 삶에서 다른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 자유라면, 우리의 삶은 한 번 얻었다고 그것이 영원히 머무는 것이 아니어서, 설사 노력하여 얻는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또 사라져 버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정처 없는 여행길을 떠돌아야 할 것이다.
깨달음을 구해서 자유를 얻는 것 역시 그러한 것이다.
만약 어떤 것을 얻어서 깨달음이 온다면, 우리의 삶은 잠시도 머물지 않고 흘러가므로, 얻은 것 역시 시간이 지나면 인연에 의해 흘러가 사라져버릴 것이니, 깨달음도 깨달음으로 찾은 자유도 언젠가는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면 또 깨달음을 구하는 악순환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또 구하는 자는 부족한 자요, 부족한 자에게서 나오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부족한 것일 뿐이다.
수행도 노력도 그 결과도... (이것은 말의 장난이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분명히 알 수가 있다)
그래서 그는 결코 완전함을 얻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진실로 완전함과 깨달음을 얻고 싶다면,
그 구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부처님께서 이천 오백 년 전에 외치신 바의 ,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어서 이미 다 깨달아 있구나.”
하신 것처럼 이미 자신이 깨달아 있음을 알고 믿어라.
하늘에 구름(구하는 마음)이 있는 이상 청정한 하늘(우리의 완전함)은 절대로 볼 수가 없다.
그 구름이 걷힐 때에 이미 푸르고 청정한 하늘이 그곳에 있음을 안다.
그처럼 구하는 마음(구름)이 있는 이상, 우리는 결코 우리의 완전함(청정한 하늘)을 얻을 수가 없다.
다만 구하는 마음(구름)이 사라질 때 이미 우리가 완전함(청정한 하늘)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하지 않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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