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실체 위에 떠도는 생각, 그리고 우리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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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 위에 떠도는 생각, 그리고 우리
우리는 법(法) 그 자체여서 허공이다.
텅 빈 허공이지만 그 속에 작용이 있어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하고, 또 텅 비어 적적하지만 신비하게도 온갖 것을 만들어내는 신령한 지혜가 있다고 하여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하고, 적적한 자리에서 그 신령스런 지혜가 늘 깨어 영리하게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생각도 하게 한다고 하여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실제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고 이 우주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바깥 경계와 인연되어 생기는 생각과 느낌은 그 텅 빈 허공위에 서로 어울려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을 뿐이다.
마치 레이저를 허공에 쏘아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이다.
그래서 원각경(圓覺經) 문수보살장(文殊菩薩章)에서 부처님께서는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시작이 없는 때로부터 갖가지로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을 장소를 바꾼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망령되이 오인하여 자기의 몸이라 하고 육진(六塵)으로 인연된 그림자를 자기의 마음으로 삼느니라. 비유하면 병든 눈이 허공 속에서 꽃이나 제이의 달을 보는 것과 같다.”
고 하시며, 우리가 마음이라고 여기는 생각은 우리의 감각기관과 대상경계와의 인연으로 생겨난 그림자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서
‘사대(四大)를 망령되이 오인하여 자기의 몸이라 하고 육진(六塵)으로 인연된 그림자를 자기의 마음으로 삼느니라.’
라는 말은,
먼저 ‘사대(四大)를 망령되이 오인하여 자기의 몸이라 하고’에서 사대는 부처님 시대에서 말하는 물질의 기본원소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화학기호 등으로 표현되는 원소들을 말한다.
그래서 ‘사대(四大)를 몸으로 오인한다.’는 것은, 우리의 몸은 이러한 원소들의 집합체이지 본래부터 이러한 고유의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말은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생기고 열달이 지나 세상에 나오는 과정을 보면 누구나 알 수가 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알과 같은 것이, 어머니의 탯줄로 들어온 영양분, 즉 몸을 이루는 원소를 공급받아 서서히 형체를 만들어서 열 달이 되면 완전한 몸이 되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을 일러 부처님은 ‘사대(四大)가 모인 것’이라 하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몸이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육진(六塵)으로 인연된 그림자를 마음으로 오인한다’는 것은, 그렇게 사대가 모인 것들이 주(主)와 객(客)이 되어, 즉 사대가 모인 몸이 주(主)가 되고 대상 경계, 나무나 풀이나 동물, 사람, 주위의 사물들인 책상, 거울, 방, 집 등이 객(客)이 되어 우리의 육근(六根)으로 들어와 우리의 생각의 기초가 되고, 그 기초로 다시 대상을 재해석하여 육식(六識)이 만들어 진 것을 사람들은 마음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이란 것은 모두 사람들의 생각을 말한다.
이처럼 생각은 인연그림자이기 때문에 한 생각이 일어나면 다른 생각이 연이어 일어나고 또 그 연이은 생각을 인연으로 또 다른 한 생각이 일어나서 끝없이 전개 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생각과 느낌, 감정이다.
우리는 통상 감정과 느낌을 마음이라고 한다. 이 마음은 모두 감정적인 생각에 감정 호르몬을 섞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기쁜 마음, 슬픈 마음 등등으로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의 진짜 마음은 앞에서 말한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 진공묘유(眞空妙有)의 허공(虛空)일 뿐 다른 마음은 없다.
어쨌든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이상 육체에 있는 기관의 기능으로 생각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이 생각이 비록 육체의 기관이 인연을 지어 만들어내는 그림자로 허깨비와 같다 할지라도,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이상 이 생각은 육체와 상호작용하면서 육체를 이끌고 다니기 때문에 육체가 멸하기 전에는 사라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생각이 끊어졌다면 그것은 곧 육체가 멸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께서는,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法身)이 색신(色身)을 떠난다.”
고 하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 우리의 육체와 그것을 기반으로 생겨난 생각은 모두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에 의한 것으로, 허공과 같은 이 한 법의 실체, 즉 우리의 본 모습인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성(自性), 불성(佛性)은, 우리의 육체와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바탕이 되지만 우리의 육체와 생각이 생기고 멸함과 변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는 마치 전기가 들어와 모든 가전제품을 움직이지만 전기는 가전제품의 작동과 효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자기 할일만 하고 있는 것과 같다.
게다가 전기와 가전제품은 서로 성질이 다른 것이지만, 우리의 육체와 생각은 모두 이 한 법이 모습으로 드러낸 그림자이기 때문에, 이 한 법이 없으면 그림자가 생겨날 수가 없는 것처럼 우리의 육체와 생각은 생겨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림자는 빛이 비칠 때에 생기는 것처럼 우리의 육체와 생각, 그리고 일체만법 역시 인연의 비춤이 있을 때 생기는 것일 뿐, 빛이 없어도 실체는 있는 것처럼, 그런 인연의 비춤이 없어도 이 한 법은 늘 변함이 없다.
그래서 육체와 생각의 일어남과 사라짐 그리고 변화가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으로 일어나지만, 이 한 법은 그것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 한 법은 일체만법을 내고 변하게 하지만 그것에는 티끌만큼도 영향을 받지 않는 나지도 죽지고 않고 시작도 끝도 없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의 실체이고, 이것이 실제의 우리 본 모습이다.
이처럼 이 한 법과 그것으로 나온 육체에 의해 생겨난 우리의 생각은 실체위에 구름같이 떠도는 허깨비이면서도 스스로는 자신이 마치 살아 있다고 믿고 오히려 우리의 본성인 것처럼 착각하고 나아가 우리 자신을 속이고, 오히려 스스로 실체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기 위해 모든 것을 자기를 중심에 두고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의 잣대로 판단한다.
그 판단이 바깥 세상만 아니라, 심지어 생각이 스스로 지은 과거의 일까지도 현재의 판단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며,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의 판단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거나 인식조차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착하고 미련한 우리는 그 생각에 속아서 마치 생각이 나인 것으로 믿는 나머지
생각이 슬퍼하면 같이 슬퍼하고
생각이 두려워하면 같이 두려워하고
생각이 분노하면 못 참아 하고
생각이 원망하면 같이 원망하고
생각이 기쁘면 좋아 날뛰고
생각에 따라 변화무쌍한 날씨처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이 아무리 이러해도 마음이 텅 비면 실체가 보이고 생각의 장난이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본래 텅 비어있고 온갖 일이 일어나도 아무런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와 생각이 모두 그 바탕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이 어떤 장난을 치든 이 허공과 같은 법은 그것에 조금도 물들지 않는다.
이것을 ‘니사르가닷타 마하라지’는 이렇게 비유하였다.
“건물이 무너진다고 허공이 무너지랴?”
참으로 멋진 비유가 아닌가?
어쨌든 우리의 본래성품, 즉 텅 빈 마음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각이나 변해가는 우리의 몸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데,
우리의 생각은 이 한 법의 성품에서 바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육체라는 한 단계 거친 상태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육체가 생기기 이전의 근원, 즉 이 한 법에 대해선 꿈에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육체가 있는 한 자신이 인연에 의해 생기고 변하고 사라지는 허상임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실재한다고 생각하며, 심지어 자신이 생각만 하면 육체가 움직이니 자신보다 먼저 생겨난, 그리고 법에 더 가까운 우리 육체를 지배한다고 착각하고, 나아가 이 세상조차도 자신이 지배한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생각은 자신을 우리라고 세뇌시키고, 말 잘 듣고 바보 같은 우리는 이 텅 빈 허공 같은 실체가 자신임을 잊어버리고 이 생각이 자신이며 자신의 주인이라고 여기고는 착한 종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어쨌든 이처럼 생각의 태생이 이러하여 우리의 본모습을 보는 기능이 없고 그러기 때문에 생각이 보려고 할수록 자신의 헤아림으로만 더 성성해져 오히려 본모습을 보는 것마저 방해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의 본모습을 보려면 생각의 이러함이 그쳐야 하고 그것을 일러 한 생각 쉰다, 또는 한 생각이 죽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렇게 한 생각 쉬어 생각의 헤아림이 멈출 수 있는 것은 어떤 인연에 의해 생각의 흐름이 딱 끊기는 때이다.
이를 일러 깨달음이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의 이런 교활함을 알지 못하여 오히려 자신이 생각이라고 착각하고, 생각은 우리가 해야 되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규정하여 우리를 그곳에 가두고는 제 뜻대로 조종하며 부려먹는 것이다.
이처럼 생각은 우리를 끊임없이 흔들면서 우리가 생각에서 떠날 수 없도록 만들고, 우리는 늘 생각을 중심에 모시고는 이 생각이 휘두르는 지휘봉을 따라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그것이 마치 진실인 것처럼 속아 사는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생각의 속임수에 가려 진정한 자신을 볼 수가 없다. 즉 마치 물위에 떠다니는 오염물 때문에 물의 맑음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오염물이 바로 ‘실체 위에 떠도는 생각’들이다.
선지식들은
“마음위에 한 물건도 올려놓지 마라.”
라고 한다.
여기서 물건이라는 것이 바로 오염물로 자신의 생각과 그 생각에 속아서 생각이 가리키는 것을 따르고 심지어 그것에 집착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진정한 자신을 만나려면 이러한 생각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선지식들이 마음위에 물건을 올려놓지 말라는 것은 생각을 그냥 떠도는 구름처럼 여기고 저대로 놀도록 그냥 두라는 뜻으로, 생각으로 만들어진 논리에 휘말려서 해결하려거나 없애려고 하는 등, 어떻게 하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을 어떻게 하려는 자체가 생각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없는 놈을 없는 곳으로 보내려면 그것을 마치 떠도는 구름이나 흐르는 물처럼 여기고, 일어남은 인정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하려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고 반응하지 말아야 한다.
즉 우리가 꿈을 꾸지만 일어나면 ‘꿈이구나.’ 하고 그냥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물론 처음에는 잘 안 된다.
왜냐하면 수십 년을 모시고 살았던 생각이기 때문에 생각의 위력에서 갑자기 벗어난다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 번이나 속을 것이다.
하지만 속는 것조차도 꿈을 꾼 듯이 사실만 인정하고 다시 그것을 시비하지 않으면 끝내 생각은 물러난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하다.
여기서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지금 내가 말하는 생각은 생각하는 기능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 망동을 부리는 것을 말한다.
깨달아 이 생각이 허깨비임을 알면 우리가 생각의 주인이 되고 이 생각은 우리의 말을 잘 듣는 일꾼이 된다. 물론 하루아침에는 아니지만 이미 생각의 실체를 봤기 때문에 점점 생각의 술수에서 벗어나고 생각을 내 뜻대로 쓸 날 오게 된다.
그래서 지금 글에서 말하는 생각에 대한 표현은 생각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우리의 주인처럼 여기고 우리를 종처럼 부려먹으려는 그 놈을 말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생각을 비워라.’라는 말은 시비분별하여 우리를 어떻게 하려는 그 놈의 말을 듣지 말라는 말이지, 생각 자체를 하지 말하는 뜻이 아님을 잘 알아야 한다.
생각이 우리의 종이 되면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생각을 비워라.’라는 말을 생각 자체를 아예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빈 마음으로 앉아 있는 수행을 하는데, 이 모두 무기공(無記空)에 빠진 사법(邪法)임을 알아야 한다.
내가 ‘의심하기에 의심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는 의심이라는 것 자체가 생각이 만들어낸 논리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저 이 한 법의 인연으로 흘러가다보니 모든 것을 하나로 보고 함께 하는데,
모든 것 중 한 개체에서 생겨난 생각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하나인 모든 것을 위해 때론 자신을 희생해야 하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너무 많다.
이것이 의심의 발단이다.
그리고는 생각의 입장에서 그러한 것들이 자신에게 ‘옳은가 옳지 않은가’, 또는 ‘이익이 되는가 안 되는가’ 하고 생각을 굴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의심이 논리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이 한 법의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모두가 다 이 한 법의 인연이요, 일이어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한 개체에 기생하며 그것이 자신의 세상이라고 여기고 또 목숨 줄이라고 여기는 생각으로 볼 때에는,
전체를 위하는 것은 개체적인 생각이 죽는 것과 같은 것일 수밖에 없으니 생각은 모든 것을 개체의 논리로 따지게 되고,
생각은 한 개체 바깥을 나가본 적이 없어 아무리 다른 세상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 기준은 개체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또 세상의 모든 일을 다 경험할 수 없으니 당연히 의심이 생기는 것이다.
이를 일러 ‘의심하기에 의심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생각의 놀음이다.
그래서 육조단경 '수행편'에서 육조혜능스님은
“만약 어리석은 사람을 교화하고자 할진 대는 모름지기 방편이 있어야 하나니 저로 하여금 의심을 깨뜨리게 하지 말라.”
라고 하셨다.
육조스님이 ‘저로 하여금 의심을 깨뜨리게 하지 말라.’라고 한 말의 뜻은, 의심거리를 만든 주체가 바로 생각이기 때문에 의심을 깨뜨리려고 어떻게 하려는 순간 생각의 논리와 술수에 말려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심하지 않으면 풀려고 할 필요가 없다. 즉 풀려고 한다는 것은 이미 의심을 인정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심을 풀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의심하는 생각을 인정하게 되고, 그러면 곧 바로 생각의 술수에 말려드는 것이다.
그래서 설사 생각에 속아서 한 생각이 의심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무시해버리면 의심을 풀 이유가 사라진다.
물론 이 생각이란 놈은 없는 놈이 생겼기 때문에 자신이 인정받기 위해 의심 쪽으로 우리를 질기게 끌어당기려 할 것이다.
하지만,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또 한 두 번 속았더라도, 아니 수십 번을 속았다 하더라도 속은 것을 안 순간 무시하면 결국 생각은 굴복을 한다.
즉 아무리 속아도 그것을 알 때 내버려두면 생각에게 이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은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의심이 드는데 어찌 풀지 않느냐고 또 의심하겠지만, 인생 전체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에 맘에 들지 않는 일, 의심스런 일, 또 죽을 것 같은 일들이 없지 않았고, 또 지금 되돌아봤을 때, 그 모든 일을 명쾌하게 풀어서 지금까지 산 것도 아니다.
그리고 물론 그 모든 의심을 다 해결하고 생각이 하는 대로 인생이 흘러갔다면 더 나은 인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한치 앞을 어떻게 알고 그것에 대비하겠는가?
그리고 나라는 좁은 경험에 갇혀 있는 이 생각이 세상을 마치 손바닥 보듯이 다 아는 지혜가 있으리라고 어떻게 믿겠는가?
그리고 생각 스스로도 다음 생각이 어떻게 일어날지 미처 알지 못하고 늘 지나간 것을 들고 시비하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선 티끌만한 답도 내어놓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은 지나간 일을 붙잡고는 그 때에 지금의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자책하는데, 우리는 늘 지금의 생각이 자신이 아니고, 지나간 과거의 생각이 나인 것처럼 여기고는 그 자책에 시달리고 고민하고 아파하고 뒹구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를 괴롭히는 생각은 조금도 아파하지 않고 자책하지 않고 고민도 하지 않고, 그렇게 뒹구는 우리를 두고 더욱 더 신이 나서 따지며 두들길 뿐이다.
그것이 우리의 생각의 실체이다.
이제는 이런 짓을 그만 둘 때가 되지 않았는가?
생각은 실체가 없다. 즉 실체가 없는 것이 생각의 실체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더욱 자신을 인정받으려고 우리를 모질게 다루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허망한 생각이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고, 생각은 뿌리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에 마음을 쓰지 않으면 아무 짓도 못하는 사기꾼 같은 놈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이놈이 주인 짓을 할 때 만이다. 우리의 충직한 머슴일 때는 아주 유용한 도구다. 그러니 생각 자체를 버리려고는 하지 마라.
어쨌든 우리는 생각이 아니라 이 한 법 그 자체다.
그래서 우리가 비록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생각을 쓰고 살지만, 우리가 있고 생각이 있게 된 것이지, 생각이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므로, 생각이 말을 듣지 않으면 그냥 다른 생각으로 바꾸면 그만이다.
즉 하인이 주인의 말을 안 듣고 교묘하게 주인을 속이고 주인을 부려먹으려 하면 그냥 내치면 그만이지 그에 놀아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생각이 바뀐다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니 그것에 끌려 다니지 마라.
그것이 생각을 죽이고 진정한 자신을 살리는 길이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생각에 끌려가지 않는 방법은 생각을 시비하면 절대로 안 된다.
왜냐하면 시비하게 되면 또 생각과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하고, 그러면 결국 생각을 실상이라고 인정하는 꼴밖에 안 되기 때문이고, 그러면 생각은 그 즉시 ‘옳다구나.’ 하고 자신이 마치 실제로 존재하고, 또 우리의 주인인 양 우리에게 덤벼들기 시작한다.
생각은 강력한 풀과 같아서 건드리기만 하면 들러붙고, 한 번 붙으면 온갖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잡고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고, 이미 가까이 갔다면 모른 체 하고 외면하고 돌아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내 버려두라.
그리고 마음을 살펴 한 물건에라도 끄달리고 있다면 그것은 생각이 뒤에서 조종하는 것이니 그냥 버리고 잊어라.
그렇게 일체를 텅 비워 버리면 허공과 같은 자신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만난다는 것은 없는 것을 만난다는 것이 아니라 본래 그것인데 생각에 가려서 알지 못했던 자신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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