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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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몸에 병이 없는 까닭(유마경에서...) (몇 부분에 수정함)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2,024

20-03-20 23:17

본문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고하시되

“네가 유마힐에게 나아가 문병하여라.”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시되,

“세존이시여, 저는 거기에 나아가 문병함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어떤 까닭인지 돌이켜 생각하오니, 지난날에 세존께서 몸에 작은 병이 있으시어 마땅히 소젖을 쓸까 하여 저는 곧 바리때를 가지고 큰 바라문의 집을 찾아 문아래 섰나이다.

이때에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아난이여, 어찌 이른 아침에 바리때를 가지고 여기에 머무시오?’

제가 말하되,

‘거사시여,

세존께서 몸에 약간의 병을 두시와 마땅히 소 젖을 써야 하는 까닭으로 여기에 왔나이다.’

유마힐이 말씀하시되,

‘말을 그치시오. 아난이시어. 이런 말을 내지 말지니, 여래의 몸이란 금강의 체(體 -바탕)라 모든 악은 벌써 끊기었고 뭇 선함이 널리 모였거늘 마땅히 무슨 병이 있겠으며 무슨 번뇌가 있으리오?

그냥 잠자코 가실지이다. 아난이여.

여래를 비방하지 말지니,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이 거친 말을 듣지 말게 하고, 큰 위덕의 모든 하늘 사람과 다른 정토에서 온 모든 보살로 하여금, 이 이야기를 얻어듣지 말게 하시오.

아난이여,

전륜성왕은 적은 복으로써도 오히려 병이 없음을 얻거든, 어찌 하물며 여래님의 한량없는 복 무더기의 수승함이야 어찌하겠소?

가실지이다. 아난이시여

우리들로 하여금 이 부끄러움을 받게 하지 말지니, 외도 범지가 만약 이 이야기를 들으면 마땅히 이 생각을 짓되, 어찌 스승이 된다고 이름하리오.

자기 병도 능히 구하지 못하거든 능히 모든 병을 구하랴 하리니.

어진이여,

가만히 속히 가서 사람으로 하여금 듣지 못하게 할지이다.

마땅히 아실지어다 아난이여,

모든 여래의 몸은 곧 이 법신이요, 사량(思量 - 사량분별)과 탐욕의 몸이 아니시니,

부처님은 세상에 존귀하여 삼계에 두루하며,

부처님의 몸은 새는 곳이 없는지라 모든 새는 것은 이미 다하였으며,

부처님의 몸은 함이 없음인지라 모든 술수에 떨어지지 않으시니,

이와 같은 몸에 무슨 병이 있으리오.’

이때에 세존이시여,

저는 실로 부끄러움을 품고, 부처님을 가까이 모셨건만 잘못 들음이 없었던가 하였더니, 곧 공중에서 소리가 들리며 가로되,

‘아난아, 거사의 말과 같음이나

다만 부처가 오탁악세(五濁惡世)에 나서 이 법을 행하고 있음은 중생을 건지시어 해탈케 하는 터이니,

갈지어다. 아난아.

젖을 가지고 가는 것을 부끄러워 말지니라.’

세존이시어,

유마힐의 지혜와 판별하는 재주가 이와 같을새,

이런 까닭으로 나아가 문병함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 유마경의 제자품(弟子品) 중에서 -

 

유마경(維摩經) 제자품(弟子品) 아난(阿難) 편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要旨)는,

‘부처님의 몸은 법신이어서 분별과 탐욕의 몸이 아니며 모든 착함과 악이 끊기어서 병도 없고 번뇌가 없는 몸이니 무슨 병이 있겠는가?

하지만 부처님께서 병을 보이신 것은 중생을 제도함이니 부끄러워하지 말고 소 젖을 가지고 가라.’

라는 유마힐(維摩詰)의 말이다.

 

유마힐과 아난의 차이는 아난은 부처님의 몸을 분별하여 보아 병이 있다고 보았고, 유마힐은 부처님의 몸을 분별없는 눈으로 보았기에 병이 없다고 한 것이다.

 

이 경에서 말하기를,

“모든 부처여래의 몸은 곧 법신이요 사량(思)과 욕구(欲)의 몸이 아니다.(諸如來身 卽是法身 非思欲身)”

라고 하였듯이, 모든 부처님의 몸은 색신이 아니라 분명히 법신(法身)이라고 했다.

 

법신은, 바로 진여자성(眞如自性)의 체(體), 즉 이 한 법을 말한다.

이 한 법은 모든 것의 근본이며, 분별이 끊어진 자리이며 원만 구족한 자리다.

그리고 일체의 모양 없어 한 티끌도 앉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이 한 법의 자리이므로 병은 말할 것이 없다.

 

그리고 법신이 아니라 색신이라고 해도 사실 병이라는 것이 없다.

 

이 세상에 드러난 모든 것은 다 색신이다. 그리고 그 모든 색신은 그것과 똑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오직 그것밖에 없는 것이다.

 

즉, 윤기붕은 이 우주에 오직 하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밖에 없는 윤기붕을 무엇과 비교해서 병이 들었느니, 착하다느니, 악하다느니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윤기붕이 세상에 태어난 시점과 장소와 같은 존재가 없고,

그가 자라면서 만난 환경 역시 같은 존재가 없고,

그가 자라는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습 역시 같은 것이 없고,

그의 생각 역시 같은 것이 없는데, 어찌 병이 있느니, 없느니, 착하니, 악하니 하고 비교할 수가 있단 말인가?

 

실제로 우리가 사과라고 하지만, 사과를 하나하나 보면 사과 역시 윤기붕과 같은 상황이어서 똑 같은 것이 없는 세상에 유일한 것인데 어찌 비교 대상이 될 수가 있겠는가?

 

비교라는 것은 상대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 비교할 상대는 똑 같은 것, 즉 내용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똑 같아야 평등하게 비교할 수 있는 것이지, 티끌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그것은 이미 독립된 존재로 어떤 것에든 비교할 수가 없다.

즉 달리기를 하든지, 물건을 만들게 하여 누가 잘하나 하는 것은 실제로는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것이 다 다른데 어떻게 하나의 상황에 집어넣어 잘하나 못하나 하고 비교한다는 말인가?

물론 비교는 할 수 있겠지만 그것으로 우열을 매긴다면 그야말로 불평등한 것이지 어찌 옳은 비교라고 하겠는가 말이다.

 

이처럼 비교할 상대가 똑 같지 않은데 무슨 잣대를 기준으로 비교한단 말인가?

 

오래 전에 택시를 할 때 손님과 나눈 이야기인데

 

대구는 거리가 바둑판과 같아서 목적지로 가는 길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대구의 손님들은 길을 선택함에 따라 요금의 차이가 나기 때문에 기사가 길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좀 민감한 편이다.

그래서 애초에 시비를 없애기 위해 미리 손님에게 어느 길로 가면 좋으냐고 물으면, 거의 대부분이 빠른 길로 가자고 한다.

 

그러면, 내가 웃으면서 이렇게 답을 한다.

“손님, 어느 길로 가는 것이 빠른지를 알려면 똑 같은 성능과 조건의 차를 타고 똑 같은 기사가 똑 같이 출발해서, 신호등 그리고 지나가는 차량, 길의 상태 등의 똑 같은 조건을 지닌 두 개의 길로 가야 어느 길이 빠른 길인지 알 수 있는데,

모든 것이 다 다른 이 상태에서 어떻게 어떤 길이 빠른지 느린지를 알겠습니까?”

하면, 그들도 내가 농담조로 하는 말인지 알아듣고 함께 웃는다.

물론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우스갯소리로 하지만, 실제로 이성적으로 곰곰이 생각해보면 실로 그렇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가 있다.

 

이처럼 비교라는 것은 모든 조건이 똑 같아야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삼라만상의 모든 색신은 모두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들이니 아무리 비교하려 해도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즉 상대적으로 판단할 존재가 아니라 모두가 절대적인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하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이럴진대 어떤 기준을 만들어 비교하고, 그 존재가 병이 있느니, 없느니 한단 말인가?

 

오직 그것밖에 없는 절대적인 것에 병이라는 것을 어찌 갖다 붙이겠는가?

 

물론 이 글에서 말하는 것은 육체적인 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인 병은 나라는 주체는 모두 다르지만, 다들 인간이라는 같은 종(種)으로 같은 조건과 원리와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고, 환경에 의해 조금씩 다를 뿐이어서, 서로를 비교하고 또 그 비교를 통해 병의 원인을 찾아내고 치료법도 찾아낸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과 의지, 세상을 대하는 방법, 그리고 깨달음과 깨달음의 상태 등은 오직 그 사람의 것이고, 또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찰나라도 이전의 그와 지금의 그는 이미 달라져 있기 때문에 절대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유마가 부처님께 병이 없다고 하는 뜻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마힐이 말하는 병이라는 것은, 똑 같은 존재가 똑 같은 조건에 처하여 둘을 비교하여 하나는 병이 없고 하나는 병이 있는 상태를 볼 수 있다면 ‘아...! 이것은 병이 들었구나.’ 할 수가 있지만, 실제로는 이 세상에는 똑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병이 들었구나.’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유마가 병이 없다고 한 것은 이 한 법에는 애초에 병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어떤 상태이든지 모두가 이 한 법의 일일 뿐 거기에 어떤 차별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일체가 한 법이어서 실제로 병이 있다 하여도 그것 역시 이 한 법의 평등한 모양이요, 건강하다 하더라도 역시 이 한 법의 평등한 모양이다.

 

법이 이러한데 무엇으로 비교하여, 병이 있느니 없느니 할 수가 있을 것인가?

 

사람들은 세상을 잘 비교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세상에 오직 그것밖에 없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요, 또 모두가 평등하여 죽고 사는 생사나, 병이 있고 없음이나,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이 다 하나일 뿐 둘이 아님을 유마는 병을 비유로 삼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병이라 하는 것처럼 비교할 수 있는 머무는 모양들은 다만 분별하는 우리의 생각 속에만 있고, 그것도 이미 지나가고 없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이름일 뿐 실제 세상에는 어디에도 없고, 어떤 것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쓰는,

거룩하다느니, 착하다느니, 옳다느니, 아름답다느니 하는 것 역시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 가치를 나누고 있을 뿐, 실제로는 그런 인연으로 그런 모양을 띠며 흘러가는 것일 뿐이다.

 

이런 세상에 무슨 거룩함이 있고, 비속함이 있고,

착함이 있고, 악함이 있고,

옳음이 있고 그름이 있으며,

아름다움이 있고, 더러움이 있겠는가?

 

그냥 매 순간 그것의 그러한 상태일 뿐이다.

오직 그만이 누리고 있는 그만의 절대적인 상태에서 말이다.

 

지금 말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공간적인 상태를 말한 것이어서,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시간적으로 전에는 건강했는데 지금은 병이 들었다면 그것은 비교할 수가 있지 않겠는가?”

 

물론 굳이 하려면 할 수가 있다.

하지만 보라!

세상에 드러난 모든 것은 인연으로 생겨나고 인연으로 변하며

잠시도 머물지 아니하고 흘러가므로,

그것의 과거는 흘러가 버렸으니 없고,

현재는 계속 흘러가고 있으니 잡을 수가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또한 없다.

 

그런데 ‘과거에는 이랬는데 지금은 이러니’ 하고 비교하여 따지는 것이 성립이 되는가?

이미 사라지고 없는 상태를 가지고 지금의 상태와 비교할 수가 있는가 말이다. 그리고 이미 지나간 것을 비교하는 것은 순전히 기억에 의존하는 것인데, 이 기억이 과연 정확하고 공평할 수 있는 것인가?

 

매 순간 존재하는 것은 오직 그것밖에 없고 그 순간의 상태인 그것을 과거의 것과 지금의 것을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착각인가?

 

우리는 늘 가는 길을 가기에 그 길이 늘 똑 같은 줄 안다.

특히 우리의 생각은 특징만 기억하여 비교하기 때문에 비슷하면 똑같은 줄 안다.

그러나 세밀히 살펴보라.

길의 먼지나, 길의 흙의 상태나 그 시간에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똑 같은 것이 있던가?

그리고 시간이 멈춰있는가?

 

윤기붕이라는 존재도 역시 일 초 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똑 같다고 할 수가 없다.

일 초 전의 세포들과 지금의 세포가 다르고,

일 초 전의 생각과 지금의 생각이 다르고,

일 초 전의 피부와 지금의 피부가 뭔가 달라도 달라져 있고,

일 초 전의 나의 환경과 지금의 나의 환경이 뭐라도 달라져 있다.

그 모든 것이 이미 다 달라져 있지 않는가?

사실이 이러한데 무엇이 같은 것이 있어서 무슨 조건을 기준으로 비교한단 말인가?

 

매 순간 오직 그것밖에 없는데....

 

이처럼 세상은 오직 그것밖에 없으니,

모든 만물은 매 순간 비교된 완전함이 아니라,

완전함도 불완전함도 없는 완전함,

절대적인 완전함을 살고 있는 것이다.

 

설사 내가 팔다리가 멀쩡하다가 잘려나가도 그냥 그러한 상태이지, 그것이 팔다리가 잘렸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팔다리가 잘렸다는 것은 팔다리가 잘리지 않는 내가 같이 존재해야 비교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존재하지도 않는 내가 어찌 존재하는 지금의 나와 비교될 수가 있단 말인가?

 

비교될 수 없는 것,

그것은 절대적이며, 그것은 매 순간 완전한 것이다.

그것은 개체의 나라는 것만 아니라,

삼라만상의 모든 만물 역시 그러하고, 삼라만상의 집단 역시 그러하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 세상, 즉 이 법계는 매순간 그것밖에 없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처럼 팔다리가 온전한 나는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인 것처럼, 병이니 고통이니 하는 모든 것들도 과거의 기억으로 현재를 판단하여서 규정하는 것일 뿐이다.

 

즉, 비교할 수 없는 기준을 가지고 비교하여 판단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말에 사실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유일한 내가 있다는 아상에 의존해 사는 탓에 하나의 존재는 같은 존재로 계속 이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드러나 존재하는 것은 모두 이 한 법의 인연의 산물일 뿐 그 자체로의 주재자(主宰者)가 없다. 그래서 항상 똑같은 항일(恒一)하는 존재가 없다.

이런 까닭에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라는 것 자체가 성립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세간의 삶은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살고, 또 우리에게 기억이라는 것이 있어 그런 생각으로 산다.

하지만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엄밀히 말하면 세상에는 존재하는 것은 매 순간의 인연으로 끊임없이 변해갈 뿐, 그 어떤 것도 항상 하는 동일한 존재가 없다.

 

이렇게 모든 것은 스스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으로 변해가기 때문에 모든 인연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단순히 한 존재의 두 가지의 모양과 상태만 독립적으로 놓고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그것밖에 없는 절대적인 하나라는 것이고, 그 변함에 붙은 이름, 즉 병이니,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것은 모두 생각의 착각이 만들어낸 허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사라져버리고 없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어떤 상태를 가지고 현재를 비교하고 판단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분별인 것이고, 그것이 똑같지 않다고 우열을 나누며 다투는 것이 시비다.

 

‘과거에는 이랬는데...’

 

물론 과거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과거와 모든 것이 달라져 버렸는데,

무엇이 과거와 같아서 지금을 탓한단 말인가?

 

기억 속의 것은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고,

기억에는 현재를 알 수 있는 어떤 자료도 없으니.

그런 기억 속의 자료로 어떻게 현재를 판단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이미 지나간 과거의 기억은 진리가 아니고, 오지 않은 미래 역시 기억으로 유추한 세상이니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오직 현재만이 진리이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매 순간 머물지 아니하고 흘러가니, 그것 역시 진리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不可得)”

이라고 하는 것이다.

 

경전(經典)은 깨달은 사람이 있지도 않거나 현실이 아닌 저 어떤 곳에 있는 진리를 상상으로 가져와 말한 것이 아니라 실제의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드러난 것을 똑같은데 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말하는가?

그것은 깨닫게 되면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지 못했던 것을 본다는 것은, 실제로 있는 것의 모양이 달라져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실제 모양에 얹어 놓았던 생각의 망상이 떨어졌기 때문에 전과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즉 그동안은 자신의 생각, 즉 한 개체의 좁은 경험을 마치 세상의 모든 법칙인 것처럼 확대하여 세상을 보다가,

이 한 법의 본성을 보고는 일체만법이 모두 이 한 법의 본성에 의해 세상에 드러나고,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으로 평등하고 엄정하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깨달아,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렇게 보이는 대로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은 마술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신통력을 얻는 것도 아닌,

생각의 눈에 가려 알지 못했던,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는 눈을 찾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본래마음은 세상이 끊임없이 흘러가 과거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을 몸으로 알기 때문에 과거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현재 역시 현재라고 여기는 순간 이미 변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마음으로도 보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미래의 마음으로도 세상을 보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인연으로 개체마다 고정된 내가 있다는 생각하나가 인연으로 변해가는 이 몸에 기생하면서 나라는 집을 짓고 살려고 하는데, 세상과 몸은 끊임없이 변하는 인연의 수레와 같아 그 위에서 그 흔들림으로 살기가 너무 어려우니, 자기 맘대로 규칙을 정하고는 몸이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모든 정보를 자기를 중심으로 연결시켜 왜곡시켜놓았던 것이다.

 

깨달음은 그 생각의 눈이 가짜임을 알고 본래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세상을 본다고 하는 것이다.

 

그 다름은 바로 깨달은 사람들은 세상이 그러함을 따라, 즉 인연을 따라 사는 것으로

“과거의 마음에서도 얻으려 하지 않고(과거심불원득 - 過去心不願得)

현재의 마음에서도 얻으려 하지 않고(현재심불원득 - 現在心不願得)

미래의 마음에서도 얻으려 하지 않는 것(미래심불원득 - 未來心不願得)”

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을 금강경에서는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이라고 한 것이다.”

 

진리의 삶은 오직,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

매 순간 머물지 아니하고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진리는 머물지 않아 잡을 수 없고, 그러하기에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아 조금도 이지러짐이 없고, 어떤 것에도 비교될 수 없어 늘 절대적이며 완전한 것이다.

 

설사,

이 우주가 멸하고 모든 것이 다 사라진다고 한다 해도,

그 상태 역시 오직, 그것뿐이기 때문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조차도 완전한 상태이다.

 

이처럼 이 법과 삼라만상은 매 순간, 그리고 늘 완전하고 원만 구족하다.

그러니 어디에 병이라는 것이 갖다 붙을 자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부처님의 몸이 법신이 아니고 색신이라고 해도 결코 병은 없는 것이요, 이 한 법은 불이법(不二法)이니 법신(法身)이 바로 색신(色身)이요, 색신이 바로 법신인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병을 보이신 것은, 중생들이 분별하는 것을 병을 통해서 병을 보이신 것이다.

 

즉,

모든 것은 비교분별만 하지 않으면 완전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비교 분별하는 마음이 생기므로 좋고 나쁨이 생기고,

좋고 나쁨이 생기므로 취하고 버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취하고 버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니 세상의 사물과 자신 속에 있는 감정들에 대해서 빼야할 것이 있고, 더해야 할 것이 생기고,

그리고 또,

그렇게 빼야할 것이 생기고 더해야 할 것이 생기니 완전한 것이 있고 불완전한 것이 생기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유마경에서 병이 들어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위문하라고 하시어 많은 대중들이 문병을 갔을 때에 유마거사는 그들에게

“중생이 병이 들었으니 나도 병이 들었다.”

라고 하였다.

 

중생의 병이 무엇인가?

바로 위의 유마경에서 말하는 사량(思量)하는 분별과 탐욕스러운 마음이다.

 

유마의 몸은 병이 없건만,(삼라만상은 완전하여서 이지러짐이 없건만,)

중생의 분별하는 눈으로 보니 병이 생겼다는 말이다.(즉, 삼라만상이 불완전해졌다는 말이다.)

 

부처님의 병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의 분별하는 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해 병을 보이신 것이지, 진실로 병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유마경이 생긴 것이고,

유마경은 공(空)을 설하여서 대중들에게 비교 분별하는 마음을 떼 내어 주려는 경이다.

 

진실로 진실로 병이 없으려면 현재의 상태를 병이라고 한탄하지 말고 그것을 병이라고 분별하는 그 마음을 버려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또,

이 글을 읽고 미련하게 병이 걸렸는데도 병원에 가지 않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유마거사가 그런 말을 아난에게 하고도, 하늘에서 아난에게 죽을 얻어 가라고 한 말이 이런 뜻임도 알아야 한다.

 

병이 났으면 병을 고치되 병에 매이지 말라는 말이다.

 

고칠 수 있는 병이어서 고치고 산다면 병이 걸린 상태 역시 이미 사라져버린 것이므로 병이 나았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고칠 수 없는 병이라면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살 수 있어야 한다.

 

분별하지 않는 자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세간과 출세간을 뛰어넘은 삶인 것이다.

 

경을 읽을 때에는 글로만 읽지 말고 또 경에 굴리지도 말고 항상 분별없는 마음으로 경을 굴리며 읽어야 한다.

그래야 진실로 그 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다.

 

댓글목록

윤기붕님의 댓글

어제 낮에 일이 좀 많아 밤 늦게 글을 올리다 보니 몇 군데 미진한 곳이 있어 중간중간 수정과 첨삭을 하였습니다.

진천현님의 댓글

친절한 법문 훌륭합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