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520년 10월 어느날, 달마조사는 중국에 와서 양무제를 만났다.
양무제가 물었다.
“짐이 즉위한 후로 스님들을 받들고 사찰과 불탑을 건립하고 경전을 펴내고 불상을 수없이 조성했는데, 짐의 공덕이 얼마나 크다고 보십니까?”
그러자 달마조사는,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양무제는 자신이 한 일이 불사에 보탬이 되는 참으로 공덕을 쌓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서쪽에서 대단한 스님이 왔다고 하니까, 자신의 일을 자랑하듯이 자신의 일의 과보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나, 달마는 양무제의 그러한 바램을 무참히 깨어버리고 만다.
양무제가 한 일은 공덕이 아니라 복덕을 짓는 일이다. 그것은 자신이 아무리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 내면에는 반드시 과보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자신이 한 일로 인해서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다든지, 더 나아가 내세에 극락에 들어가는 것 까지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언젠가는 사라질 무상한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그러한 것들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바램으로 인하여, 그러한 결과가 오지 않으면 오히려 자신의 일을 후회하고, 또 그러한 것을 알아주지 못하는 자들에게 대한 미움과 원망을 만들어내는 씨앗이 되기도 한다. 선업은 선과가 생기고 악업은 악과가 생긴다. 세간에는 선업을 지은 것을 아름답다하고, 악업을 지은 것을 몹쓸 일이라고 하지만, 출세간법으로 볼 때에는 선업을 짓는 것이나 악업을 짓는 것이나, 둘 다 업을 짓는 것이요 과보가 따라오는 일이니 생사를 윤회하는 원인을 만드는 씨앗일 뿐이다.
진정한 공덕은 우리의 본 모습이 텅 비고 자취가 없는 것처럼 텅 비어서 자취가 없는 것이어야 하는데, 양무제는 오히려 그 많은 자취를 남겼으니 어찌 공덕이 있다고 할 것인가? 달마가 무제가 한일을 두고 공덕이 없다고 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무제는 조사의 말을 듣고 의아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입니까?”
조사가 말했다.
“본체가 맑고 공적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이런 지혜는 세속적인 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공덕이라는 것은 사실 없다. 있다면,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산다는 것은, 분별을 하지 않는 다는 말이다. 분별의 원인이 무엇인가? 무언가 더 나은 자신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어릴 때부터 자신도 모르게, 그리고 세세생생을 거듭하며 주위와 타인에게 인정받고 그러함으로 더 편하고 멋지게 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마음은 계속 자신이 경험한 것들 중에 괜찮고 멋지고 바람직한 것을 기억의 창고에 넣어두고는, 자신의 행동을 끊임없이 그것과 비교하여, 자신의 행동이 조금이라고 나으면 자랑하고 싶어하고(무제가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하듯이) 아니면 자신을 비하하고 후회하고 쥐어뜯는다.
이러한 것을 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분별하는 생각이다. 생각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없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고 더 나은 어떤 것과 비교하여 자신을 괴롭히는 그것이 바로 분별하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에 잡혀서, 늘 어떤 자취를 가져야하고, 늘 어떤 것을 보여줘야 하고, 늘 어떤 가치를 가져야 하고, 늘 어떤 댓가를 얻어야 하는 그러한 탁한 지혜가 아니라,
늘 있는 그대로, 매 순간 한번도 같은 적이 없는 삶속에서, 너무나 당연한 삶을, 너무나 당연한 삶이니, 어떤 자취도 없고, 보여줘서 자랑할 필요도 없고, 너무나 당연하니 따로 가치를 따질 필요도 없고, 또 댓가를 바랄 필요도 없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 어느 것에도 걸리지 않으면서.... 이러한 것이 바로 맑고 공적한 지혜이다.
그래서 세속적인 일을 많이 하고 아니하는 것에서, 공덕의 많고 적음을 따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세속적인 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삶, 그 자체가 공덕이요. 모든 삶이 공덕이니 공덕이랄 것도 없다. 다만, 분별하는 그 마음이 공덕을 바라고 있으니, 공덕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자, 무제는 두 번째 질문을 하였다.
“무엇이 불법의 성스러운 진리 가운데 첫째가는 것입니까?"
달마가 대답했다.
“진리는 확연하여 아무 것도 성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무제의 질문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다. 그는, 세속적인 일로서 자신의 과보를 받고자 한 사람이니, 그의 마음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 그리고 성스러운 것과 비속한 것이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너무나 확연하다. 우리는 진리가, 도가, 또는 자성이, 불성, 신이 저 우주 어느 구석에 숨어서 이 우주를 마치 CCTV로 우리를 감시하면서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 하고 있는 줄 착각하고 산다.
그러나, 진리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우리가 늘 살아가는 그 모습 그것이 바로 진리인 것이다. 즉, 배고프면 밥을 먹고, 잠이 오면 잠을 자고, 뒤가 마려우면 변소에 가고, 또 자신이 할 일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쉬고, 그것 이상의 무엇이 없다.
우리가 바라는 진리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바라는 자신의 삶에서 괴리를 일으키니까, 그 괴리 속에서 일어나는 번뇌와 고통을 멈추어줄, 무언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바라는 마음에서 찾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리를 얻으면 번뇌가 사라지는 것인 줄 안다. 그래서 진리가 거룩하고 성스럽게 여겨져 왔다.
그런데 지금까지 생각해온 것을 조금만 반대로 생각해보라. 우리가 만약에 있는 그대로만 살아간다면, 즉, 기쁨이 오면 기쁨으로 살고, 고통이 오면 고통으로 살고, 못남이 오면 못난 대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살고, 잘남이 오면 잘난 대로 자랑하지 않고 살고, 이미 화를 내어 버린 상황을 화 안낸 자신이 되려고 자신을 쥐어뜯으며 후회하지 않듯이, 미움, 원망, 짜증, 분노, 게으름, 등등... 삶의 일상적이 그 모든 것에 다 당연한 것이라고 살면, 무언가 바라는 마음이 없을 것이다.
자 보라!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무슨 마음이 일어날 것인가?
너무나 당연하게 내게서 일어나는 어떤 것도 버릴 것이 없다는 마음이 일어날 것이 아닌가?
그러면, 너무나 당연하게 살아왔듯이 바랄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는 삶으로 살아갈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삶과 마음에 괴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괴리가 일어나지 않으니 번뇌와 고통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 아닌가? 번뇌와 고통이 없고,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바라는 마음이 없으니, 탐욕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남의 것을 얻으려하거나 더 얻으려 하지 않을 것이고, 남의 것을 얻으려하거나 더 얻으려 하지 않으니, 얻지 못해서, 또 자신의 것이 빼앗겨서 일어나는 화도 생기지 않을 것이니, 다툼이나 미움과 원망과 증오등과 나아가 살인이나 전쟁 등... 세속적으로 나쁘다고 하는 일들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냥 주어진 인연과 상황에 만족하며 살 것이다. 또 설사 뭔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노력한 결과에 만족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살아갈 것이다.
그러면 과연 도니 진리니 하는 것을 구하기 시작했을까?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다면, 이 세상에 도니 진리니 하는 것이 생겼을까?
저 우주 속 어딘가에 거룩하게 감추어져 있을 것 같은 그러한 성스러운 진리는 애초에 없었다. 우리가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하지 않는 그 마음이, 더 나은 그 어떤 모습이 되려고 한 그 탐욕스러운 한 마음이, 항상 머물지 아니하고 변하는 우리의 삶과 모습을, 머물러 있고 변하지 않는 거룩한 어떤 모습으로 바꾸고자 한 그 마음이, 있지도 아니한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니 도니 하는 것을 만들었을 뿐이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그 모든 모습이 바로 진리의 삶이다. 매 순간 머물지 않고 또 항상 똑같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들이 매 순간 진리의 삶인 것이다.
그러니, 너무나 확연하지 않은가? 밥 먹고, 잠자고, 똥 누고, 행하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한 것이 무슨 거룩하고 성스러울 일인가? 삼라만상의 모든 사물들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성스러울 것도 애초에 없는데, 첫째 가느니 둘째 가느니 하는 것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조사는 그것을 말한 것이다.
양무제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짐을 대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요?”
조사는 단 한마디로 잘라버렸다.
“나도 모르오!”
무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사의 말뜻을 알지 못하고 나중에는 조사가 자신을 놀리는 줄로 여기고 얼굴까지 붉힌 채 말이 없었다.
무제는 조사의 말을 듣고는 속으로 기가 막혔을 것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불법을 알고 불사를 하면서, 그것이 불법을 숭상하는 거룩한 일을 하고 있다고 칭찬하는 수많은 스님들에게 들은 말과는 너무나 다른 말을 하고 있으니,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자가 정말로 대단한 스님인가? ’ 또는 ‘이 자가 불법을 알기나 하는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은 것이다. 그러나, 조사는 끝까지 자비심을 잃지 않고 답을 한다.
“나도 모르오!”
하긴, 애초에 조사는 무제의 그릇을 알고, 아무리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 한들 그가 알아듣지 못할 것을 알은 지도 모르겠다.
조사가 말한,
“나도 모르오!”
이 말은 무제를 놀리려고 한 말이 절대 아니다. 보라!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과연 있는지....
우리의 참 모습이 바로 그렇다. 매 순간 바뀌고 머물지 아니하여서, ‘나는 이것이다.’ 하고 할 수가 없다. 그러니, 모른다는 대답을 할 수 밖에...
그러나 그 모르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참 모습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분별하는 마음은 모르는 그 참모습의 우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견디지 못한다. 마음의 속성이 늘 비교하고 분류하여 자신이 알 수가 있어야 비로소 안심을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나, 모르는 우리의 모습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분류하고 비교하여서 자신이 알 수 있게 만들려고 하는 그 분별하는 마음이 잘못된 것이다. 그 마음으로 인하여 번뇌가 고통이 생긴 것이다. 모르는 우리의 모습은 이 순간 살아 숨쉬는 실제적 모습이고, 분별하는 마음은 생각 속에만 존재하는 허상이기 때문에...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을 그 마음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간다. 그러니, 그 번뇌가 끝이 있겠는가?
그냥 있는 그대로 사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산다는 말은, 있는 그대로라는 어떤 상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자신도 알 수 없는 미지의 모습으로, 그러나 항상 먹고 자고 누고 생각하고 행하고 말하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그 알 수 없는 나의 삶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삶인 것이다. 그렇게 항상 먹고 자고 누고 생각하고 행하고 말하고 움직이며 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항상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항상 텅 비어 있기에 무수한 것들이 일어나고 사라질 수가 있고, 그 일어남과 사라짐이 매 순간 같은 것이 없으니 ‘이것이다.’ 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이다.
그것에 무슨 공덕이 있고, 성스러움이 있으며, 고정된 모습이 있어서 ‘이것이다.’ 라고 할 것이 있을 것인가?
이것을 모르는 무제는 불법을 숭상하고 불사를 많이 하여 공덕을 많이 쌓은 자신이 스스로 거룩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으니, 조사가 자신을 놀리는 줄로 착각하고 얼굴을 붉히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