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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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사람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3,018

15-02-17 17:00

본문

부처님께서 잡아함경에서

“어리석은 이는 어떤 대상을 접하고 거기에 대하여 괴롭고, 즐겁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 다음 그것에 대해 슬퍼하고 눈물 흘리며 원망하고 울부짖는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는 어떤 느낌을 갖더라도 근심, 슬픔, 원망, 울부짖음 같은 증세를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괴롭고, 즐겁고 하는 그런 느낌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첫 번째 화살은 맞으나,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는 것과 같다."

라고 하였습니다.

육조 스님은 이와 같은 뜻으로

“생각에 생각을 덧붙이지 않는 것이 부처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세간에서 부딪히는 일에 우리는 늘 생각과 감정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견문각지로 느끼는 생각과 감정에서 다시 감정을 일으켜 대상을 보고 좋다 나쁘다 하거나, 또 그런 감정에 휘말려 스스로 고통에 빠져버립니다.

 

세상의 일은 좋고 나쁜 일들이 늘 일어납니다.

그 이유는 우주는 늘 순환하기 때문입니다.

 

난 것은 때가 되면 사라져야 하고, 또 때가 되면 사라진 것은 다시 생겨납니다.

다시 생겨난다는 것은

같은 것이 생겨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라지며 흩어지면서 많은 인연으로 나뉘어 다른 인연과 만나 다시 다른 수많은 인연들을 만들어 낸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인간사에 들어오면

성공도 되고 실패도 되고, 사랑도 되고 미움도 되고, 만남도 되고 이별도 되고, 얻음도 되고 빼앗김도 되며, 원망도 되고 친함도 되며, 횡재도 되고 끔찍한 사고도 되고, 병도 되고 죽음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비롯한 나라는 생각이 있는 존재들은 자꾸 나를 위해 거두려는 욕심이 있어서

자연스런 우주의 순환을

자신을 중심으로 끌어당겨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좋다 하고, 손해가 되면 싫다고 하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죽지 않는 존재가 없고, 얻은 것이 언젠가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 없으며, 처음 만날 때 그리 좋든 마음도 날이 가면서 식었다 따뜻했다 반복하지 않는 마음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욕심을 내어도 좋은 것도 진리지만, 싫은 것도 어쩔 수 없이 역시 진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그 존재의 이유를 가지고 있고, 그 존재의 이유가 바로 인연이며, 연기법은 사람들의 도덕이나 윤리, 좋아함과 싫어함에는 조금도 상관하지 않고 일어날 일은 아무리 끔찍해도 일어나게 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아무리 바라고 찬란한 일일지라도 일어나지 않게 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에 강도를 만나고 사고를 당하고 병에 걸려 죽을 때도 있습니다.

어쩌면, 자연사로 죽는 것보다 그러한 불행(?)으로 죽는 경우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연사가 좋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인연의 죽음을 싫어합니다. 그러다보니, 그 죽음의 상대인 강도나 사고나, 병 등을 미워하고 혐오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우주의 법칙을 잘 꿰뚫어보면, 일체가 인연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고, 인연은 우주의 법칙이니,

강도를 만나 죽는 죽음도, 죽을 때가 되었고, 강도는 돈이 필요한 인연이 서로 그 순간에 만난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혐오스럽고 나쁜 일이라고 하더라도, 두 사람의 인연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모든 것이 그렇게 되어가도록 인연들이 흘러온 것입니다.

강도라고 어릴 때부터 강도짓을 하지는 않았겠지요.

살면서 만난 인연에 의해 길들여지고 물들어진 것입니다.

길들여지고 물들여지기 때문에 습이 생기고, 그 습이 있기에 우리는 남들과 다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닥쳐오는 일들은 우리가 좋다 나쁘다 하고 나누지만 않으면 아쉬운 마음에 맘에 들어 하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이 일어날 인연의 일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우리는 망상을 부립니다.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을 바람(희망)에 집착하여 있지도 않은 일을 진짜라 하고, 일어난 일을 부정하려 합니다.

그래서 강도가 아니었으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인연을 원망합니다.

과연 강도가 아니었다면 죽지 않았을까요?

이미 죽고 없는데?

우주에는 가정이 없습니다.

 

노방호설(老龐好雪)이라는 공안(公安)이 있는데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방거사(龐居士)가 약산(藥山)스님을 하직하자,

약산이 열 명의 선객(禪客)에게 문 앞까지 전송하도록 하였다.

거사는 허공에 날리는 눈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잘도 내린다. 송이송이 딴 곳으로 떨어지지 않는구나."

그러자 곁에 있던 선객이 말하였다.

"어느 곳으로 떨어집니까?"

거사가 따귀를 한 차례 치자 선객들이 말하였다.

"거사께서는 어찌 거친 행동을 하십니까?"

거사가 말하기를,

"그대가 그래가지고서도 선객이라 한다면, 염라대왕이 용서해 주지 않을 것이다"

 

눈이 어디에 따로 떨어질 자리를 예약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가만히 눈이 그 자리에 떨어지기 위해서 만난 인연을 생각해보면 방거사의 말이 백번 옳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햇볕이 따뜻해서 물이 증발하여 수증기가 되고,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고, 점점 커져서 물방울이 되고,하늘 높은 곳의 온도가 낮으니 얼음 알이 되고, 더 커지니 무거워져 아래로 떨어지게 되고, 아래의 온도도 겨울이라 낮으니 녹지 않고 떨어지니 눈이 되는데, 매 순간 내려 오는 과정에 주위의 인연으로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이리저리 날리고, 또 온도가 바뀌니 눈도 녹으며 무게도 바뀌고, 그래서 바람과 눈의 무게의 상황에 따라 매순간의 위치가 이리저리 바뀌면서 내려오다 결국 그 자리에 앉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인연으로 내려와 그 자리에 앉지 않고

다른 곳에 앉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강도를 만나고 사고를 당하거나 병에 걸리거나 불행이 오는 것도 이런 이치입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왜 그런 인연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인연을 제 맘대로 변하게 할 수 있는 양

분노하고 원망하고 틀렸다 하며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오는 인연에서 대부분은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덜 고통스럽겠습니까?

그것은 인연의 법을 알고 가만히 받아들이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처님이 말한 지혜로운 사람의 삶이고

방거사(龐居士)가 선객에게 그 정도의 인연법도 모르면서 무슨 선을 하느냐고 뺨을 때린 이유입니다.

할 수도 될 수도 없는 일에 애를 쓰고 힘을 빼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무리 세간적으로 봐서 능력과 힘이 뛰어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삶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인연에 의해 살아지는 것입니다.

법륜스님이 하는 비유에 따르면,

주인이 목줄을 길게 하여 강아지를 끌고 산책을 나갔는데,

목줄이 원체 길다보니 강아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웬만한 것은 다 즐기고 돌아다닙니다.

날아가는 새를 보고 짖기도 하고, 코로 길바닥을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기도 하고, 또 나비를 따라 뛰어 가기도 하고, 전봇대에 다리를 들고 영역표시도 하고 등등으로 즐겁게 돌아다니다가 집에 돌아옵니다.

과연 강아지는 제 맘대로 했을까요?

가만히 보세요, 결국 주인의 목줄에 매여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고 한 바퀴 돌아왔을 뿐입니다.

하지만, 강아지는 그것을 모르고 자신이 마음대로 뛰어놀다 온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우리 중생이 삶을 보는 시각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위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어떤 대상을 접하고 거기에 대하여 괴롭고, 즐겁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을 갖는다.”

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보려고 하지 않아도 보고, 들으려 하지 않아도 들리는 것이 우리의 삶이요, 인연이라는 말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인연에서 절대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가오지 않은 인연은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나간 일을 잡고 이럴 때 이랬으면 저럴 때 저랬으면, 너 왜 그러니? 세상이 왜 이런거야?하고 자신이 원하는 세상이 오지 않음을 탓하고 원망하며 욕심을 부립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어리석은 이는 어떤 대상을 접하고 거기에 대하여 괴롭고, 즐겁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 다음 그것에 대해 슬퍼하고 눈물 흘리며 원망하고 울부짖는다.”

라고 하십니다.

망상(妄想)이라는 것은 나쁜 생각, 음란한 생각, 옳지 않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되지도 않을 일을 바라는 생각’이 바로 망상인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말한 강도를 만나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을 텐데 하고 인연을 탓하며 고통에 빠지는 것이 망상인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더라도 진리를 깨친 사람들은 일체가 그러함을 알기 때문에 세상을 보고 모든 것을 느끼지만, 거기에 다시 마음을 내어 다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다음 말씀에서

“그러나 지혜로운 이는 어떤 느낌을 갖더라도 근심, 슬픔, 원망, 울부짖음 같은 증세를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괴롭고, 즐겁고 하는 그런 느낌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첫 번째 화살은 맞으나,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는 것과 같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선재동자시절에 가리왕에 갈갈이 찢길 때에도 조그마한 원망의 마음을 내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러한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라는 작은 존재에 갇혀서 생각이나 감정이라는 것에 지배를 당하며 끌려 다니는 것이 진정한 내가 아니라,

이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만들고 모든 인연을 내는 존재, 즉 본성이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인연 속에 우리가 만든 로봇이 되어 이 순 

간 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기관목인(機關木人)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댓글목록

태정이할배님의 댓글


법문 감사합니다.()

윤기붕 님의 댓글


명절 잘 보내십시오.*^^*

無事人 님의 댓글


스승님께서도 평안히 보내십시오!!!^^

지도무난님의 댓글


다음주 뵈여

민여69님의 댓글


법향기 가슴에 담아갑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지도무난님
다음 주에 보십시다.^^

윤기붕님의 댓글


민여님 좋은 밤 되세요~^^

無事人님의 댓글



_()_

윤기붕 님의 댓글


명절 잘 보내요~*^^*

해탈옹 님의 댓글


그저 감사합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명절에 행복하십시오.*^^*

우페카님의 댓글


_()_

김창석(윈드)님의 댓글


법문 소중히 받습니다
감사합니다_()_

윤기붕님의 댓글


저도 감사합니다._()_

나그네님의 댓글


♡

윤기붕님의 댓글


누가 하트를 날립니까?
그 놈을 찾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