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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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구한 세상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2,271

20-04-18 10:42

본문

예수가 구한 세상

 

사람들은 편을 가르기를 좋아해서 같은 길을 가면서도 자기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홈페이지에서 예수님이나 기독교적인 내용을 이야기하면 불교적인 공간에 기독교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고개를 돌리거나 오히려 부처님 앞에서 예수 이야기나 하느냐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이러한 공부를 하는 것은 진리를 깨달아 자유로워지려는 것이지 어떤 존재를 추종하여 그와 그의 사상의 노예가 되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이것을 깨달은 후에 부처님과 예수님의 깨달음과 사상은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알았다.

다만 두 분이 태어나고 살고, 또 만났던 사람과 문화와 종교적 차이 때문에 설명하는 말과 비유가 조금 다를 뿐이다.

 

먼저 부처님이나 예수님은 자신의 깨달음으로 종교를 만들 생각으로 그러한 길을 간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한 것이 인간의 가장 원천적인 마음과 이 우주의 원리까지 꿰뚫게 되었고, 그 결과 이 세상은 본래 아무 일도 없고 문제는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안 것이고, 그것을 세상 사람들이 함께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자신이 깨달은 바를 전파하였고, 그것이 기존의 고등종교의 교의(敎義)나 교리(敎理)와 부합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이미 기존의 종교에서 그 핵심을 말하고 있음을 알았고,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순전히 인간의 입장에서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으로 왜곡시키고 있음을 알고 사람들에게 기존의 것에 새로운 것을 보충하여 가르친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종교는 교훈과 처벌과 복종을 주로 말했다면 부처님과 예수님 등의 가르침은 인간과 세상 그리고 사랑이 중심이 되어 있다.

그래서 과거의 종교에서는 계율을 통한 타의적(他意的)이고 추종적(追從的)인 변화를 가르쳤지만, 지금의 종교는 사랑 자비라는 자율적(自律的)인 사상이 핵심을 이룬다.

 

그리고 참된 종교는 믿음이 아니라 세상의 진실을 통해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말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핵심은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고, 그 두 분이 보는 세계관 역시 지역적이고 문화적인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예수님의 비유를 드는데, 그래도 종교적인 이유로 이 글을 읽기에 불편하다거나 문제로 삼는 마음이 있다면, 애초부터 일체가 한 법인 진리를 알려는 마음이 자신에게 없다는 생각을 해봐야 할 것이다.

 

다만 글을 씀에 있어서, 이 글을 읽는 분의 대부분이 불교적인 감정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발음에 대한 불편함이 있을 수 있음을 고려하고, 또 이 글 역시 종교성을 강조하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존칭을 빼고 예수라고 지칭하였다.


사람들은 예수는 세상을 구하러 왔다고 한다.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우리를 죄에서 구하기 위해서 왔다고 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가 구한 세상이 과연 무엇인가?

그가 세상에 와서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죄에서 구했는가?

지금 세상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지구에 넘쳐나지만, 과연 그들 중에 몇 사람이 진정으로 죄에서 구함을 받았으며 과연 예수가 계획한 대로 세상을 구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아니 거꾸로 예수를 믿거나 종교적이 아니더라도 예수의 뜻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과연 예수가 말하는 뜻을 제대로 알기나 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유다 이스가리옷.

그는 예수의 열두제자 중 한 사람으로 로마의 지배에서 이스라엘을 독립시키려는 저항 세력이다.

 

그는 현재 예수를 믿는 종교인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죄인이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볼 때는 나라를 위하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선지자(先知者)들의 말에서 자신의 나라를 구할 왕이 온다는 말을 믿었고, 그 사람이 바로 예수임을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의 열두제자 중의 한 사람이 되어 그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는 끝내 예수에게서 자신의 나라를 물리적으로 독립시킬 징조를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배신하고 30냥에 율법 학자들에게 팔아넘긴 것이다.

그가 예수를 믿지 못한 이유는 애초부터 지향하는 방향이 달라서이지만, 그래도 한동안 스승이라며 추종하던 예수를 팔아넘긴 이유에 대해선 동기와 과정이 자세하지 못하여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그 역시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은 후에 죄책감에 목을 매어 죽었다.

 

유다가 예수를 끝내 배신한 것은, 유다의 눈에 비친 스승이 아무리 봐도 자신의 나라를 로마의 학정에서 독립시킬 어떤 의지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처럼 예수는 지금도 그를 믿는 집단에서는 나라를, 인간을, 세상을 구하는 자요 하느님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그냥 2,000년 전에 종교적인 이유로 죽은 위대한 한 성자일 뿐, 자신의 삶과는 크게 상관없는 한 존재일 뿐이다.

그 사실은 아마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 중에도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과연 예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었기에 적어도 사람들은 세상을 구하였다는 것은 차지하더라도 성인이라는 것은 인정할까?

(물론, 종교적인 이유로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단체는 빼고...)

그럼 그는 무엇을 구하였을까? (여기서 구한다는 것은 찾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얻는다는 의미에 가깝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는 세상을 구하였다. 이 우주를 구한 것이다.

그것은 원각경(圓覺經) 제3 보안보살장(普眼菩薩章)에 보면, 한 사람이 청정해지면 온 세상이 청정해진다는 말의 뜻과 같다.

 

물론 그는 종교적인 의미 말고는 실제로 사람들의 죄를 대속한 것도 아니고 물리적으로 세상을 구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본성을 알았고, 세상이 이미 완전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시비와 분별이 없는 자가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보여주었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리려 했었다.

 

사람이 태어나 삶을 살아가는데 꼭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시비와 분별이 없는 이유는 바로 이 세상이 이미 완전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조사들이 말하듯이 때에 따라 옷 입고 밥 먹고, 피곤하면 누우며, 일이 있으면 일어나 일을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세상이 이미 완전하기에 따로 무언가를 지어서 살아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필요에 따라 인연에 따라 그때그때 마음 가는 대로 살아가는 것으로, 이름하여 무사인(無事人)의 삶을 말한다.

 

예수는 자신이 이 사실을 알고 나니,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가 깨달은 하느님의 나라에는 존재하지도 않은 시비와 분별을 믿고 그것에 빠져 진리로 알며 살아가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에 이미 완전함을, 이스라엘에서 태어났기에 이스라엘의 믿음을 빌려서 그들의 신앙 속에 이 진리를 피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미 ‘아상(我相)’이 사라진 자여서 그의 마음은 오직 세상 사람들이 분별하는 마음을 버리고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부처님께서 깨닫고 난 뒤에 제일 먼저 드신 생각이 바로, 모든 사람들이 이미 깨달음이 씨앗이 있어서 자신이 일부러 나서서 말할 필요가 없음을 아셨다.

그래서 더 할 일이 없는 것을 알고 열반에 드시려고 했다.

그러자 깜짝 놀란 제석천과 범천과.., 하여튼 이름 있고 힘 있고 딴에는 거룩해 보인다고 하는 모든 거물이 나타나서 부처님께 간절히 빌었다.

“그래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으니 제발 그들을 조금만이라도 일깨워주소서.”

하였다.

물론 이 이야기는 방금 일체의 모든 것이 다 진리임을 깨달은 부처님의 마음의 갈등을 이야기로 풀은 것이지만, 이 갈등 속에서 그래도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부처님은 인연 따라 필요에 따라, 또 이미 깨친 마음 따라 설법을 하신 것이다.

 

예수도 그랬다.

이것은 물론 추측이다. 하지만, 이 도리를 알고 나면 잠시나마 이렇게 된다.

 

물론 많은 깨달은 사람 중에 스승 노릇하기 싫어서 그냥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들도 소극적이지만 주위에 인연이 된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말해주려고 한다.

왜 그런가? 그렇게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 자신은 이미 완전한데, 스스로 무엇인가를 지어서 그 속에 빠져 힘들어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동정심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비심도 아니다.

물론 세간 적으로 보면 자비심이라고 할 수 있지만, 스스로는 그것을 자비심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렇다. 이것이 바로 필요에 따라 인연에 따라 하는 것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예수도 이러하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실재의 삶과 동떨어진 문자나 글귀만 가지고 옳고 그름을 따지고 있는 율법 학자들과의 부딪힘은 어쩌면 필연적인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이 삶과 죽음이 없다는 것을 아는 그가 율법 학자들의 권위나 죽음이 무서워서 진리를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는 십자가형을 받은 것이다.

 

예수가 살아간 시대적 배경과 환경이 깨달은 자가 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반면에 부처님이 살아간 시대와 사회적 배경은 수행하는 자를 귀하게 여기는 땅이고, 그러한 곳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수행을 했기 때문에 부처님은 매우 많은 시간을 사람들을 위해서 행할 수 있었고, 그 가피를 입은 사람도 수없이 많았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말했다.

“다 이루었다.”

 

과연 다 이루었는가?

 

그가 죽은 후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메시아 이상으로 알고 신(神)으로 믿어 그 세력이 커지고, 그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염려한 로마의 핍박으로 수많은 추종자가 희생되었지만,

그를 믿는 사람 중에 많은 사람이 참다운 믿음으로 죽은 자들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엉뚱하게도 천국에 간다는 믿음으로 죽어간 자들도 참으로 많았을 것이고, 또 로마는 여전히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탄압하는 국가로 존재했다. 물론 후에 기독교를 정식으로 인정했지만...

 그리고 예수가 대신해 죽었다고 하는 죄인의 죄는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에게서 사라지지 않았고, 중세에는 오히려 교단에서조차 악업이 횡행했으며, 지금도 죄에서 벗어나서 완전하게 사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만 들 뿐이다.

 

하지만 예수가 말한 죄는 인간이 말하는 그러한 죄가 아니라 부처님이 말씀하신 핵심인 시비분별이다.

물론 그는 하느님을 말했지만, 그의 말의 핵심은 모든 것이 다 완전한데 오직 사람의 마음에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사랑이 없다는 것은 결국 사람의 마음에 옳고 그름 등의 분별과 그것을 가리는 시비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가 말한 천국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깨달음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시비분별이 난무하는데 예수는 과연 무엇을 이루었는가?

 

물론 이렇게 묻는다면 유다 이스가리옷이 물리적인 이스라엘의 독립을 얻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고 예수를 의심한 것과 똑같은 물음이다.

 

하지만 지금도 교회에서는 예수의 뜻을 그렇게 가르친다.

그들이 교회에서 의식처럼 행하는 세례를 받고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믿는다면 과연 예수가 이루려고 한 것을 이룬 셈인가?

 

그렇지 않다.

천국이라는 것은 없다.

 

그리고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에 완전한 죄 사함과 더불어 다시는 죄짓지 않는 자가 되어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나중에 천국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예수는 세상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다.

스스로 사람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 왔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세상은 완전하여 이미 우리에게 죄가 없음을 알라는 메시지였지, 자신의 능력을 뽐내려고 온 것이 아니다.

 

예수가 태어나기 이전이나 이후나 지금이나,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다.

예수는 세상을 구하러 온 것도 아니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도 온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완전히 했고, 자신의 삶을 구했고, 자신의 죄를 사한 것뿐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통하여 세상을 구했고, 사람들의 삶을 구했고, 사람들의 죄를 구했다.

아니, 그는 세상은 이미 완전하여 구할 세상도 없고, 구할 삶도 없고 사해줄 죄도 없음을 알았고 그것을 우리에게 말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필요에 따라, 인연에 따라, 마음 가는 대로 살아가면서...

 

예수가 말하고자 한 말의 핵심은

“하느님과 우리는 하나로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가 마음을 열기만 하면 돼!”

이다. 이것을 불교적으로 말하면,

“일체가 한 법이어서 세상과 나는 이미 완전하다. 우리가 분별을 멈추기만 하면 돼!”

이다.

 

이러한 메시지이다.

이 메시지를 전달하고, 이 메시지를 바르게 알리기 위하여 여러 가지 비유와 이야기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랑과 간절한 마음을 통해서....

 

그러나 그 당시의 환경에서 그의 앎은 율법 학자들에게 반하여 충돌을 일으켰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구약에서 예정된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비유되었다.

 

이 상반된 환경이, 당시 예수를 미워하는 율법 학자들에게는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로마의 힘을 빌어 예수를 처형시킬 좋은 빌미가 되었고, 물리적으로 이스라엘을 구할 사람이라고 믿은 유다의 실망에 의해 십자가에 넘겨졌다.

예수는 그가 깨달은 진리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오직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이유로 처형당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불경을 저지르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말을 불경이라고 여기는 자에게 예수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구약에서 예정된 이스라엘의 왕일뿐이다.

 

예수가 신이건 아니건, 왕이든 죄수든 사실 중요하지 않다.

예수가 신이라고 믿더라도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왕일 ,뿐 예수가 말하고자 하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이고 

 

그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선전하고, 교회에 나가는 것만으로 마치 천국 가는 열차 티켓이라도 구하는 것이라고 믿거나 선전하고, 또는 마음에는 완전한 평화가 없으면서도 그저 예수만 믿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그를 신으로 받드는 것이라면, 예수가 신이든 아니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왜? 

예수가 아무리 신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생명과 자유를 대신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가 신이어서 내가 진정한 믿음을 내기만 하면 그가 말한 진리를 알지 못해도 나의 죄를 사하고 구해주실 것이다.’라고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를 진정으로 믿는 마음을 내는 것은 오직 믿는 나의 몫이지 신인 예수가 할 몫이 아니다.

 

결국 신이라고 믿는 사람과 신이건 아니건 상관없는 사람이 내는 마음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그 자유는 나 자신이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가 신이라고 그냥 믿으면서 예수가 말하려고 한 진리의 실체를 바르게 알지 못한다면, 그가 신이건 아니건 아무런 상관이 없이 그러한 사실에 개의치 않고 오직 그가 말하는 진리를 온전히 알고 그에 합당하게 구하는 자보다 무엇이 나을 것인가?

그래도 기독교적인 교리에 의하여 진리를 알지 못한 채 그냥 교리대로 그를 신이라고 믿는 자가, 진리를 알면서도 신이라고 믿지 않는 자보다 수승하다고 할 것인가?

 

만약 그러하다면 나 같으면 진리를 위해 천국을 포기할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진리를 알고 자유로워지지 않는 이상 천국에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렇게 얻은 자유가 얼마나 내게 맞는 옷이며 그것이 언제까지 나를 자유롭게 할 것인가?

 

그리고 진정으로 진리를 알고 나면 예수가 신이건 아니건 그건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마치 불교에서 조사선(祖師禪)이니 여래선(如來禪)이니 하거나 돈오돈수(頓悟頓修)니 돈오점수(頓悟漸修)니 하는 시끄러운 말도 진리를 알고 나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참된 진리(眞理)에는 그러한 모양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는 '진리 = 신'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진리 속에는 진리가 없다.

왜냐하면 진리 속에는 모두가 다 진리여서 따로 진리라고 하는 것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눈이 눈을 볼 수 없는 사실과 같다.

그와 마찬가지로 신 안에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진리 속에서는 신이니 아니니 하는 것이 아무런 문젯거리도 되지 않는 것이다.

신이라 해도 좋고 아니라 해도 무슨 상관이랴?

 

그리고 진리라는 것이 세상에 넘쳐나지만 진정한 진리를 아는 이가 드물고, 도를 닦는 자가 수없이 많지만 진정한 도를 닦는 이가 드물 듯이, 스스로 신을 믿는다고 하지만 정말로 신의 말을 제대로 알고 따르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저 예수가 신이라는 말만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가 말한 의미를 알고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가 신임을 알지도 못하고 예수가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겠는가?

 

오래전에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다시 봤다.

내용은 어쩌면 너무나 끔찍하다. 너무나 사실적인 고문 현장이 오히려 불쾌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것을 보면서 비록 예수 당시의 모습이 아닌 지금에 와서 각색된 영화로 보는 것이지만, 나는 그 고문의 채찍과 형벌을 한마디 불만과 원망 없이 받아들이는 예수의 모습에서 나는 진리를 아는 자의 그 거룩함과 그 사랑에 대해 눈물을 흘렸다.

 

진리를 아는 자의 거룩함은 범부와 성인의 모습으로 그려진 그러한 상대적인 거룩함이 아니다.

이는 금강경(金剛經) 제 일 분 법회인유분(法會因有分)에서 부처님께서 점심때에 집마다 차례로 빌어서 돌아와 식사하시고는 정리를 하고 발을 씻으시고 자리를 펴고 앉으시는 그러한 자연스러움에서 묻어나오는 거룩함이다.

 

비록 예수를 핍박하고 조롱하는 군사들이 예수에게 채찍질하고 침을 뱉으며 온갖 수모를 던지지만, 또 그 속에서 예수는 비록 겉모습으로는 고통을 느끼며 비명도 지르지만, 그의 원망 없는 그 행동과 눈빛은 금강경에서의 부처님의 모습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자연스러운 평화가 있었다.

그래서 거룩함인 것이다.

 

예수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처형 전날 제세마니 동산에 올라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면서 간절히 빌면서 말했다.

 

“주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물리소서. 하지만, 주님 뜻대로 하소서.”

 

사람들에게도 말했다.

 

“너희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다시는 싹을 틔우지 못하리라.”

“가난한 자는 복이 있으리니 천국이 저의 것이요...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복이...”

“저 들판에 핀 백합을 보라.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솔로몬의 영화보다 더욱 아름답구나.”

“내일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여기서 가난이란 상대적인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가브리엘이 예수의 잉태에 대해 말해줄 때 말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

 

그녀는 자신을 다가오는 운명에 기꺼이 그리고 완전히 맡겼다. 자신의 의지를 모두 버린 채.

자신의 의지를 모두 버리는 이것이 예수가 말한 복이 있는 진정한 가난이다.

깨닫지 못한 자가 깨닫지 못한 생각을 버리지 않고 그것을 기준으로 법을 구하면 과연 바른 법을 만날 수 있겠는가?

 

향엄지한(香嚴智閑)이 이 법을 깨닫고 스승 위산(潙山)에게 인가를 받자, 뒤에 이 사실을 안 앙산(仰山)이 찾아와 깨달은 경지를 물었다.

그러자 향엄은

“작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고 去年未是貧

올해 가난이야말로 가난일새 今年始是貧

작년에는 송곳 꽂을 땅이 없었는데 去年無卓錐之地

금년에는 송곳마저 없구나 今年錐亦無”

라고 하였다.

(물론 앙산은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여래선이니 조사선으로 말해 달라 하여 다시 오도송을 읊어 앙산에게 인정을 받지만, 여기서는 여래선이니 조사선이니 하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니...)

 

향엄이 송곳 꽂을 땅이 없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집어넣을 자리가 없다는 뜻이고, 뒤에 송곳마저 없다는 것은 이제는 아상이 사라져 나라는 살림살이도 없다는 뜻이다.

 

예수가 말하는 가난이 바로 이런 가난이다.

자신이 철저하게 죽고 오직 이 한 법, 이 진리만 남은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리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자신을 버린 이 가난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절대로 자유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가 한 법이므로 아상을 버리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뜻이다.

 

그래서 예수는 비록 천국이 저들의 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물리적인 나라인 천국을 말하는 것도 아니요, 그의 메시지는 무엇을 원하여 빌고 믿고 행하여서 천국이나 지복(至福)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지극한 평화와 행복은 오직 자신을 버릴 때만이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달마어록(達磨語錄),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서 도(道)에 이르는 네 가지 행(行)에 대해서

“첫째, 억울함을 참는 것이다.

둘째, 인연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셋째,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다.

넷째, 불법을 따라 사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셋째까지는 위의 말과 비슷해 보이는데 넷째인 불법을 따라 사는 것과 예수가 아무런 원망 없이 두들겨 맞는 것과 무슨 상관인가?

불법을 따라 사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불법이란 어떤 것도 그것이 존재하는 실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존재한다고 하는 집착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곧 불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말한다.

“그리고 불법 그 자체에는 그 어떤 것도 보존할 것이 없다. 따라서 불법을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의 몸과 소유물을 아낌없이 바친다. 그들은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집착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공(空)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들은 남을 도울 수 있으며,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다.”

 

비록 영화 속에 재현된 수난의 모습이지만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의 예수의 모습에서 이 모든 것을 읽을 수 있다.

고통에 울부짖으면서도 아무런 원망도 회의도 없는 조용한 눈. 그 눈은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눈이었다.

 

내 생각, 나의 것을 가지고는 절대로 자연스러워질 수가 없다.

나라는 것이 사라져야만 비로소 자연스러움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내가 바로 그 자연스러움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는 진리를 아는 자이다.

그는 세상을 구하려 한 것도 아니고 사람들의 죄를 사해주려는 마음도 없었다.

그는 다만 자신이 처한 삶에서 자신이 해야 할 바를 행했고, 그 행함 속에서 자신이 안 진리의 삶을 살아갔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삶에 대해 사람들에게 행하고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것이 세상을 구하고 사람들의 죄를 사함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힘이다.

 

물론 예수는 스스로 세상과 사람의 죄를 사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본래부터 사람들에게 죄가 없고 구할 어떤 고통도 없음을 알려주면, 그 말을 알아듣는 자는 본래부터 죄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죄를 사하려고 왔다고 한 것이지, 정말로 사람들에게 죄가 있어서 예수의 권능으로 죄를 사하려고 왔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예수가 채찍을 맞으면서 아무런 원망과 불만을 하지 않는 그 모습은 예수가 경전에서 말하고자 하는 뜻이 그대로 묻어나온 모습이었다.

 

비록 설화이지만 부처님께서도 인욕선인(忍辱仙人) 시절 가리왕(歌利王)에 자신의 몸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을 당해도 조금도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했다.

 

우리의 마음에서 나라는 생각의 기준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것을 핑계 삼아 더 좋은 것을 찾거나. 시비하려는 마음이 티끌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결코 예수의 행과 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이 진리의 근처에도 가지 못할 것이다.

 

비록 요즈음에 정보가 많아서 그러한 말을 듣고 알겠지만, 지금 이글도 마찬가지의 글이어서 보는 사람은 어쩌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머리에서 이해만 있고, 진정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또 그 버리려는 마음마저 버려서 한 티끌이라도 남아 있는 것이 없도록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예수를 아무리 신이라고 모신들, 예수가 왜 우리에게 그러한 말을 했는지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며, 세간에 유행하는 말에 세상에서 가장 먼 곳이 바로 머리에서 가슴이라고 하는 것처럼 결코 마음으로 평화를 얻거나 진리의 길에 들어서지 못할 것이니,

그에게 예수가 신이라는 것이, 또 그의 믿음이 아무리 깊은들 과연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예수가 세상을 구하고자 하지도 않았고 사람들의 죄를 사하고자 하지도 않은 것은, 사람이 이 진리를 깨닫고 ‘내’가 사라지면, 그냥 인연에 응하여 사람들에게 말할 뿐 ‘나는 그러한 자’라고 하는 마음은 조금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고 혹여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간단 말인가? 삶을 포기한 사람이 아닌가?”

라고 묘한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을 위해 사족(蛇足)을 붙인다.

 

그러한 사람은

혹시 내가 무언가 생각을 내고 시비를 하고 옳고 그름을 따져서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내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믿고 있는지는 아닌지?

 

그대가 아무리 원해도 세상에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요인이 없다면 그것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내가 그림그리기를 좋아한다고 해도, 애초부터 세상에 그림 그리기가 없었다면 나는 그것을 좋아하기는커녕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고,

또 그러한 이치와 상관없이 설사 내가 그림그리기를 알았다 해서 그림을 아무리 그려봐야, 세상에 그림 그리기가 필요 없다면 그것 역시 세상에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이다.

 

이 말은, 내가 비록 내 삶의 주인이고 내 생각대로 내 삶의 행로가 정해지지만 그것은 세상이라는 터전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이고,

그 세상이라는 것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모든 있는 것 없는 것이 서로 인연을 지어 그물망처럼 엮여서 돌아가고 있고,

그리고 그 돌아가는 세상이라는 것은 나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서 내가 아무리 바라더라도 그 결과가 내가 원하는 대로 잘되어지지 않는 것이 세상살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일조차도 나의 의지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내가 일으키는 생각조차도 내 의지와 상관없지 않은가?

 

그만큼 생각보다 우리를 움직이고 살아가게 하는 것들이 더 많고 큰데도 불구하고,

이놈의 생각이 바람과 욕심만 있고(물론 나름대로 계획을 짜고 노력은 하겠지만) 이 한 법의 인연이 없으면 결과에 대해선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서, 오직 자신(생각)만을 믿고 마치 그것이 없으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을 것 같은 교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보다 큰 착각과 불행의 씨앗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 한 생각을 버리는 것이 바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다.

예수나 부처님이나 조사님들 모든 선현과 선지식들이 하나같이 말하는

‘버리라’는 것이 바로 그 한 생각이다.

 

세상에서 불행은

“아이고 내 팔자야!”

할 때 찾아온다. 그러나

“그래 이게 바로 내 팔자야!”

할 때 비로소 자유와 평화가 온다.

 

똑같이 ‘내 팔자야’이지만,

앞에 붙는 수식어에 부정적인 ‘아이고!’ 가 붙느냐, 긍정적인 ‘그래!’가 붙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 수식어를 붙일 때는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의 아주 큰 차이의 시각이 존재한다.

비록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주인은 될 수 없지만, 그 시각의 차이를 바꿀 수 있는 주인은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다.

 

예수는 그 주인이 바로 우리라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 왔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오는 자유와 평화를 전해주기 위해서 온 것이다.

(팔자라고 해서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비유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삶은 매 순간 변한다.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바라든 바라지 않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받아들임으로 오는 평화는, 받아들여 보지 않은 자가 생각을 굴려서 아는 그러한 견해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한 번도 받아들여 본 적이 없어 그것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아무리 생각을 굴려봐야 그것은 자신이 가진 한정된 정보만 가지고 굴리고 있을 뿐이고, 그렇게 굴리는 생각은 그 정보 안에서 생성한 그림만 그려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절대 그런 평화를 상상할 수도 없고, 그것은 마치 머리와 가슴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머리와 가슴의 거리.

물리적인 거리는 한 척(尺)도 안 되지만, 생각의 거리는 세간과 출세간의 거리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마음이 안된다.”

고 하는 이 말은 사실 거짓이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마음이 안 다는 것은 그러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에 정보가 없다는 것은 정보는 있으나 아직 자신의 식구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로 이해한 것은 자신이 아는 정보로 그러한 것이 있다는 정도의 관심이고,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식구로 받아들여 하나가 된 것이다.

 

그래서 머리로 이해한 그 정보는 아직 실험해보거나 행하지 않은 지식이어서 그것이 자신에게는 어떤 상황과 결과를 만들어낼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고 오히려 의심과 불확실한 불안이 더 많다.

그러니 어찌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또한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 온통 의심과 불안 덩어리의 정보를 말이다.

 

우리의 주인이라고 떵떵거리는 생각이 볼 때는 그것은 마치 죽음과 같다.

 

하지만 그 생각의 죽음의 결과는 마치 존재 자체가 뒤바뀐, 다시는 불행해지지 않는 그러한 삶과 평화가 찾아온다.

왜냐하면, 받아들여 보지 않은 자가 굴리는 그 생각이 바로 모든 불행과 고통의 원인인데 그것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렇게 세상을 구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머리로만 알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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